테이블 No. 10
소설 속 인물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그럼 금요일과 주말까지 일주일에 3일 8시간 풀타임으로 일하는 거 괜찮으신 거죠?"
매니저 진이 식탁에 놓인 스케줄 표에 동그라미를 세 개 그리며 마지막으로 유림에게 물었다. 유림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주소를 보고 설마 했는데 역시였다.
진과의 약속이 잡힌 날,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이 어쩐지 찜찜했다. 미즈키(Mizuki) 스시. 새로 개업한 식당이라고 하니 처음 들어보는 것은 당연했다. 일식 셰프가 처음으로 차리는 가게라고 하니 악명 높은 악덕 업체라는 소문의 원상지였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시감이 들었던 걸까?
지도 어플이 알려준 대로 찾아갔더니 15분 일찍 도착했다. 식당에 도착하고 나서야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깨달았다. 주소였다. 일 년 반 전 써버 일에 신물을 느끼며 다시는 식당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며 닥치는 대로 가지각색의 일용직으로 버티다 결국 다시 식당 일을 하게 됐던 식당이었다. 간판만 바뀌고 내부는 그대로였다.
진은 통화로 한 달 전에 연락이 이상한 타이밍에 끊겨버린 것에 대해 해명했다. 당시에 갑자기 홀이 바빠져서 답장을 바로 할 수 없었다는 것과 하필 그날로부터 일하던 식당에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되어 유림과 문자 대화를 나누던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되었다며 사과를 덧붙였다. 진이 지나칠 정도로 사과를 여러 번 했지만 이전에 일하던 식당에서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두게 된 건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유림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식당 매니저로 일 해본 경험이 있는 유림은 매니저들이 받는 돈에 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내야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럴만한 복잡한 사정이 있겠지 싶었다.
그러다 지인으로부터 식당을 인수하게 되었으니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아 이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개업한 지 한 달 만에 오픈 멤버 중 한 써버가 갑자스러운 한국 방문으로 두 달 이상 자리를 비우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써버를 구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유림이 생각났다는 것이었다.
오픈 멤버 중에서 한 명이 갑자기 그만두게 되는 바람에 황금 같은 주말 쉬프트를 유림이 받을 수 있게 됐다. 금요일과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 그것도 풀타임이라니. 아무리 경력이 충분하다고 해도 처음 일을 시작한 식당에서 주말 사흘 연속으로, 그것도 풀타임(8시간 이상)의 시프트를 받는 경우는, 캐나다에서 떠나온 한국의 고등학교 동창을 만날 확률보다 드문 일이었다. 마침 주말에 일을 하던 최고 베테랑 써버가 사정이 생겨 주말 시프트가 비게 되었고, 급하게 한국으로 가는 바람에 친한 동생이나 인맥을 소개해 줄 여력이 없었고, 그 황금 같은 시프트를 물려받을 2, 3인자 써버가 어떤 이유로든 주말 시프트를 가져가지 못하게 된 것이고, 구인광고를 보고 온 다른 신입 써버들이 주말에 일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야 가능한 시나리오였으니까 말이다. 유림 입장으로는 집에서도 멀지 않고 주말에 일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나 유림은 확답하는 대신 질문을 했다.
"저, 그전에...... 혹시 새 사장님이 여기 인수하시기 전에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들 중에서 계속 일하시게 된 분 도 있나요?"
"지금 일하시는 분들은 제가 개업에 합류하면서 전부 새로 뽑았어요. 그런데 그건 왜요?"
"아,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금요일은 개시부터 저녁 8시까지, 나머지 주말 이틀은 오후 1시부터 마감까지 맞죠?"
"네. 일단 그렇게 할게요. 아참, 팁은 일이 익숙해졌다고 판단되면 그때부터 100퍼센트 나갈 거고요. 유림 씨는 경력도 많으시니까 아마 일 이주일 안에 가능할 거예요."
잘 알겠다며 유림은 진에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어젯밤 꿈을 꿨다. 꿈에서 유림은 일주일째 씻지 못한 몰골로 등에는 백팩을 메고 28인치 캐리어를 끌며 지하의 난방시스템과 연결된 송풍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평소에는 길을 가다가 바닥에서 올라오는 후덥지근한 바람을 만나면 기분이 나빠 피해 다녔지만 꿈속에서는 아니었다. 더운 바람이 올라오는 송풍구가 아니었다면 유림은 꿈속에서 밴쿠버의 늦가을 새벽 공기를 견디지 못했을 거였다. 그리고 그 꿈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을 것이었다.
어젯밤 꿈을 떠오르자 갑자기 닥쳐온 현실이 꿈보다 더 아득하게 느껴졌다. 일단은 월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 믿기지 않았고, 그리고 월화수목금토일 내내 일해야 한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일주일에 6일 일한 적은 많았으나 7일 내내 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불평을 할 때도 엄살을 피울 때도 아니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들이 있었다. 그 불들만 좀 끄고 난 후, 하루나 이틀정도 일을 빼는 건 문제가 아닐 것 같았다. 당장 한 두 달만 버텨보자.
체념하고 내려놓으니 오히려 기회가 오는 것 같았다. 윈스턴 처칠도 짐 발바노도 그리고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세계의 많은 위인들이 포기하지 말라고, 포기만 하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진다고 그랬는데 이상하게도 포기를 했더니 기회가 왔다. 그렇게 바랄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그것들이.
아무리 책이 좋아도 출판사에 취직하겠다는 꿈을 진작 포기했다면 멀쩡히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지 않았을 거였고, 책을 만들다 우연히 만나게 된 한 권의 책 때문에 꿈꾸게 된 캐나다를 적당히 포기했다면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았을 거였다. 그리고 5년 전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 버티지 말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갔다면 미친 듯이 비싼 밴쿠버의 집세를 걱정할 일도, 월화수목금토일 내내 일할 일도 없었을 거였다. 유림은, 지금의 자신을 만든 건 포기하지 못한 것들의 총집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써버일을 구하고 나자, 다행과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일을 많이 해서 생활비 걱정은 덜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이지만, 쉬지 않고 월와수목금토일 내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됐다. 그래도 '다행' 쪽에 무게를 더 싣기로 결심한 건 매니저 진이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