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No. 21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은 허구입니다.
"테이크아웃 놔두세요. 그건 제가 할게요."
방금 출근한 택희에게 인사를 건넸다가 들은 답변이었다. 유림은 스시바 바깥쪽으로 난 선반에서 온라인 주문으로 들어온 메뉴인 '스시 사시미 디너 박스'를 포장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제가 해도 돼요. 고맙습니다."
"아뇨. 제가 할게요. 유림 씨는 홀 봐주세요."
"아, 그럼 포장하던 것만 마저 싸고 홀 볼게요."
하고 있는 것만 끝낸다고 했지만 그게 지금까지 들어와 있는 포장 주문 중 마지막 건이었다. 유림은 자신이 하던 건 스스로 끝내고 싶었다. 음식 포장뿐 아니라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구분을 확실히 하는 것이 좋았다. 내가 하던 것을 넘기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이 하던 걸 중간에 넘겨받는 것도 싫었다. 경계가 섞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게 그 이유였다. 아무 말 없이 유림의 등 뒤에 한 참을 서 있다 주방으로 가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 자신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던 택희가 마음에 걸렸으나 달리 방도는 없었다. 포장 봉지 안에 냅킨으로 말아놓은 젓가락을 챙겨 넣을 때 스시바 맞은편에 있던 딜런이 유림에게 말을 걸었다.
"유림 누나, 누나는 데이팅 앱 안 써요?"
오후 2시 반, 늦은 점심을 챙기려는 손님들이 넣었을 온라인 주문만 두 어 개 있을 뿐 홀은 한가했다. 에드워드와 스티븐 주방장은 한가한 틈을 타 주방 뒷문 근처에서 미리 가져다 놓은 대용량 마요네즈 통을 뒤집어 놓고 자른 박스를 올려놓은 것을 의자 삼아 그 위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을 것이다.
"데이팅 앱이요? 갑자기 그건 왜......"
"아니, 지금까지 남자 친구 얘기 한 번 없는 거보니 남자 친구는 없는 것 같고, 어떤 활동들을 하시나 해서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유림은 딜런의 질문에 그냥 허허 웃어넘겼다. 유림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별 재미를 못 느꼈는지 이번에는 택희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티파니 누나는요? 데이팅 앱 안 써요? 아참, 저번에 무슨 싱글 모임 같은 거 간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됐어요? 맞아요, 손님도 없고 점심도 먹었고, 졸려 죽겠어서 그러니까 저 좀 살려줘요."
주방에서 식재료 재고를 점검하던 매니저 진과 함께 매장으로 나오던 택희의 마스크 위의 눈이 커졌다 다시 가늘어졌다.
"야 인마, 내 사생활도 좀 지켜줄래?"
"그러니까 별 재미 못 봤다...... 그런 말씀인 것 같네요. 으하하."
"무슨 재미? 나도 같이 재미 좀 보자. 오늘 손님 유난히 없네."
주방 세면대에서 씻었을 게 분명한 물기 묻은 손을 유니폼 가슴 자락에 적당히 문질러 닦으며 스시바로 돌아온 에드워드가 끼어들었다. 생선이 진열된 스시바를 사이에 두고 유림과 마주 선 에드워드에게서 연초 태운 냄새가 났다.
"아, 저번 주에 택희 누나가 뭐 싱글 모임 그런 거 나간다고 했었잖아요. 기억나시죠, 형님? 그 후기를 지금 막 택희 누나가 들려주려는 참이었어요."
택희는 가자미 눈으로 딜런을 쳐다봤다. 아이라인을 한 눈매가 더욱 매서워 보였다.
"후기는 무슨 후기. 별거 없었어요. 그냥 하루 놀고 헤어지는 거지."
"택희, 너는 눈이 너무 높아서 문제야. 이제 너 나이 때면 막 따지면 안 돼. 돌싱들한테까지 기회를 줘야 한다고."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아 화장실로 피신하려던 유림은 에드워드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에디 셰프 님, 저번주에 이 이야기 나왔을 때도 말씀드렸지만, 연애 상대 찾으려고 그 모임에 나간 게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저 눈 안 높아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그냥 사람들 만나서 놀고 싶은데 굳이 싱글 모임에 왜 나가~ 다 너를 아끼니까 내가 하는 말인데, 여자가 그 나이에 남자 만나려면 애 딸린 돌싱도......"
"솔로 모임 나갔다고 연애가 목적이 아닐 수도 있죠. 저도 그냥 새로운 사람들 만나고 싶어서 그런 모임 종종 나가요. 이왕이면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 주제도 잘 맞을 거고 라이프 스타일도 겹칠 테니 친구가 되기도 쉬울 거잖아요. 무엇보다도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유림은 싱글 모임 같은 델 나가본 적 없었다.
"어? 어 뭐...... "
"그리고 여자 나이 자꾸 언급하시면서 돌싱이 어쩌고, 애 딸린 남자 어쩌고 하시는 말씀 듣기 너무 불편해요. 티파니 님은 그렇게까지 해서 굳이 연애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본인 취향이란 것도 있을 수 있는 건데요."
참아야 했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림은 처음으로 에드워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을 마칠 때까지 똑바로 쳐다봤다. 유림의 돌발 직언에 에드워드는 갑자기 몸을 돌려 행주를 찾더니 이미 깨끗한 사시미 칼을 닦았다.
"아, 그렇죠. 택희 누나 워낙 동안이라 연하남들한테 인기 많을 걸요."
연상남이든 연하남이든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니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이번에는 참았다. 지긋지긋했다. 캐나다에 오기 전에는 다들 선진국이라고 하니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곳이라 생각했는데 한국보다 이런 이야기를 더 듣는 일이 많아지자 유림은 아무도 속인 적 없이 혼자 속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캐나다 아니, 캐나다 내 한인 사회는 예상외로 80년 대 한국 사회 같은 면이 있었다.
"진, 진은 뭐 없어? 우리 진이 키는 살짝 아쉬워도 얼굴이 잘 생겼잖아. 여자들한테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왜 여자친구 안 만들어? 일만 하지 말고 연애도 좀 하고 해야......"
"에디 셰프 님, 사람들이 불편해하는데 너무 개인적인 질문은 자제 좀 부탁드릴게요. 가족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물론 좋긴 한데 딜런 셰프 님도, 같이 바람 잡지 마시고요, 좀."
"이 자식은 또 왜 저래. 평소엔 싱글벙글하는 놈이 갑자기...... 너 혹시 생리하ㄴ"
"워워. 형님, 그만하시죠. 저희 이러다 매장당할 것 같아요. 밴쿠버 '스시 바' 살인사건이라고 내일 뉴스에 나오기 싫으니까 이쯤에서 그만 호기심을 죽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찌직-찌직-찌직
마침 온라인 주문이 프린터에서 인쇄되는 소리가 났다. 이른 저녁을 먹고 싶은 누군가의 벤또 박스나 비프 데리야끼쯤 되겠지. 아니면 늦은 점심이겠거나. 프린트된 주문 용지를 유림이 뽑아 가려는데 더 어디선가 나타난 진이 먼저 낚아챘다. 주문지를 스시바나 주방으로 전달하는 일은 매니저가 아니라 써버의 일이었기에 유림은 당황했다. 민망해진 유림은 진이 스시바 안 쪽으로 들어가 손수 주문지를 꽂아주는 것을 지켜봤다. 평소의 친절하고 다정한 진의 표정이 오늘은 기분 탓인지 좀 어두워 보였다.
"이제 저녁 손님 받을 준비 슬슬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낮에 덜 바쁘면 원래 저녁에 바쁘잖아요. 오늘 날씨도 좋아서 왠지 저녁 손님 몰릴 것 같네요."
주방까지 들리도록 크게 소리친 진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택희와 유림을 보며 얘기했다.
"택희 씨, 테이크아웃 하면서 홀도 잠시만 같이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유림 씨는 저랑 잠깐 얘기 좀."
갑자기 일대 일 대화라니, 유림은 당황했다. 따라오라는 고갯짓을 한 진은 스시 바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매장 모퉁이의 손님석으로 향했다. 진의 등을 따라가는 시간은 불과 20초도 안 될 텐데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헤드 셰프인데 내가 너무 했나. 업장 분위기 망쳤다고 뭐라고 한 소리 들으려나. 티파니 님도 복귀했으니 주말 시간 더 달라고 했을 테고, 제이미도 쉬프트 시간 더 필요한 것 같은 눈치던데......' 이번 불화로 더 이상 나올 필요 없다는 말을 듣는대도 유림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최저 시급을 받는 일이란 게 그렇다. '내'가 아니라도 내 자리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은 끝도 없이 줄을 서서는 언제 라인업이 줄어들까 기다리고 있다. 그걸 모르지 않는 업주는 사람을 채우고 비우고 또 채우는 일에 무신경해질 수밖에 없다. '까라면 까' 그게 이 바닥 룰이니까. 못 까면 내 보내진다. 나흘이던 스케줄이 이틀이 되고 이틀이던 스케줄이 하루가 되는 과정을 겪으며, 사실 내 보내지는 것이지만 제 발로 나가는 형태가 되어 그렇게.
진의 호출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는데 식탁을 사이에 두고 진의 얼굴을 마주하자 우편함에 쌓여있을 고지서들이 떠오르며 후회 비슷한 것이 밀려왔다. 마주 앉고 나서도 입을 열지 않고 스마트폰을 확인하며 뜸을 들이는 진이 답답해 먼저 입을 떼고 싶었으나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유림은 그냥 기다리는 걸 택했다.
"유림 씨 뭐든 열심히 하려고 하는 거 알고, 또 경력에 비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금방 배우기도 했고, 그래서 제가 팁도 일주일 만에 백 퍼센트로 가져갈 수 있게 해 드렸고, 그랬는데....... 근데 유림 씨 그러시면 안 돼요."
"예, 제가 생각해도 이 가게에서 가장 어른이신데 제가 말을 좀 심하게 한 것 같......"
"그게 아니라 테이크아웃이요."
"네......?!"
"택희 씨가 그러는데 오늘 오후에도 테이크아웃 택희 씨가 맡겠다는 걸 끝까지 붙잡고 있었다면서요."
"아, 그건 제가 하고 있었던 거라...... 그리고 홀도 많이 안 바쁘기도 했고 해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테이크아웃은 가장 시니어가 하는 게 맞아요. 그것만 하는 게 아니라 홀도 신경 쓰면서 주문 음식도 포장하는 포지션이라 가게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빨리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만약 홀이 더 급하다 싶으면 포장은 지연이 좀 되더라도 매장을 지원해야겠다는 판단도 빨리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보통 시니어가 테이크아웃을 담당하는 건데 유림 씨가 버티고 있으니 택희 씨가 당황스러웠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뿐 아니라 저번에도 주문 음식 포장한다고 거기만 신경 쓰고 홀 바쁜 거 안 도와줬다고 제이미가 그러던데요."
유림은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식탁 위에 올려진 나무젓가락 끝만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