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No. 22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은 허구입니다.
"택희 씨가 여기서 일도 가장 오래 했고 업계 경력도 제일 많으니까 택희 씨 있을 땐 테이크아웃 포지션은 웬만하면 붙잡고 있지 마세요. 유림 씨가 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여기 룰이 그렇다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전부 말하지 않은 경력을 다 보태면 써버로 5년 일했다는 택희보다 유림의 식당 경력이 1년 더 길었고, 이 식당 바닥을 밟은 것으로 치면, 새로 생긴 지 이제 6개월 된 미즈키 오픈 멤버인 택희보다 (사장이 바뀌기 전이지만) 1년 2개월 동안 이곳에서 일한 유림의 경력이 6개월이 더 길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숫자들을 들이밀며 진에게 따질 생각은 없었다.
"잘 알겠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드린다고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유림 씨가 항상 열심히 하니까...... 그러다 보니 이런 실수를 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하던 일을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 한 것이, 그래서 도중에 남에게 하던 일을 떠 맡기지 않은 일이 실수가 될 줄이야. 아니 그걸 다 떠나서 고작 음식 포장을 했을 뿐인데 매니저한테 불려 가 한 소리를 들을만한 실수가 될 줄은 몰랐다. 아마도 요즘 유행어로 치면 '낄끼빠빠'를 하지 못한 것이 문제일까.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했는데 짬밥도 안 되는 신입이 최고참 써버의 빠지라는 명령(?)에 상명하복 하지 못한 엄연한 불상사.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고, 얼마쯤 지나자 '별 걸 가지고 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가, 마지막에는 체념했다.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 건지 모르겠지만 진은 유림에게 '성실하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 거 안다' 따위의 말을 자주 했다. 어렸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유림은 그런 말들이 칭찬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주일이 월화수목금금금인 것처럼 여기며 일에 빠져 살던 시절이 있었다. 유림이 크고 작은 실수를 했을 때 상사의 한숨과 함께 지겹도록 들었고, 후배가 실수를 했을 때 유림의 동료가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 후배에게 지겹도록 했던 말이 있었다.
"너 인마, 일 잘하는 사람, 성실한 사람, 일 못하는 사람, 그리고 불성실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회사가 가장 좋아하는 인재가 누군지 알아? 불성실한데 일 잘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반대로 회사가 제일 기피하고 싶은 직원이 누군지 알아? 불성실하고 일 못하는 사람? 아냐! 성실한데 일 못하는 사람이야, 인마. 열심히 안 해서 못하는 사람은 정신 차리게 하면 잘할 가능성이라도 있지, 열심히 하는데도 못한다? 답이 없다 이 말이야."
유림도, 후배도 결과가 마음이 들지 않아 인상 쓰고 한숨 쉬는 상사에게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라고 말을 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불성실하고 일도 못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로 더 이상 그런 잔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으나 그 당시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은 그 비난의 말은 유림을 오랫동안 괴롭혔다. '유림 씨는 열심히 한다'는 평가의 말줄임표 뒤에는 '열심히는 하지만 일은 못한다'는 말이 생략된 걸까, 신경 쓰였다.
만약 그렇다면 눈치가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실수인 것 같았다. 유림이 지금까지 일해 온 식당에서는 딱히 써버 안에서 하는 일에 따라 계급장을 따져 '낄끼빠빠'했어야 하는 일은 없었다. 처음 일 한 곳에서는 유림 혼자 써버로 일을 했고 나중에 홀매니저가 되고 나서 다른 써버들과 함께 일하게 됐지만 경력 따위로 일을 나누지 않았다. 그 이후에 일했던 식당에서는 같이 일한 써버들이 유림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거나 캐나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워홀러(워킹홀리데이를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경력을 줄이고 숨겨도 유림이 최고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유림의 써버 인생에서 택희를 만난 건 예상도 못한 뜻밖의 복병이었다.
작은 식당에서는 굳이 이름으로 구분하진 않지만 규모가 있는 로컬 식당에서는 써버에도 계층이 있다. 유림이 딱 한 번 취직에 성공했던 로컬 식당이 하나 있었다. 포지션은 써버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만 써버의 하위분류라고 봐야 했지만 진짜 써버(?)들은 자신과 그들의 경계를 이름으로 나누고 싶어 했다. 시급은 똑같이 최저시급으로 시작하지만 가져가는 팁의 비율이 달랐다. 계층구조를 그려보자면 가장 밑에 버써(Busser)가 있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손님 테이블에서 빈 접시를 빼오고, 손님이 나간 후 테이블을 치우는 일을 했다. 그 위에 호스트와 푸드러너가 있다. 호스트는 식당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예약을 확인하며 선호도에 따라 테이블을 배정하는 일을 한다. 푸드러너는 엑스포(Expo: Expeditor)의 지시에 따라 테이블에 음식을 배달하는 일을 주 업무로 하며 양손에 음식을 들고도 달리는 속도와 비슷하게 걸을 수 있는 '러너'여야 한다. 가끔 빈 컵에 물이나 차, 혹은 커피를 채우는 '커피 라운드'를 돌기도 하는데 그때 손님들이 추가 주문이나 음식에 대한 질문을 하려 하면 섣불리 주문을 받거나 음식에 대한 대답을 해서는 안된다. 그럴 땐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담당 써버를 불러주겠다고 말하고, 그 써버에게 호출 사실을 즉시 알려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진짜(?) 써버가 있다. 전형적인 써버의 이미지에 가장 걸맞은 일을 하는 서비스 제공자다. 손님의 주문을 받는 사람. 음식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주문 특이 사항을 주방까지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며 만에 하나 생기는 손님과의 문제에 대응하고 해결할 수 있는 역량도 갖춰야 한다. 그래서 팁의 주 수혜자다. 마지막으로 써버와 비슷한 책임감과 팁의 수혜를 갖는 포지션이 엑스포다. 주방과 홀 사이에 음식 품질 관리 및 조율을 담당한다. 미친 듯이 바쁜 연말의 어느 휴일 저녁 시간에, 만약 음식이 안 나온다는 불만이 생각보다 적게 들어온다면, 그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력투구 혹은 살신성인했을 엑스포에게 공로를 돌려 마땅하다. 이 계층 구조는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으나 유림이 온몸을 바쳐 겪어낸 경험으로 얻은 깨달은 시스템이었다. 식당마다 포지션의 업무와 구분이 다를 수 있고, 팁 배분율도 다를 테지만 하여간 유림은 그곳에서 스스로를 '써버'라고 부를 수 없다는 건 달라지지 않을 사실이었다.
유림은 그 식당에서 버써로 들어갔다. 처음 한 두 달만 고생하면 손님에게 꽉 찬 생맥주잔을 가져다주며 눈인사라도 건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시작했으나 3개월이 지나도록 손님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더러운 식탁만 끊임없이 치우고 또 치웠다. 중간중간 빈 그릇을 빼오는 일조차도 유림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손님이 있을 땐 푸드러너 계급(?) 이상만 테이블에서 무언가를 치우고 테이블로 무언가를 가져다줄 수 있었다. 다른 써버들이 버써가 손님 있는 식탁에 가서 알짱(?) 대는 것에 눈치를 주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라 해도 실제로 알짱(?) 댈 여유가 없었다. 바닥을 쓸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손님이 떠난 빈 테이블을 치우는 닦는 작업만 해도 고개 한번 제대로 들 틈 없이 하루 8시간이 꽉 찼다.
성차별, 외모차별, 인종차별 모두 겪어봤지만 유림은 그곳에서 일한 3개월 동안 겪은 '써버 차별'이 가장 모욕스러웠다. 검은색 앞치마와 걷어붙인 소매만 보고 식당 직원(혹은 최소한 관계자)이라고 생각한 손님이 유림을 불러 세워 'Excuse me. I have a question about this dish.'라고 말했을 때 지나가던 써버가 유림 대신 'She is just a busser. I can definitely help you.'라며 유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끼어들었을 때 느꼈던 모멸감보다 더 한 것은, 그 모든 것을 어쨌든 견디겠다며 대형 로컬 체인점의 써버가 되는 날을 기다릴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타인에 의해 그 의지마저 좌절된 일이었다. 3개월 만에 해고를 당했다. 몸이 너무 느리다는 게 이유였다. 셔츠가 한겨울 김장 배춧잎처럼 땀에 절여질 정도로 최선을 다해 움직여도 돌아오는 피드백은 '더 빨리 더 빨리'였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좀 지겹긴 해도 일식당에서 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모욕감은 느끼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런데 택희의 존재는 유림이 마음속에 삼각형 모양의 써버 계층을 그리고 또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가장 위에는 매니저 진이 있을 것이고, 그다음에 택희가, 그리고 그 밑에 어쩌면 제이미, 가장 바닥에 유림이 있는 게 맞는 모양새일 것이다. 제이미는 유림보다 경력도 나이도 훨씬 적었지만 유림보다 한 달 먼저 이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했으니 그냥 마음 편하게 스스로 가장 밑바닥을 자처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들의 마음속에 그런 그림이 있다면 유림은 그 구조에 반기를 들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다만 분란도 뒷말도 없는 평화로운 돈벌이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사실 수직 관계란 사람이 두 명만 모여도 생기는 것이긴 했다.
- 테이크아웃 포장도 있고 홀 손님도 있다면 홀 관리를 자처한다
-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는데 치울 테이블이 있다면 테이블 치우는 걸 택한다
- 주문을 받아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 음식이 있으면 음식 내는 걸 택한다
- (디럭스 사시미 같은) 화려한 고단가 음식이 준비됐는데 다른 테이블에서 포크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면 포크를 챙겨 그 테이블로 달려간다
전자는 써버들 사이에서 명백하게 후자보다 선호하는 작업이므로 혹시나 모를 뒷말을 피하기 위해 미리 눈치껏 양보하는 것이다. 유림은 오늘 퇴근하고 집에 가면 앞으로 양보할 리스트부터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