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No. 19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은 허구입니다.
모처럼 쉬는 날이다. M이 코세이에 온 이후로 유림은 월화수목금토일 내내 일하는 지옥 같은 노동의 굴레에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한쪽이 고장 난 블라인드는 초겨울 정오의 쨍한 햇빛을 유림의 정수리에 그대로 내려 꽂히게 만들었다. 집주인에게 고쳐달라고 요청했으나 완전히 부서진 게 아니니 그 정도는 알아서 해결하라는 답변을 받았다. 할 수 없었다. 고작 이런 이유로 집주인에게 안 좋은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유림은 포기했다. 혹시라도 눈 밖에 나면 집주인은 갖은 핑계를 대며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할지도 모르니까. 이 정도 넓은 방을 월세 650불에 빌릴 수 있는 곳을 찾기 힘들다는 것을 유림은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매년 정부가 발표하는 월세 인상 제한율에 따라 월세가 인상되긴 했으나 2020년 코로나 때 집세가 하락했던 때부터 한 집에서 꾸준히 살고 있는 유림은 현재 시세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살고 있는 셈이었다.
여름이면 아침 6시부터 해가 들어와 잠을 깨우는 통에 암막 커튼을 달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고장 난 쪽이 각도 조절이 안되기도 했지만 멀쩡한 쪽도 햇빛이 들어오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틈이 있으면 빛은 어디로든 새기 마련이니까. 비용을 알아보니 블라인드를 제거하고 암막 커튼을 다는 것까지 못해도 대충 100에서 120불은 들 것 같았다. 유림은 그 돈이 아까웠다. 암막 커튼을 다는 대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기로 했다. 새벽 5시 50분은 무언가를 하기에는 애매한 시각이었다. 오래전 중고서점에서 사뒀던 영어로 된 책을 꺼냈다. 초반 6페이지에 길게 접힌 중고서점 영수증이 책갈피처럼 꽂혀있었지만 유림은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3년도 더 된 책의 초반 6페이지의 내용은 어차피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전부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에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인 것 같았다. 여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고 아침 해는 늦어졌다. 더 이상 미라클모닝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잉크가 뭉개진 서점 영수증은 책의 3분의 2 지점쯤에 다시 꽂힌 채 다시 다음 여름을 기다리며 동면에 들어갔다. 에고라는 것이 우리의 불안과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다음 여름에는 어떻게 에고를 초월하고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지 알게 될 거라 믿으며 유림은 암막 커튼을 설치하는 것을 미루기로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모처럼 쉬는 날은 햇빛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봐도 한 번 깬 잠은 다시 쉽게 들지 않았다. 다시 잠드는 걸 포기한 유림은 유튜브 쇼츠에 들어가 시간을 때우기로 결심했다. 짧은 간격으로 터지는 도파민에 빠져 무신경하게 엄지를 위로 올리다 보면 귀찮음보다 배고픔이 더 견디기 어려워지는 순간이 올 것이고 배고픔을 동력 삼아 이불속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을 터였다. 햇빛이 유림의 몸을 밟고 지나 반대편 벽 쪽까지 길어졌을 무렵 문자가 왔다. 레트리버가 새끼 고양이를 등에 태우고 다니는 짧은 영상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예상하지 못한 발신인이었다. 비자야였다. 급하게 휘갈겨 쓴 유림의 전화번호를 비자야의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주었던 게 이 주 전이었던가 삼 주 전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러고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그녀로부터 문자가 온 것이다. 내용은 별 게 없었다. 하우 알유,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저번에 전화번호를 받으며 문자 하라고 한 걸 여태 못하고 있었는데 기억나서 하는 거라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답장을 했다. 비자야도 오늘 쉬는 날이라고 했다. 유림이 그때 전화번호를 줬던 이유는 월급이 일 년도 넘게 체불되어 받지 못하고 있다는 그녀의 사정을 더 자세히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문자로 하고 싶진 않았다. 기록이 남는다는 사실이 기분이 찜찜하게 만들었다. 몇 번의 스몰 토크가 문자로 오가고 저번에 무슨 일로 문자를 하라고 했냐고 묻는 비자야에게 괜찮으면 오늘 점심이나 먹자고 했다. 비자야는 오늘 점심은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노 프라블름'이라고 답장을 쓰고 있는데 문자가 하나 더 도착했다.
"Because it's already 4:12, we're past lunch. This must be officially an early dinner. (왜냐하면 벌써 4시 12분이야. 점심시간은 지났다고. 이건 누가 봐도 저녁인데.)"
유림은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심각해 보이기만 하던 그녀가 농담도 할 줄 알다니. 유림은 자신이 유머도 재치도 없는 사람이라 여겼기에 스스럼없이 장난을 칠 수 있는 사람들을 동경했다. 그리고 그 농담이 성공했을 때는 유림은 그 사람을 믿고 싶어지곤 했다.
약속 시각보다 10분 일찍 도착한 유림은 식당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기로 했다. 입구에서 직원이 오기를 기다리며 식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고급진 분위기와 냄새가 났다. 한식, 중식, 일식만 빼고 다 좋으니 가고 싶은 곳을 비자야에게 고르라고 했더니 커리와 탄두리 치킨 냄새가 나는 곳만 아니면 다 좋다고 했다. 두 번째 웃음을 터뜨리며 유림은 The Northwood Room의 주소를 찍어 문자로 보냈다.
"Hi, Welcome to 'The Northwood Room'! How many for tonight?"
완벽한 금발에 커다란 터키그린 색 귀걸이를 한 백인 여자 써버였고 유림과는 구면이었다. 유림이 이력서를 들고 무작정 찾아온 그날도 유림을 맞이해 준 써버였다. 당연히 그 사람은 유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억난다고 해도 알은척할 리 없겠지만. 써버의 뒤를 느릿하게 따라가며 식당 내부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이력서를 들고 면접에 들어갈 때 지나쳤던 곳을 손님으로 지나가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비자야를 기다리는 동안 메뉴를 구경했다. 가죽과 비슷한 질감의 인조가죽으로 된 커버에 반짝이는 초록색으로 식당 이름이 적혀있었다. 안을 펼치자 무광택 크림색 내지가 드러났다. 두꺼운 종이가 4장 정도 들어있었고 애피타이저, 메인, 음료 그리고 디저트로 나눠져 있었는데 메뉴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크림색의 여백이 인상적이라고 유림은 생각했다. 양면으로 인쇄되어 코팅된 한 장의 종이 메뉴판에 익숙한 유림은 책처럼 묵직한 메뉴판이 낯설고 신기해 손가락으로 크림색의 지면을 쓸어보았다. 유림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달하고 회수하는 메뉴판이었다면 빽빽한 글자가 적혀있어야 할 자리였다. 샤리프체로 적힌 우아한 메뉴 리스트보다 휑한 지면 위의 여백에 더 눈길이 갔다.
애피타이저에서 메인 메뉴를 거쳐 음료로 페이지를 넘길 때 유림은 비자야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 발견했다.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된 줄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기름에 번들거리는 비닐 앞치마를 벗었을 뿐인데 비자야는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
"This place is so fancy!"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천정과 유림이 들고 있던 메뉴를 번갈아 쳐다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약간의 두려움이 섞여있었다. 유림은 비자야를 반기며 웃어 보였다. 뭘 시킬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그녀를 대신해 트러플 버섯 시즈닝이 올라갔다는 푸틴과 해물 크림 파스타, 그리고 유림 자신을 위해 생맥주, 비자야를 위해 콜라 한 잔씩을 시켰다. 비자야는 태어나서 한 번도 술을 마셔본 적 없다고 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유림은 비자야가 캐나다에 오게 된 스토리를 길게 들었다. 유림과 그녀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둘 다 외동딸이라는 점과 주위에서 만류하는 캐나다행을 스스로 강행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두 걸음이나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비자야는 인도의 벵갈루루라는 곳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부모님은 딸이 혼자 먼 이국땅에 가는 것을 반대했으나 결국 딸의 고집을 말릴 수 없었고 캐나다 학비 이 외에는 지원해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국 캐나다행을 허락했다고 했다. 유림은 왜 그렇게까지 캐나다에 와야 했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십 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들어 유림조차도 한숨이 나오는 뻔하고 지겨운 질문이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유림이 캐나다에 온 이유와 다르지 않았다. 비자야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주문했던 음료와 음식들이 나왔다.
지금껏 캐나다에서 먹어본 식당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다며 비자야는 유난을 떨었는데 유림은 그 모습이 좋아보였따. 좀 짠하기도 했다. 맛은 훌륭하지만 자기한테는 너무 고급진 곳이라 조금 어색하며 그녀는 길고 서늘한 눈매를 휘며 웃었다.
"By the way, that thing you mentioned back then—is it for real? You didn't get any tips or even a salary for a whole year? (근데 말이야, 저번에 얘기한 거...... 진짜야? 팁은커녕 급여도 일 년 동안 못 받고 있다는 거?)"
유림은 콜라의 마지막 한 모금까지 털어 넣는 비자야를 바라보다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