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No. 17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은 허구입니다.
"아 맞다! 오늘 택희 오는 날이네?!"
"캬, 역시 우리 형님 기억력 하나는 짱! 아, 기억력이 아니라 택희 누님에 대한 애정이 짱인건가?!1"
"둘 다 짱인 거지. 혹시 택희 앞에서는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걔 성격에 징그럽다며 사 온 선물 다시 가져간다."
오늘따라 미즈키에 활기가 넘쳤다. 오픈 담당이라 일찍 출근했더니 스시바에서 에드워드와 딜런이 아침부터 떠들썩하게 떠들고 있었다. 며칠 전 매니저로부터 유림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한국에 급하게 다녀오게 되어 석 달가량 자리를 비운 써버가 오늘 복귀한다는 것을. 그녀는 오픈 멤버이자 미즈키 최고의 베테랑 써버였고 결론적으로 유림이 이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빈자리를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딜런에게 더 많은 것을 캐묻고 싶었지만, 에드워드가 딜런 바로 옆에 있어 참았다. 평소에 말이 많은 에드워드도 유림에게는 쓸데없이 말을 붙이거나 하지 않았다. 행주를 빨고 커피를 내리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뿐 참여하지는 않았다. 둘의 대화를 통해 집안일 때문에 석 달간 한국에 가 있었다는 것과 성격이 유하지 않다는 단서를 얻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격이 활발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는 듯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정보는, 딜런이 '누님'이라고 칭하는 걸로 보아 유림보다는 나이가 많은 것 같았다.
"아 맞다. 유림 누나는 택희 누님 한 번도 못 봤죠?"
"그렇죠. 그분이 한국 가셔서 제가 여기 일 시작하게 된 거니까요. 오늘 처음 뵙겠네요."
"오...... 뭔가 재밌어지겠는데."
"왜요? 저 긴장해야 되는 건가요?"
"아, 아니에요. 장난이에요. 택희 누님 성격 좋아요. 일 못하는 사람한테는 얄짤 없지만."
'야 이 자식아, 그냥 대놓고 긴장하라고 해라'.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묘하게 얄미웠다. 그렇지 않아도 유림은 긴장하고 있었다. 겨우 매니저 진과 같이 일하는 게 조금씩 편해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앞으로 주말 중 하루 이틀은 유림과 택희가 번갈아 오픈과 마감을 하며 같이 할 거라고 했다.
12시 50분. 점심 식사를 하며 유림은 시계를 확인했다. 한 술만 더 뜨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옆에서 식사를 하던 딜런이 소리쳤다.
"엇, 택희 누님이다."
출입구 쪽을 바라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저 멀리서 가게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 사람인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다들 이렇게까지 반기는 걸까. 유림은 질투를 느끼며 동시에 안심이 됐다. 그런 사람이라면 누구와도 잘 지낼 것이다. 심지어 유림과도.
"하안 태액 희이~ 웰 컴 백"
가게 쪽으로 걸어오던 실루엣이 유리문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마자 딜런이 왼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그의 입 속에 있었을 밥풀이 유림 근처 식탁에 떨어졌다. 아담한 체구의 단발머리를 하고 검은색 마스크를 쓴 그녀는 딜런을 향해 크게 팔을 흔드는 것으로 그의 열렬하고 융숭한 환영에 답했다.
"이야, 한 삼 년 만에 보는 것 같다?! 한국물이 좋긴 좋구나. 얼굴이 아주 달덩이가 됐네."
"와, 오랜만에 보자마자 이렇게 팩폭 날리기 있어요?! 에디 셰프 님 잘 지내 셨죠?"
"한택희 어서 와. 한국에서 레이저 하고 보톡스 좀 했어? 열 살은 더 어려졌어."
"아 역시, 우리 스티븐 주방장 님 눈은 못 속이겠네. 어때요, 좀 괜찮아요?"
택희가 손목 스냅일 사용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시늉을 하자 아침부터 우울해 보이던 주방장이 엄지를 들어 보이며 껄껄 웃었다. 마스크를 코 끝까지 올려 쓰고 있는데 달덩이가 됐는지 열 살이 어려진 건지 어떻게 아는 걸까.
"택희 누님, 얼굴 까먹을 뻔~! 에드워드 형님이 아침부터 누님 선물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 그리고 유림 누나 처음 보죠? 우리 가게 새 써버예요."
"야아. 내가 누님 소리 하지 말랬지. 누군 누나고, 누군 누님이냐? 듣는 누님 기분 상하게?! 에디 셰프 님이 형님이면 어?! 인간적으로 나는 누나지. 니 선물 없어 인마."
"아, 오케이오케이. 택희 누! 나!"
한 사람이 들어왔을 뿐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딜런이 유림을 언급했을 때 택희의 눈을 따라가며 인사를 하기 위한 타이밍을 찾았으나 택희는 유림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가방에서 커다란 봉지를 꺼낸 택희는 위의 그릇들을 옆으로 밀며 식탁 한복판에 공간을 만들었다.
"이건 에디 셰프님 구름과자. 이건 딜런이 부탁한 여자친구 립스틱. 그리고 이건 스티븐 주방장 님 홍삼 스틱."
택희가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식탁 위에 올릴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선물 증정식으로 분위기는 더 화기애애해졌다. 각자 자신을 위한 선물을 들고 가서는 이리저리 돌려보며 기뻐했다. 밥을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듯했다. 그리고 유림도 그곳에 있다는 사실도. 사람들이 자신의 선물을 살피며 떠드는 동안 유림은 딱히 할 게 없어서 마지막 한 숟가락을 삼등분으로 나눠 세 번에 걸쳐 먹었다. 이 가게에 온 이후로 유림 몫의 밥을 전부 비운 건 처음이었다. 그 자리를 얼른 뜨고 싶었지만 아직 인사도 하지 못한 게 영 찜찜했다. 택희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한 마디씩 거들었기 때문에 오디오가 빌 틈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하나씩 나눠 가져요."
택희는 선물이 담겼던 가방을 아예 뒤집은 후 본격적으로 털기 시작했다. 한국 유명 연예인 사진이 박힌 마스크팩이 우르르 식탁 위로 쏟아졌다.
"오, 역시 택희 누님, 아니 누나 센스! 한국 갔다 오면 마스크팩은 국룰이지! 유림 누나도 골라 잡아요. 에디 형님이 다 쓸어가기 전에."
"안녕하세요. 저 유림이라고 합니다. 도유림. 말씀 많이 들었어요."
유림의 인사는 필사적이고 절박했다. 딜런이 두 번째 유림을 언급했을 때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타이밍을 잡겠다는 마음이었다. 지금 놓치면 영영 하지 못할 것 같았고, 진짜 그렇게 되면 앞으로 미즈키에서의 생활이 지옥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급한 인사를 듣고 그제야 택희는 유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네, 안녕하세요. 일 잘하는 써버 왔다고 진한테 전해 들었어요. 유림 씨도 마스크팩 몇 개 가져가요."
마치 유림이 인사를 건네기 전에는 유림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듯 놀라는 표정이었다. 유림은 감사하다며 알록달록한 패키지에 포장된 다양한 종류의 마스크팩들 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팩을 하나 집어 들고는 볼 필요도 없는 사용설명과 성분표를 꼼꼼히 확인했다. 언제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면 가장 자연스럽고 적당할지 고민하며. 시계는 1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스케줄 표에 오늘 마감은 태희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퇴근까지 남은 시간은 6시간 35분.
"짤랑"
그때 마침 손님이 들어왔고 유림은 얼른 자기 앞에 놓여있던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수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밥 다 먹었어요. 제가 가볼게요."
유림이 테이블에서 손님 주문을 받고 주문을 넣기 위해 스테이션으로 돌아갈 때 택희가 앞치마를 묶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13번 테이블 주문은 제가 방금 받았어요."
"네. 음료나 뭐 준비할 거 있어요?"
"아뇨. 음료는 따로 안 시켰고 물이랑 차는 이미 나갔어요. 미소나 샐러드도 없고 메인 주문만 해서 음식 나오기 전까지 딱히 할 건 없어요."
"오케이."
"저...... 그런데 제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티파니예요. 티파니라고 부르면 돼요. 유림 씨는 영어 이름 따로 쓰는 거 없죠?"
"아, 네 저는 그냥 유림이라고....."
유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택희는 써버 카운터로 향했다. 오디오 시스템 위에 연결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가게 내부에 흐르고 있던 재즈가 팝으로 바뀌었다.
'택희' 대신 '티파니'로 자신을 소개한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유림은 여전히 난감했다. 사실 어떻게 불러야 좋은지 물은 건 서로 나이를 밝혀서 서열 정리를 하자는 의미였다. 나이 질문을 받는 걸 유림도 좋아하지 않기에 내키지 않았으나 나이대가 비슷한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나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절차였다. 그래야 어떤 호칭을 써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택희는 누가 봐도 동안이긴 했으나 분위기나 정황들로 봐서는 유림보다는 한 두 살 (생각보다 더 동안인 거라면 세네 살까지) 더 많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 정보에 대한 공유나 호칭에 대한 동의 없이 대뜸 '언니'라고 부르는 건 실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이와 상관없이 '언니'나 '오빠'라는 호칭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을 만난 경험이 있던 유림은 조심스러웠다.
유림은 택희가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표현을 그런 식으로 한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할 수 없이 이런 경우 그냥 '~님'으로 부르는 수밖에 없다. 90년 대의 PC통신 동호회 정모도 아니고 님이라니. 유림이 선호하는 호칭은 아니었다. 게다가 하필 '티파니 님'...... '니'와 '님'이 연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발음이 복잡하고 입에 잘 붙지 않았다. 차라리 '택희 님'으로 부르고 싶었지만 그녀의 단호한 말투와 유림을 대하는 태도로 보아 그건 유림에게 허락되지 않는 호칭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가 쎄한 마당에 요구한 대로 부르지 않으면 제대로 찍힐 것 같았다. 유림은 그런 위험을 결코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내심 택희와의 만남을 좀 기대했었다. 사람들이 언급하는 걸 들을 때마다 호기심이 일기도 했고 유림과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같은 써버로서 가깝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러다 혹시라도 고충이나 고민도 나눌 수 있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도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까지 몰래 가졌었다. 매번 실패만 해온 과거의 인간관계 경험들에서 얻어 온 교훈이 제법 많이 쌓였으니 이번에는 실수 없이 잘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과거를 돌아보면 사람과의 관계가 쉬운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유독 여자들에게 더 어려움을 느꼈다. 남자들은 다 비슷비슷했다. 그런데 여자들은 스펙트럼이 너무 넓었다 아니 넓다기보다 극단적이었다. 유림을 이유 없이 좋아하거나 유림을 이유 없이 싫어하거나. 물론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많았다. 한때 그런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아는 사람을 통해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들을 통해 들은 상대의 반응은 제 각각이었다. 어떤 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고, 어떤 이는 누군가는 그냥 싫다고 했고, 그리고 어떤 이는 전혀 싫어하는 게 아닌데 유림 혼자 '오버'하는(유난 떠는)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억울했다. 어릴 때는 어떻게든 오해를 풀고 필요하다면 사죄도 해서 모쪼록 좋은 관계로 만들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다. 굳이 싫다는 사람을 찾아가 대화를 시도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컸다기보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는 그 느낌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따지거나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냥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유독 자신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향한 '비호감'의 감각에 남들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애써 납득했다. 어찌 됐든 원인은 있을 것이었다. 까닭 없이 미움받고 있다는 여기는 것보다 '잘 모르겠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지'하고 결론 내리는 편이 정신 건강에도 덜 해로웠다. 명분 없는 애정이 없듯 명분 없는 혐오도 없다. 당사자가 깨닫지 못한다고, 상대방이 알려주지 않는다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분명히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 실체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합리적이거나 공정할 필요는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럴 수가 없다. 어차피 하나의 관계는 두 개의 일방통행이니까.
이럴 때 최선은 내가 괴롭지 않은 선이라면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다. 물 길을 바꾸려 애쓰지 말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다. 택희 언니가 아니라 티파니 님으로 그녀가 원하는 거리를 지켜주면 된다. 그러면 적어도 더 이상 괴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친구가 되는 일도 없겠지만. 그들이 원하는 거리를 유지하는 일도 입에서 자꾸 꼬이는 발음처럼 곧 익숙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