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널 위해
밤에 공원에 나가면 한쪽 포차에서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한바탕 회포를 푸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다. 요즘은 날씨가 좋아 더 많아졌다.
개중엔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보이고...
과연 저들의 인생에서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이며, 기억하게 될까?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은 답답함을 느끼는 편이다. 그 분위기가 나를 조용히 옭아매는 것 같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날, 지하철을 타고서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안에 들어서면 마치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된 것 같은 이질감이 엄습해 온다.
공원 가장자리를 따라 난 흙길이 있다. 넓고 반듯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 옆, 울퉁불퉁하고 좁은 길이다. 사람들이 모두 잘 닦인 길 위를 걸을 때, 나는 그 흙길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다. 조용하다. 외롭다. 그래도 나는 걷는다. 그 길을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멸망으로 이끄는 길은 넓고 그 문이 커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곳을 찾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마태복음 7:13-14)
성경에 욥이라는 인물이 있다.
우리는 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앞에 선다. 갑작스러운 상실과 설명할 수 없는 아픔, 그리고 계속 안에서 싸우는 믿음. 그럴 때 우리는 묻는다. '하나님, 왜 저입니까?'
욥은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삶을 살았고, 많은 자녀와 재산을 가진 소위말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자녀를 잃고, 재산을 잃고, 건강마저 무너진다. 그의 아내조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말할 때,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여호와께서 주시니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니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기 1:21)
욥은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은 계속된다. 친구들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며 욥을 정죄하고, 욥은 억울함 속에서 하나님께 직접 대답을 듣고자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고 계셨고, 욥은 그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바로 그 고통과 답답함 속에서 욥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배울 수 없구나." (욥기 23:8–9)
욥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절에서 이렇게 믿음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나오리라.” (욥기 23:10)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비록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고, 고난의 이유가 해석되지 않아도, 그는 자신의 삶의 길을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욥은 고난이 끝난 후에 이런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고난 한가운데서 이 말을 내뱉었다.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하나님께 직접 응답도 듣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한 것이다.
욥은 비록 하나님을 느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지켜보고 계시며, 결국 이 고난이 자신을 더 깊고 순전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역시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침묵 앞에 설 때가 있다. 모든 것을 잃고, 방향도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이 멀리 계신 듯 느껴질 때. 그럴수록 이 고백은 더욱 선명해진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있든, 하나님은 나의 길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반드시 순금처럼 빛나게 될 것이다.
긴 침묵 끝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욥에게 찾아오시는 장면이 있다.
하나님은 조용히 다가오지 않으셨다. 대신 폭풍을 타고 오셔서, 창조의 질문들로 욥을 마주하셨다.
고난의 이유를 직접 설명하시기보다는, 더 크고 넓은 시야를 열어 주심으로써 욥을 단련하셨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사람이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내가 네게 물을 테니 내게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아는 게 있으면 말해 보아라.
바닷물이 모태에서 빠져나오듯 쏟아져 나올 때 누가 문을 닫아서 그것을 막았느냐?
그때 내가 구름을 바다의 옷으로 삼아 짙은 어둠으로 그것을 둘렀고 내가 그것의 한계를 정해 그 문과 빗장을 세우고 ‘너는 이만큼까지만 오고 더는 나오지 말라. 네 도도한 물결이 여기서 멈출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네가 아침에게 명령을 내린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알게 해서 그것이 땅 끝을 붙잡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흔들어 떨쳐 낸 적이 있느냐?
네가 바다의 근원에 가 본 적이 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본 적이 있느냐?
죽음의 문이 네게 열린 적이 있느냐? 죽음의 그림자의 문들을 본 적이 있느냐?
땅이 얼마나 드넓은지 깨달은 적이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안다면 말해 보아라.
빛의 근원지로 가는 길이 어디냐? 어둠이 있는 자리는 어디냐?
사람이 살지 않는 땅, 아무도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폐하게 버려진 땅을 비옥하게 해 연한 풀에서 싹이 나게 하느냐?
비에게 아버지가 있느냐? 누가 이슬방울을 낳았느냐?
얼음이 누구의 태에서 나왔느냐? 하늘에서 내리는 서리는 누가 냈느냐?
네가 때에 따라 별자리를 낼 수 있느냐? 곰자리와 그 별들을 인도할 수 있느냐?
네가 하늘의 법칙을 아느냐? 네가 땅을 다스리는 주권을 세울 수 있느냐?
누가 속에 지혜를 두었느냐? 누가 마음속에 지각을 주었느냐?
- 욥기 38장 -
하나님은 욥에게 세상의 시작과 작동 원리를 묻는다. 바다가 태어날 때 그것을 가두고, 구름으로 옷 입히고, 경계를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이 질문들은 욥을 침묵하게 만든다. 그의 억울함이나 고난의 이유는 더 이상 중심이 되지 않는다.
욥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앞에서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질문들을 마주하고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깨닫는다. 동시에 하나님이 얼마나 정교하게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지를 깨닫게 된다.
그제야 욥은 무너진 자존심을 내려놓고, 진짜 회복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닫는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하나님,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다”라고 고백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5)
이 고백은 지식에서 체험으로 옮겨진 믿음의 선언이다. 욥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식으로만 알고 살았지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 앞에 무릎 꿇는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욥을 통해 용서를 구하라고 하시고,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의 삶을 회복시키신다.
욥은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는다. 소유가 두 배로 늘어나고, 자녀도 다시 열 명을 얻는다. 그는 140년을 더 살며 자손 4대를 보고, 만족하게 생을 마감한다.
고난은 욥을 꺾지 못했다. 고난은 그를 정금처럼 단련시키는 도구였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이끌며 단단한 믿음은 결국 진짜 회복의 문을 열게 된다.
우리의 삶에도 설명되지 않는 고난이 찾아온다. 모든 것을 잃은 듯한 날이 있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는 아직도 질문하고, 기다리며 애타게 부르짖지만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 찾아오신다.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듯 조용히 다가오시지 않는다.
때로는 자연의 경이로, 때로는 내면의 깊은 깨달음으로, 우리의 신념을 무너뜨리고 말씀으로 다가오신다.
나는 오늘도 믿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고통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고, 정금같이 단련된 믿음으로 나아오게 할 것임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혼돈조차 한계 지으시는 그분은, 우리가 순금처럼 빚어지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독일에서 혼자 있을 때 하나님께 물은 적이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 원망에 가까웠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철저한 무너짐의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왜’냐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그리고 내 눈으로 악이 무너지는 순간을 똑똑히 보았다. 무서웠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 깊은 감각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붙잡아준 순간들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감각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향해 일하고 계셨다는 조용한 응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감사한 건, 내가 다른 길로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절하게 바닥을 치던 날, 울면서 나는 하나님을 찾았다.
또 감사한 건, 내 안의 사랑과 순수함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내 마음 한 켠, 정중앙에 단단한 초석처럼 깊이 새겨져 있고, 그것들을 위해 보호막이 더 단단하게 쌓인 느낌이다. 나는 지금도 계속 느끼며 살아간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감당할 만한 시련을 주시는 분이다. 그 시련들은 결국 내가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는 재료가 되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겪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어쩌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부모도, 친구도, 어떤 매체들도, 모두 내 인생을 위한 장치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처음엔 너무 '나' 중심적인 생각처럼 보여 조심스러웠지만, 그 위에 한 가지 마음이 더해지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만나시기 위해 이런 장치들을 예비하신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다.
나는 걷다가 종종 하나님께 말을 건넨다. 길 가다가 꽃이 예쁘면 '어머 하나님, 꽃이 너무 예쁘네요, 제 앞에 오늘 꽃을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일몰을 볼 때도 '이 아름다운 순간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연 앞에서는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요.' (물론 속으로..) 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할 수도 있겠다.
모르겠다. 이게 나예요...
분명한 건,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마주하는 모든 상황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믿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상황을 통해 무엇을 더 배우고 해야 할까. 지금도 여전히 그 질문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조차도, 나는 여전히 묻고 있다.
사실 이런 생각들을 아예 하지 않는 게 더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보통은 잘 안 한다. 그런데 나는, 그게 안된다는 걸 어느 순간부터 알게 되었다.
머릿속에 계속 질문이 맴돌고,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붙잡으려 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도 어느 지점에서 맥이 탁 끊겨버릴 때가 있다. 나만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순간 고립감이 찾아오곤 한다. (아마 남자를 만나도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하지 싶다. 친구는 어렵다고 한다. 나도 알아...)
그러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고민의 과정을 기록하는 것 아닐까. 후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 글이 작은 불빛이 되어줄지도 모르니까.
점점 더 느끼는 것은
누군가,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
누군가, 누군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왜 자꾸 이런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써야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