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레온 - 산마르틴 25km
레온을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다.
7:50분 즈음 알베르게를 나왔다.
가는 길에 츄로스 집이 있어서
오늘 간식 겸 지나가는 길에 어제 산 츄로스도 샀다.
성벽 따라 쭉 걸어서 레온을 나가는 길
아침의 레온 시내는 고요했다.
독특한 구조의 아파트도 보인다. 어렸을 때 많이 만들었던 끈으로 만드는 스코비(Scoubidou)가 떠올랐다. 이 건축가는 무엇을 보고 어디서 영감 받았을지 궁금해졌다
과일가게 사장님,
영업준비가 한창이시다.
브랜드런칭 과제를 하며 공간디자인을 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매장의 저 작은 조명 하나까지도 소비자의 구매로 이어지니 잘 선택해야 한다.
과일가게 조명은 따뜻한 노란빛이나 주광색의 전구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과일을 먹음직스럽게 보이게 한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오늘은 이런 쪽의 생각이 돌아간다.
건축가가 무슨 의도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꼭대기에 달걀 공예 하나가 올라가 있는 것 같다. 이슬람 사원이 연상되기도 하고.
가로등 디자인이 아르누보 양식 같았다.
아르누보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약 1890년~1910년) 사이에 유럽에서 유행했던 예술·건축·디자인 운동이다. 프랑스어로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을 가진 이 스타일은 기존의 전통적인 양식을 탈피해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유려한 곡선과 유기적인 형태를 강조한다.
곡선
아르누보는 딱딱하고 직선적인 구조를 지양하고, 식물의 덩굴, 여성의 머리카락, 파도처럼 부드러운 곡선미를 표현한다.
자연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
나뭇잎, 꽃, 나비, 공작 등 자연 요소를 장식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유리·철·타일 등 신소재 활용
당시 산업혁명 덕분에 새로운 재료들이 등장하면서, 유리와 철을 활용한 화려한 장식 건축이 유행했다.
이 양식은 내가 유럽 건축을 사랑하는 이유다. 곡선미가 살아 숨 쉬고,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마치 자연의 일부인 듯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그 건축 속에서, 나는 우아함과 깊은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른 아침이라 상점 문은 꼭꼭 닫혔다. 사람도 거의 없어 내 가 이 길의 주인이라도 된 양 시원하게 걸었다.
앞으로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구조적인 건물이 재미있다. 이곳 레온에서 '박스형 건축'에서 벗어나 개성 뚜렷한 건물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덕분에 눈이 즐겁다.
큰 공원을 지나고 있다.
다리 위로 가야 한다.
처음에 이 계단을 못 찾아 난감했다.
방향 감각이 제로네 제로...(구글맵이 있어 다행이야)
이 디스플레이를 보고 나의 구매욕구는 올라오지 않았다. 이 VMD를 보고는 전혀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한국에서 저런 방식으로 디스플레이한다면 과연 팔릴까?
이 생각 저 생각하니 어느새 레온에서 빠져나가는 중이다.
대도시를 빠져나가면 평야나 밭들이 존재했는데 여기는 마을이 곧바로 이어진다.
레온이 끝나면서 다른 마을이 시작되는 지점
나는 깜짝 잘 놀라는 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조류공포증 때문인 것 같다. 길거리 지나가다가 멀리서 날아가는 비닐봉지만 봐도 비둘기로 보여서 막 제자리에서 화들짝 놀란적이 많다. 또 뭔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나에게 살금살금 와서 건드려도 ‘악-’ 소리 지르며 놀란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한테 깜짝 놀래키는 장난을 많이 친다. 내 반응이 재밌단다..... 겁은 별로 없는데 또 무서운 건 싫어한다.(귀신영화는 정말 못 본다. 갑자기 나오는 귀신을 보면 아마 옆사람 고막이 떨어질걸요...)
아무튼 멀리서 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친절한 화살표
이 마을은 레온 시내 바로 인접한 위성 마을로, 실제로 주택가가 밀집된 지역이다. 마을 초반엔 거의 도시 외곽 주거지를 걷는 느낌이 강하다.
가는 길 바로 옆에 성당이 있어 한 번 들어갔다 나오고
와인저장고라고 99.999% 확신했다.
주택가가 끝나가고 언덕 위로 올라간다.
빨간 차 하루라도 안 보이면 섭섭한 스페인
여기는 공장들이 속속히 보인다.
순례자를 위한 쉼터도 보이고
걷다 보니 마을이 또 나타났다.
해가 정말 뜨거운 날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마트에 일단 들어갔다.
점원에게 화장실을 물어봤더니 영어를 못하신다. 구글 번역기로 '화장실에 가고 싶습니다'를 쳐서 보여드렸다. 그랬더니 웃으면서 다른 직원을 불러서 나에게 화장실을 알려주라고 하셨다. 그 직원은 나를 친절하게 화장실 문 앞까지 데려다주셨다.
나의 'Gracias'에 눈웃음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너무 감사했다.
마을이 깔끔하고 적당히 크다.
다른 마을들보다 인도가 넓어서 걷기 좋았다
군인들이 내쪽으로 걸어오는데 제복 입은 모습이 너무 멋있다.
마을을 잘 표현한 레고도 귀여워 찍어보았다.
마을의 끝자락
고속도로를 따라 걷는 순례길 앞에 '수잔나'라는 친구를 만나서 같이 걸어간다. 이전에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우리는 카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수잔나는 15년 전 이 순례길을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지금은 체코에서 푸드케이터링 사업을 하고 있다. 나는 질문했다. '이 순례길을 걷는 게 너의 인생에 도움이 되었냐고?' 본인은 그렇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인생의 모든 결정이 내려진 게 아니지만 이 길에서 생각한 것들이 정말로 실현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걷고 있는 이 길에 정말 감사하고 있었다.
멋있다.
닮고 싶다.
내가 15년 후 걷는 순례길은 무슨 느낌일까?
삶의 비전과 목표, 가치등 많은 이야기를 하며 같은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구름이 CG 같다. 마치 손에 잡힐 듯 말 듯
다락을 좋아하는 건축가가 지었나..
오늘 걷는 마을들은 마치 레고로 만든 것처럼 아기자기하고 정돈된 모습이었다. 건물들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낡지도 않고 깔끔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볕에 얼굴을 찡그렸다가 다시 펴곤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자각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걷다 보니 옥수수밭이 펼쳐진다.
옆에서 수잔나도 사진을 찍었다.
마을에 도착!
이곳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숙소 같다.
여기를 지나쳐
오늘 묵을 알베르게 도착
먼저 온 순례자들
아담한 시골집 분위기
체크인하고
손빨래하고 씻고 쉬는 중이다.
이 아이는 독일에서 온 순례하는 개
'넌 팔자도 좋다, 좋은 주인 만나 순례길까지 왔네'
마트에 가는 길
레몬요거트와
(또)오렌지 주스를 샀다. 아마 스페인 오렌지 주스 브랜드는 다 먹어보지 싶다..ㅎㅎ
한 순례자와 가게 앞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삶에 깊은 상처를 가진 분이었다.
그의 부모는 한국의 한 대학교를 세운 이사장이었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부모로부터 진정한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어릴 적부터 정신적인 학대와 폭력을 겪으며 자랐다고 했다.
특히 아버지의 폭력은 반복적이고 강했으며, 어머니는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고 한다. 심지어 집안일을 도와주던 객식구에게도 폭력을 당했지만, 어머니는 일이 커질까 봐, 알고도 방치했다고 했다.
그 어린아이가 간절히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분은 지금도 그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이미 40대가 된 지금까지도, 그 상처는 그의 삶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느껴졌다. 20대에 그는 결국 가족을 떠나, 혼자 타지에서 삶을 개척했다. 똑똑하신 분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고 가족이 없었으며 사람에 대한 외로움과 사랑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이 여자를 거부하게 한 것 같았다.
가족과는 연락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재산 문제로 형제들과 다툰 적도 있었고, 부모는 타지에 있는 그의 이름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 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는 가족에 대한 환멸을 더욱 깊게 느꼈다고 했다.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순간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조차 전혀 슬프지 않았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는 정말 아무 감정 없이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이야기하며 그리움이라고는 느껴볼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형제들과 연을 끊고 살고 있으며, 형 부부 역시 부모와 닮아가는 모습에 치가 떨린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저런 부모가 있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이해를 못 할 것 같다. 돈과 권력에 취해 어떻게 자기 자식의 삶을 구렁텅이로 내 몰을 수 있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살아온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였다. 마음이 정말 아팠다. 그냥 묵묵히 들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나중엔 눈물이 나왔다.
이렇게 말하실 숨구멍이 필요하신 것 같았다.
내게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분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사랑 많은 가정에서 태어난 건 축복이에요.”
정말 그렇다.
정말로...
나에겐 너무도 당연했던 것들이, 누군가에겐 전혀 당연하지 않은 삶이었다. 나는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고, 그 꿈은 내게 자연스러운 소망이다. 그게 옳다는 걸 안다. 하지만 가족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음이 먹먹해진다. 보호받고 평화로워야 할 보금자리인 ‘집’이, 오히려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으로 느껴질 때, 세상 어디에도 쉴 곳이 없을 것 같은 막막함을 느끼셨을 것 같다.
감히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의 무게를 상상해 본다.
홀로 너무 큰 싸움을 해 오신 것 같다.
위로가 되어드리고 싶었다.
슬프다.
그 사랑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글을 쓰며 다시 상기할 때조차도 마음이 아프다.
세상 속에 아픈 삶들이 얼마나 많을까?
도움을 주고 싶다.
내가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쓸 때에 나는 감기기운으로 몸이 아픈 상태다. 아빠는 아픈데 뭐 먹었냐고 물으며 나를 위해 쌍화탕과 약, 죽, 호떡, 딸기를 사다 주셨다.
이게 가장 위대한 사랑일지 모른다. 이 사랑이 움직이게 한다
샐러드 재료가 남아서 오늘 저녁은 샐러드를 먹는다.
마트에서 산 병아리콩 후무스가 꽤 매력 있다.
석양 바라보며 나 홀로 먹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