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산 마르틴 - 아스토르가 24.6km
아침에 일어났더니 목이 칼칼하고 아프다. 감기에 걸린 것 같다. 요거트와 바나나를 먹고 약을 챙겨 먹었다. 아프면 안 되는데..
7:30분에 알베르게에서 나왔다. 어제 숙소에서 만난 미국인 부부랑 같이 걷기로 했는데 깜깜무소식이다. 약속시간이 7시였는데 30분 기다리다 그냥 나왔다. 뭐 사정이 있겠거니 하며
엄마와 아들 둘이 같이 순례길을 걷는다. 이끄는 엄마도 따르는 아이들도 대단해 보인다. 아이들은 커서 이 순간을 기억하겠지?
차도 옆 길로 걷는 길
진짜 불타는 것 같죠..?
정말 진-했다. 반사된 하늘을 보여주는 물웅덩이는 하늘을 먹은 것 같았다.
어느새 해는 떠서 환해지고
마을을 통과한다. 몇몇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아침을 먹고 있다.
다리 건너기 전 보는 건너편의 세상은 장난감 병정마을 같았다.
이곳은 Puente de Órbigo라는 오래된 중세 다리이다. 20개가 넘는 아치로 이루어져 있고 중세 기사들이 마상 시합을 하던 전설이 있어 매우 역사적인 장소이다.
다리 위엔 아무도 없다. 더 만끽했던 순간이다.
다리를 건너다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총구인가..?
다리 밑 양옆으로는 시원한 잔디밭이 있다.
유유히 지나가는 빨간색 자동차에 '역시 오늘도 볼 수 있군'
다리를 건너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어느 마을들보다 마을전체가 하나가 된 분위기에 영화 세트장 같이 느껴졌다.
마을이 참 아름다워서, 이곳에서도 하루쯤 머물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의 끝자락에서는 살짝 다른 분위기를 풍기긴 했다.
친절하게 이쪽으로 가세요
평야가 펼쳐진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옥수수밭이 생각나는 순간이다.(옥수수는 아니었지만)
태양 빛에 눈이 너무 부셨다. 그래도 비 오는 것보다 낫다.
언제 도착하나 생각할 때 즈음 마을이 보인다. 저기서 쉬어갈 예정이다.
아오 깜짝이야, 허수아비인가..
너 때문에 간 떨어질 뻔했다 얘..
밤에 보지는 말자.. 진짜 놀라 자빠질 것 같다.
마을 갈래길에서 한 아주머니께 카페위치를 물어보았다. 안 물어봤으면 이리저리 돌아다닐 뻔했다. 역시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르다.
새벽엔 추웠는데 계속 걷다 보니 후덥지근-
토르티야와 카페콘레체를 시켰다.
여기 커피도 진해서 맛있었다.
이제 이 식사가 루틴이 된 것 같다.
여긴 카페 뒤뜰.
저 집엔 이민자들이 사는지 국기가 걸려있었다.
얘를 보고 빵 터졌다. 디테일이 세심하다. 다리를 너무 꼬긴 했지만..
자세히보니 가슴 정중앙에 태극기가 있다. 한국사람이 만들었을까??
다시 출발
강한 햇빛은 모자를 꺼내게 만들었다.
마음 뻥 뚫리는 길
앞서 걷고 있던 순례자 한 분이, 내가 이전 마을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는 걸 보고 알려주셨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에요”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텐데, 같은 길을 걷는 사람끼리의 따뜻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이분은 미국에서 오셨고, 레온에서 순례를 시작하셨다. 레온에서 출발하는 순례자들도 꽤 많은 편이다.
한국인이 거의 없는 주에 사신다고 하셨는데, 오래된 한국인 친구 한 분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분은 한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 친구 한 분이 작은 외교관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고 느껴졌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 친구들이 나를 보고 한국에 대해 판단을 할 때가 많았다. 외국에 나가면 한 명 한 명이 외교관 역할을 한다. 아무튼 한국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했다.
우리는 아스트로가 도착할 때까지 같이 걸었다.
내 눈길을 끈 나무. 찾아보니 소나무의 한 종류인 것 같다. 가지치기가 너무 잘 되어있다.
여긴 도네이션 쉼터
여기 있는 음식들은 기부금으로 이루어지는 순례자들을 위한 음식이다. 먹고 싶은 만큼 먹고 기부금을 내면 된다.
이곳을 운영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여기서 매일 음식을 챙기고 봉사하며 사는지 궁금했다.
간단하게 간식을 먹었다.
맛있게 먹고 돈을 내고 간다.
지쳐갈 때 즈음 단비같이 나타난 이곳에서 감사함을 또 느끼고 가요!
친절한 비석
누가 인생도 이렇게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동시에 그러면 인생이 아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까 그 나무인데 좀 더 어른이 된 나무
어쩜 이렇게 생겼지?
나무의 시원함과 멋있음이 사진에 다 안 담긴다.
언제 도착하나.. 싶은데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아스트로가에 도착
작은 도시이다.
중심부로 들어가는 길
도착하니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오후가 되었다.
순례자들도 마을사람들도 적절히 보인다.
오늘의 알베르게
공립알베르게인데 묵었던 숙소 중 제일 쌌다.
7유로
들어가는데 입구에서 한 아저씨의 연주 소리가 들린다.
나도 덩달아 신났다.
오늘 나의 보금자리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기지개를 쭉- 켰다.
손빨래를 하고 말리러 나왔다. 오늘 빨래가 아주 잘 마를 것 같다.
테라스에 앉아서 쉬고 있는 순례자들
나는 배고파서 간식을 먹었다.
풍경에 멍 때리게 되는 간식시간
이 아주머니는 독일에서 오셨는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나에게 요플레 같은 걸 주시며 맛있다고 추천해 주셨다.
문득 첫 만남에 통성명하고 음식 나누어주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우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런 적이 언제였지..? ’
마을에 나가보려고 하는데 입구에서 강아지가 나에게로 온다. 와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데 그 순한 눈이 얼마나 예쁘던지
아고, 귀여워라...
알베르게 앞 순례자 동상이 보인다. 왼쪽 계단 위에서 아까 아저씨가 노래 부르고 계셨는데 사라지셨다. 아쉽다.
알베르게 옆에 정원이 있어 들어왔다.
푸릇푸릇-
걷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정원이다.
저 빨래 널린 곳이 알베르게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바라볼 때면 큰 일을 작게 작은 일을 크게 생각하는 통찰력을 준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생각한다.
아스트로가는 초콜릿으로 유명하다.
17~18세기부터 스페인 내 초콜릿 가공 산업이 활발해졌는데, 아스트로가는 그 중심지 중 하나였다. 중남미에서 들어온 카카오가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가공되면서, 고급 수제 초콜릿 전통이 생겨났다.
초콜릿 상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어왔다.
초콜릿을 좋아한다.
초콜릿 말고도 다른 간식도 팔고 있다.
뭐 먹을지 신중하게 고르는 중
오늘의 간식
다크, 밀크, 화이트 초콜릿 한 개씩 골랐다.
견과류가 콕콕 박혀있는 초콜릿 한입에 행복해졌다.
가게 옆 초콜릿 박물관이 있어서 방문했다.
초콜릿 박물관을 관람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역사와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단지 과거를 반복하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시간을 지나면서도 변하지 않는 정신과 가치가 있다.
그 정신을 후대에게 물려주고, 가치를 보존하며, 또 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떳떳함,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자부심과 성실함. 그런 것들이 모이고 쌓여 지금의 세상이 되었고, 앞으로의 우리가 되어갈 것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정신은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세상을 조금 더 살 만한 곳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정신을 마음으로 느끼며,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지키려는 마음을 품는다.
겉으로 보이지 않아도,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뿌리 깊은 정신이 존재한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어도, 그 나무를 지탱하는 건 언제나 땅 아래 깊숙이 내려간 뿌리이듯.
우리도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초콜릿 역사에 조금 무거운 생각을 한 시간이다.
천천히 구경하며 가는 중
마을엔 구석구석 순례자들을 반기는 흔적들이 있다.
광장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들
잡동사니를 파는 곳
가우디의 주교궁을 보러 가고 있다.
“주교궁”은 말 그대로 주교가 거주하거나 업무를 보던 궁전 같은 건물을 말한다. 주교(Bishop)는 가톨릭 교회에서 한 지역을 맡아 다스리는 높은 성직자
종교적 + 행정적인 기능을 가진 건물
가우디가 설계한 독특한 건축물이며 네오고딕 양식과 가우디 특유의 모더니즘이 어우러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1. 가우디 건축 특유의 곡선과 독창적인 형태
전통적인 고딕 양식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가우디 특유의 유기적인 곡선과 창의적인 구조가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창문이나 아치 부분이 직선보다는 곡선이 많고, 전체 실루엣도 동화 속 성처럼 보인다.
2. 회색 화강암 재질
외관은 차분한 회색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웅장하고 묵직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주변 지역과 조화를 이루려는 의도였다.
3. 고딕 양식의 창과 아치
뾰족한 첨탑, 창문 위의 뾰족한 아치, 스테인드글라스 등은 전형적인 고딕 건축 요소이지만, 가우디의 손길이 닿아 더 독특하게 표현된다.
4. 미완성의 역사
1889년에 착공되었지만 가우디가 공사 중 여러 갈등으로 중도에 포기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면서 완성은 다른 건축가에 의해 이루어졌다.
5. 현재는 박물관(카미노 박물관)
현재는 ’카미노 박물관(Museo de los Caminos)’으로 사용되며, 산티아고 순례길 관련 유물과 지역 역사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주교궁 성벽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정원이 보인다.
나무를 누가 다듬었는지 막대사탕 같다.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비주얼이다.
나무 밑에 누워 여유롭게 일광욕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제 들어간다.
외관이 마치 성 같은 느낌을 준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좌우 대칭 구조
내부도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천장을 보고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교한 설계로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좌우 대칭, 심지어 상하 균형까지 고려해서 설계된 느낌이 강하다.
가우디는 조화롭고 안정감 있는 구조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대칭성과 기하학적 균형을 강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구석구석 관찰하며 정교하고 아름다운 가우디의 세계를 맛보고 왔다.
주교궁 옆 아스트로가 대성당도 잠시 들렀다. 오늘 주일이라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저녁 시간
친구를 만나 저녁을 같이 먹고
젤라토를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중
되돌아가는 길. 조명이 은은하게 켜진 종탑에 잠시 위로 향하는 시선이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가 지나감에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