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아스트로가 - 폰세바돈 25.3km
깜깜한 새벽을 나선다.
새벽엔 주로 무리 지어 다니는 이들보다 혼자 걷는 이들이 많이 보인다.
일찍 문을 연 카페에 벌써 자리 잡은 손님들
쌀쌀한 새벽공기에 정신이 번쩍 뜨인다.
어제도 같은 길을 지나갔지만 사람들이 많아 정신이 없어 발견하지 못했는데 새벽에 혼자 걸으니 안 보이던 표지판이 보였다.
어제 보았던 종탑도 보인다. 새벽에도 광장 불빛은 꺼지지 않았나 보다.
청소부 아저씨가 제일 먼저 일을 하고 계신다. 참 감사한 분들이다.
친구가 같이 아침 먹고 가자고 하여 들른 친구의 알베르게
제일 거하게 먹은 아침식사 같은데..?
꽃으로 둘러싸인 이 공간은 꽃집인 것 같다. 문 열린 모습을 못 보고 지나가 아쉽다.
새벽의 아스트로가 대성당과 주교궁
어제 위쪽은 보지 못했는데 대성당 아주 화려했구만..
눈에 다시 꼭꼭 담았다.
해는 제시간에 나올 준비 중인가 보다
골목길로 빠져나간다.
Iglesia de San Pedro de Rectivía
친구가 이 성당 꼭 가봐야 한다고 하며 날 데리고 갔다. 비교적 현대적인 건축양식을 갖춘 성당이다.
내부는 아담하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묵상과 기도를 하기에 적합하다.
들어가자마자 나도 모르게 경건해진다.
본격적으로 길을 나선다.
길 따라 쭉 뻗은 나무들. 여기만 보면 한국이라 해도 믿을 것 같다.
나무에 걸친 빛에 '햇빛이 골고루 비춰야 잎들도 골고루 잘 자랄 텐데..' 약간은 쓸데없는 생각도 하며 지나가는 길이다.
아스트로가도 이제 끝
먹구름이 가실락 말락 한다.
아주머니 뭐 하시나 봤더니 담벼락 보수공사를 하고 계셨다. 정성껏 집을 돌보고 계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 이렇게 예쁜 집을 볼 수 있지.
신기한 나무도 보인다.
스페인 마을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이 빨간 꽃,
이 정도면 집집마다 놓아야 하는 법이 있는 것 아닐까?
예쁜 스페인 풍경에 한 몫한다 네가.
따사로운 햇살을 등지며 걷는다.
쉬어가기
이온 음료 한 잔에 갈증이 싹 해소되었다.
순례길 중 정말 싫은 구간이었다.
내 몸과 머리 위로 파리들이 약 50여 마리는 붙은 것 같다. 나는 처음에 내 몸에 이상이 있는 줄 알았다. 옆 사람 보니 옆 사람들에게도 붙어있어서 내가 이상한 게 아니란 걸 알긴 했지만.. 내 귀를 파고드는 위잉 위잉 소리는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곳엔 파리가 많은 이유가 있다.
- 지대상승 : 아스트로가에서 폰세바돈까지는 약 500m 이상 고도가 상승하는 산악지형
- 목축 지역 : 이 지역은 소, 양 등 가축이 많이 있는 목장 지대가 펼쳐져 있음. 파리들이 이런 가축 분변과 습한 환경을 좋아하기 때문에 수가 많음
- 기후 영향: 따뜻하고 습한 날씨는 곤충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만듦. 특히 5월~9월 사이에는 극성
파리 때문에 처음으로 순례길에서 뛰었다.. 대단한 파리다.
정신이 없어 휙휙 지나간 이 마을
빼꼼 드러난 노란색 꽃은 예쁘네
다시 파리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이제 체념해야 하나 싶다.
소들이 한가롭게 누워있다. 얘네한테도 파리들이 장난 아니게 달라붙어있을 텐데.. 괜한 소 걱정
그렇게 파리와의 전쟁을 한 바탕 끝내고 이 마을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카페에 왔는데 응대가 친절하지 않다. 인상을 팍 쓰고 컵들을 턱턱 내려놓는데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그래도 카페에서 잘 쉬었다.
오늘은 돌로 지은 집들로 이루어진 마을이 많이 보인다.
이 주변에 돌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과거에는 먼 거리에서 자재를 운반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재를 이용해 집을 지었다. 또 이 지역은 고도가 높고 겨울이 매우 추운 지역인데 돌 건물은 단열 효과가 뛰어나고, 바람과 눈, 비에도 잘 견디는 구조여서 적합하다.
투박한하지만 단단한 느낌이 물씬
많은 순례자들이 이 전 마을을 도착지로 삼아서 다음 마을까지는 순례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이곳은 산악지대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전환점이기도 하다.
굽이굽이 좁은 길 따라가다 보면
하늘이 가까워지며
마을이 보인다.
이 마을은 고도가 1430m에 위치한 마을로 순례길에서 가장 높은 구간 중 하나이다.
구름이 바로 위에 있어요 정말..!
한때 마을이 거의 폐허가 되었지만, 순례길로 인해 최근 다시 활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오늘 묵을 알베르게
알베르게 문 앞을 어슬렁거리는 강아지
너는 좀 씻겨주고 싶다..
이곳에 마트는 없고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카페나 식당을 이용해야 한다.
짐을 풀고 씻고 산책하러 나간다.
뒤뜰에서 순례자들이 쉬고 있다. 책을 읽기도, 노래를 듣기도 하며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휴식을 취한다.
코스모스가 활짝 폈다.
이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집주인집이다. 텃밭에서 직접 재료를 가꾸고 그걸로 순례자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한다.
손빨래하고 잠시 앉아서 쉬는 중
순례길에서 해가 뜨고 볕이 좋으면 제일 먼저 빨래 생각이 난다. '오늘은 바짝 잘 마르겠다'..
내 생에 하루를 이곳에서 보낸 다는 게 뭔가 믿기지 않으면서 내가 정말 여기 있나 느꼈다.
창문이 최고의 액자다. 구름이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꽃이 피는 대로 이 액자는 24시간 움직인다.
알베르게에서 티셔츠도 판매하고 있었다.
저녁식사는 모두 다 함께하는 '커뮤니티 디너'
렌틸콩 수프와 빵
그리고 스페인 소시지 '초리조'
이거 이거 너무 따뜻하고 맛있었다. 앞에 앉은 스페인 순례객은 자랑스러운 듯이 이 국민 수프를 소개해줬다.
자랑스러울만하다.
그다음은 닭가슴살 카레
고기가 조금 들어있어서 고기러버인 나는 아쉽긴 했지만 매콤해서 맛있게 먹은 카레다.
알베르게 주인장이다. 독일 출신으로 프랑스 남편과 함께 스페인에서 알베르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이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매일매일 순례자 한 명 한 명에게 친절을 베풀며 이 순례길에서의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계신다.
단순히 길이 좋고 자연이 좋음도 있지만 순례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느끼는 행복이 있다. 같은 곳에서 그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들의 큰 기쁨이 되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하며 같이 공유한 시간들이 그 사랑의 너비와 깊이를 더욱 크고 깊게 만들어 준다.
알베르게 주인은 우리에게 순례자 노래를 알려주었다.
I am a pilgrim, I am a wanderer
Day after day and step by step, walking on
Rain, sunshine, even snow
I'll be on my way
나는 순례자이며 나그네입니다
날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비를 맞고, 햇살을 받으며, 때로는 눈 속을 지나
나는 계속 길을 걸어갑니다
우리의 삶을 아주 쉽고 간단한 게 비유한 노래이다.
나그네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길에 있는 사람.
또는 타지(他地)를 돌아다니며 잠시 머무는 사람.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내 영혼이 사는 길을 찾고 있다.
군중에 휩쓸려 살아가기보다(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내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란 걸 깨닫고 있다.
21세기 바쁜 현대사회에서 무슨 영혼타령이야 이해를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느꼈다. 내 영혼이 갇혀있을 때 나는 살아도 죽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영혼이 원하는 길을 갈 때에만 진정으로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산이라 저녁이 되니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져 빨래를 걷으러 나왔다. 다행히 빨래는 다 말랐다.
스페인 첩첩산중 시골 산골 마을에서 따뜻한 불빛 아래,
어디서 또다시 만날지 모르는 사람들과 온정을 나누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따뜻한 기운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