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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 한소 Jan 26. 2024

역설적 소통의 글쓰기

찾았다!

찾았다. 소통의 글쓰기.


글을 쓰며 했던 소통. 책을 읽고 토론하며 나눔 속에서의 소통. 오늘 다시 아이들에게 다른 소통을 강조했다. 소통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가정과 사회에서 모순이나 갈등을 겪어왔다. 일관성과 열정, 도전까지... 삶을 살아가며 항상 긍정적 느낌의 단어들을 쓰려고 애써왔다. 노트에 그것들을 모두 모아 장황하게 나열해 본다. 갇힌 내 시선과 사고가 답답할 뿐이다. 나를 포장하고 일상에서 그러한 단어 쓰기를 강조해 왔다. 아이러니한 건 난 늘 모순 속에서 갈등하며 힘들어했다. 적당히 포장된 현실과 좀 더 꾸며진 가상에서. 내가 속한 딜레마의 늪에서 언제쯤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과연 나는 가족과의 소통, 그중에서 가장 필요한 배우자와의 소통이 얼마만큼 되고 있을까? 40%, 20%, 10%, 5%, 0% 도대체 소통이 되긴 하는 건지.

서로의 문제점이다. 시선의 문제점, 마음의 문제일지도. 반복적인 상황대처나 20년을 넘게 함께 살아오며 낡아빠진 물건에서 생기는 정전기와도 같은 그 상황이 손을 대기도 전에 두렵다. 그쯤 되니 내가 먼저 피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우리는 대화를 하다가 같은 단어를 자신이 쓰면 통이요, 상대가 쓰면 불통인 것처럼 민감하게 단어 하나에도 꽂혔고 반응했다. 상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반복되는 현실에서의 반응들로 무기력하고 부정적인 선택이 머릿속에 강하게 자리 잡는다. 반응 후 아주 짧은 찰나, 후회하지만 남편이 내게 준 여러 부정적 경험들로 인해 상실감과 우울감이 매번 더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감정이 깊어질 뿐이다.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순간부터 관계 맺음이 시작된. 관계에서, 첫 번째 긍정적 요소가 바로 소통의 시작이라고 본다. 소통의 시작에서부터 문제가 있다면 관계는 늘 흔들릴 수 있으며 부서지기 쉽다. 각자의 노력이 필요한 순간이다. 지금은 노력하려는 의욕조차 사라지고 적극적 태도를 보이지 않은 나 자신을 설득하고픈 마음도 없다.

이번 갈등의 키워드는 '여행'을 제안하며 시작되었다. 남편은 모든 선택을 나에게 맡기는 것처럼 태도나 말을 하면서 존중이나 배려는 전혀 없었다. 가장 기본이 존중과 배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배려가 없는 그의 태도에 많이 힘들었다. 해결되지 않는 상황과 마음 정리를 알코올의 힘을 빌리려는 남편의 태도에 점점 화가 났고 답답해졌다. 술에 취해 귀가하는 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은 상황들을 함께 가지다. 그런 상황은 언제나 나를 감정적인 늪에 빠지게 다. '알코올의 힘으로 좀 더 감정을 실어 말을 뱉고  더 즉흥적인 태도를 취하.' 이해하려는 마음이 앞서 있다. 바로 뒤를 따르는 언제 터질지 몰라서 조마조마한 불안한 감정을 들킬까 봐 두려워진다. 바로 어내고 감정에 충실하며 발설하는 그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병나지 않고 상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자신을 위로하고 다독인다.

일상에서의 이런 감정 에너지 소모나 효율성이 떨어지는 삶의 진행 과정들을 살펴보며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나'라는 존재의 유무에 대해서 다시 짚어본다. '나'는 과연 결혼이라는 프레임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진정한 '나'는 지금 어디를 바라보며 무슨 향기를 그리워하고 있는가. 모차르트 교향곡은 잘 듣고 있는지, 지금도 가끔 답답할 때 아주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내는지, 손으로 느껴지는 촉감들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암막에서의 두려움을 온전히 느끼는지, 책을 읽고 대사를 소리 내어 읊거나 낭송하고 있는지. 결혼생활 안에 그런 내가 존재하는 걸까 먼저 돌아봐야 했다. 프레임에서 더  초초해졌다. 찾을 수 없다. 자의에 의해서 사라지더니 곧 숨어버렸다. 아니다. 타의에 의해 사라졌다. 결혼 이후 나는 한 번도 자신을 제대로 살피고 위로해 준 적이 없었다.

어느 , 일기나 일상을 그냥 끄적끄적 글로 옮기는 것도 좋지만 제대로 글쓰기를 하고 싶어졌다. 다시 말해 나를 찾고 싶었다. 오래전 경계에 서서 나를 찾겠다고 나섰던 날을 떠올렸다. 어디, 어떤 방향을 몇 도의 각도로 바라보았는지 그때 드러나는 내 고개와 사유하는 뇌의 각도가 일치하는지, 지금 맡고 있는 향기와 장소를 옮겨 시간이 지난 후 맡게 될 향기가 같을지 궁금하다. 좋아하는 라흐마니호프곡이나 모차르트 교향곡을 맘 편히 들은 경험회상했다. 고작 자기 전이나 운전을 하면서 들어왔 같다. 그 순간은 온전히 누렸고 감정에 충실했으니 숨을 쉴 여유는 아주 조금은 남겨두었구나 하고 상황과 자신이 해온 선택을 위로하며 토닥인다.

이 밖에도 충분히 내가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결혼 생활에서의 나도 사라졌다. 사라진 나를 결혼생활이라는 프레임에 다시 소환하고 싶지 않지만 글을 쓰는 순간에 여러 감정들을 불러들이려고 한다. 글쓰기를 통해서 나를 찾고자 한다. 결혼 생활이나  인생의 과도기 시점에서 괴로워하며 흔들림을 많이 겪은 후 찾아온 무기력함이건, 그 속에서 온전히 자신에게 충실하고 있는 나를 찾으려고 한다. 


마음과 몸을 준비하지 않고 경계에 서서 소통하려고 했다. 이제는 돌아보며 분리된 나를 몰아세우지 않으리라. 가족들은 분명히 변해간다. 내가 변했기에 그들이 달라졌는지. 그들과 발맞춰가려는 내가 발전한 건지. 찾았다. 소통하려는 서로를. 현실에서는 여전히 벽에 부딪힌 것처럼 답답한 상황이 연출된다. 자신들이 옳다며 아우성치고 가끔 큰소리로 으르렁댄다. 앞서 언급했듯 갈등 상황을 풀어나가는 태도도 달라졌다. 분명한 건 여러 상황이 좋아졌다. 그런데, 여전히 난 답답하고 조급하다.


잘하고 있다고! 소통의 역설적 모습이다. 모순이다. 소통의 긍정적 결과라며 과대 포장해서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언제 꺼내도 좋은 사례로 잘 다독이고 만져서 아름다운 작품으로 올려야 한다. 빛나는 작품을 세상에 공개하는 일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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