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차되어있는 삶의 기차 위로 뛰어오른 아빠의 무임승차 이후 끊임없이 통행료와 그것을 지불하는 도구 승차권에 대해 생각하며 삶에서 성인으로 가는 통행료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반복된 질문을 하게 된다.
에밀 졸라의 [욕구들]을 읽으며 나의 욕구에 대해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돌아보면 삶에서 순수하게 내 욕구가 가장 강하고 진하게 반영된 건 결혼으로의 도피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던져본다. 물론 원초적인 욕구들이 많았지만 가장 크게 나를 괴롭히며 힘들게 한건 인정 욕구였던 거 같다. 다르다는 것을 보이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정 욕구... 그것으로 삶이 나를 놔주지 않은 시점부터는 모든 일상을 완벽하고 제대로 하려는 욕심으로 매일매일이 벅찼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미 완벽주의적 성격으로 편향되어버린 나의 의식은 내 육체를 너그럽게 봐주지 않았고 지치고 병든 나를 위하는 거처럼 다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선택한 결혼, 되짚어 보며 조심스럽게 그때의 기억들을 소환해 지금의 나는 스스로가 피한 그 도피처에서 에너지가 전혀 다른 새로운 씨앗을 찾고 창조해 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서 나오는 사랑 에너지에 만족하며 오늘 하루도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되묻는다.
어릴 적 나는 삶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빠져나올 수 없는 딜레마의 늪에서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 문제... 지금은 사회적 이슈로 골머리를 앓는 사실들이 과거 현실에서는 바로 나의 집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나는 사건들이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부분에서는 능력 있는 엄마로 인해 아빠의 응축된 에너지가 분출되지 못했고 그 기에 눌려 아빠는 사회적 관계망 속의 활동들을 너무나도 힘들어하셨다. 결국에는 집안의 모든 경제적 활동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 되어버렸다. 아빠는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셨고 그 속에서 정당성을 찾고자 했으며 때로는 자격지심이라는 내면의 자신과 싸워가며 상식적이지 못한 모습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셨다. 그런 아빠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싫었다.
살아가며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통행료 대신 우리가 반드시 지참해야 할 것은 태도이다. 여기서 태도는 책임감과 동등의 태도를 말한다. 그것을 준비하지 못했거나 삶의 긴 여정 가운데서도 지참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어린이도 어른도 아닌 지금 한참 중2병을 앓고 있는 과도기의 청소년들과 다를게 뭐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청소년만이 소유한 도전과 발산의 에너지는 가지고 있는가?
내 눈에 비친 아빠 모습의 범위였다. 한계점을 더 이상 넘어서지 못하고 자존심만이 그를 더 아래로 떨어질 수 없게 했으며 책임감의 태도는 그의 한계가 되어 버렸다. 지금도 삶에서 부모가 갖추어야 하는 요건으로 되어 있는 삶의 태도, 책임감을 아빠는 끝내 갖추지 못하고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갔다.
아빠에게 벗어나는 시간이 해방감 안도감의 순간이 되었고 그 새로움을 맛본 이후로는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들은 나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나 보다. 그토록 벗어나려고 했던 건 단지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을까?
사춘기가 되어 아빠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이해도 포기도 되지 않자 그때부터 나는 그와 함께 숨을 쉬고 있는 그 공간에서 탈출하는 것만이 어느 날은 목표가 되었고 계획에는 벌써 치밀하게 옮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부터 항상 노트에 꼼꼼히 기록하며 매번 계획을 바꾸고 수정해 왔다. 그리고 드디어 실천했고 실행으로 옮겼다. 그렇게 삐뚤어지고 잘못된 나의 시선으로 결혼이라는 깊고 큰 경험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감정들을 하나씩 경험하며 내 방식대로 정해진 틀 안에 내 안의 아이를 가두어 둔다.
사실, 결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고 살아가면서 내 의지가 그 어떤 때 보다 가장 많이 반영된 가장 잘한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결혼을 하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도덕적으로 발달한 나의 내면의 의식이 얼마나 큰 굴레로부터 나를 억압하고 묶어 두었으며 그것이 얼마만큼 자신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지도 잘 몰랐다. 결혼이라는 그 선택이 최선은 아니었지만 차선, 후순으로 나를 지켜주리라고 믿었으며 그렇게 시작된 남편과 나의 결혼 생활이 펼쳐진다.
나의 가정과는 반대로 놓인 것처럼 비친 남편의 가정의 구조관계, 그 속의 가족들 간의 인과관계,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가족 구성원들 간의 모습에 이끌려서 결혼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부장적인 아빠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면서 가정의 경제를 이끌어 가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보았고, 가정을 이끌어 가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당당함을 소유하고 계신 어머님의 모습과 마주한다. 자식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는 모습에서 대리만족의 희열이 느꼈다.
그때까지는 내 머릿속 정돈된 스토리로는 표면적으로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은 결혼이라고 되어 있었다.
물론 결혼 생활은 쉬운 문제를 반복해서 풀고 유형을 익히는 학교 내신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고난도 문제가 즐비해서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때론 지극히 평범함만으로 구성되기도 하고 가끔은 특별함이 곳곳에 문양으로 새겨져 결혼이라는 작품을 빛내 주기도 했다. 그리고 힘들고 만족스럽지 못한 일들이 누적될수록 새로운 만족도가 대칭을 이루며 함께 공존했다. 시간과 숨결 사이사이에 쌓여가는 내 욕구도 매 해 차츰 층을 더해간다.
지금은 그 모든 내면의 욕구를 해소하며 대신해줄 글을 쓸 수 있다니 무엇보다 감사한 일이다. 그것 또한 나에겐 새로움으로 다가가며 일상의 특별함을 찾아내는 도전이었다. 세상이 나에게 선물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우의 수와 선택은 진행 방향도 선택의 순간까지도 선택 이후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통행료를 지불하거나 하지 않는 경우도 가치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선택의 문제다. 서로 다른 여러(n) 개의 경우의 수 중 선택은 크게 하거나 하지 않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잘한 선택과 경계에서의 최선의 선택이 존재한다. 인생에서의 선택은 같은 것을 포함한 순열과 같이 어떤 루트에 따라 움직이는 가에 따라 선택 상황이 다양해진다. 경우의 수가 정말 많이 지기도 하고 움직임이 접촉이 없는 경우 처음의 개수보다 적어지기도 한다. 선택의 경우의 수가 전하는 말은 "그 순간의 최선의 선택이 이제는 최고의 순간이야"라는 위로를 건넨다.
나의 의지와 주변의 요건들 속에서 가장 잘한 나의 선택.
결혼! 그 속에 발을 내디뎠던 순간부터 더 깊고 폭넓은 많은 부분들을 알지 못했을 때까지의 나의 결혼 생활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무엇보다도 가끔씩 나를 들었다 놨다 울다 웃게 만들어주는 다양하고 크고 작은 에너지를 전달하게 하는 사랑의 씨앗들이 존재하는 결혼이라는 시공간이야말로 그때는 최선의 선택이 아닌 도피였지만 지금은 가장 잘한 선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부터 시작되는 삶은 충분히 누리고 즐길만하다.
다시 다른 곳에 깊숙이 숨어있는 더 한 욕구들 속에서 충만한 행복을 찾아 헤매지만 않는다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간 도피의 그 순간이 마침내 내 삶에서 가장 잘한 선택의 순간들일지도..."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에 놓여있는 감정들을 다시 다독이며 [욕구들_에밀 졸라]의 문구를 인용해 마음을 대신해 본다. 이후 내면을 살피고 미처 나오지 못한 귀한 잔여 감정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억압되어 있던 욕구들, 켜켜이 숨어있는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어 토닥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