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영면하소서", "편안히 잠드소서"와 같은 말을 건넨다. 죽음을 마치 영원한 잠처럼 표현하는 이 말들은 오랜 시간 위로의 언어로 사용돼 왔다. 아마도 문학작품들에서 유래했을 거다. 흔히 묘비명에 쓰이는 "여기에 잠들다(Here lies)"라는 문구나,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 햄릿이 "죽는 건, 그저 잠드는 것일 뿐인가?(To die, to sleep—)"라고 독백하는 대사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표현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잠은 오롯이 산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살아있음의 증거이자 특권이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는 쓸 수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잠에 대해 오랫동안 잘못된 선입견을 키워왔다. 잠을 자고 있는 학생에게 '게으른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잠은 죽어서 잔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사당오락(四當五落, 네 시간 자면 합격하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은 꽤 당연시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잘못된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최신 과학 연구를 바탕으로 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잠은 생명이 있는 존재에게만 허락된 행위다. 살아있는 존재는 피곤하고, 지치며, 회복을 필요로 한다. 육체가 기능을 멈춘 죽음에는 피로도, 회복의 필요성도 없다. 살아있는 동안에만 우리는 하루의 고단함을 털어내기 위해 눈을 감고, 꿈을 꾸며,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잠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고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지극히 능동적인 과정인 셈이다.
더 나아가, 잠은 우리가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필수적인 행위다. 과학적으로 잠이 필요한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수면 부족이 우리 몸과 마음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은 수많은 연구를 통해 증명된다. 면역력 저하, 집중력 감퇴, 감정 기복, 심지어 우울증 같은 심각한 심리적 문제까지, 잠이 부족하면 우리 삶의 전반적인 질이 현저히 떨어진다. 즉, 우리는 살기 위해 잠을 자야 하고, 잘 자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잠은 삶을 위한 투쟁이자, 동시에 삶을 풍요롭게 하는 보상이다.
수면 부족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의도하지 않은 전국적 집단 실험인 서머타임 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서머타임제를 실시하는데, 봄에 시간을 한 시간 앞당기는 날에는 심장마비 발생률이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반대로 가을에 시간을 한 시간 늦추는 날에는 심장마비 발생률이 줄어든다. 단 한 시간의 수면 변화가 인구 전체의 건강에 이토록 명확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게 만든다. 또한, 잠을 충분히 잔 학생들의 SAT 점수가 월등히 높아졌다는 실험 결과는 수두룩하다. 이는 수면이 단순한 휴식을 넘어 학습 능력과 인지 기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강력한 증거다. 이런 이유로 야간 근무를 하는 사람들은 정말 숭고한 일을 하고 있는 거다. 자신의 수면 리듬을 희생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특별 수당을 마땅히 지급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러므로 죽은 자에게 잠을 빌어주는 것은 어쩌면 살아있는 우리 자신의 소망을 투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삶의 끝이고, 잠은 삶의 연속을 위한 행위다. 그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이제는 죽음을 잠에 비유하기보다, 잠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할 때다. 잠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이며,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함을 일깨워주는 신성한 행위다.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을 기릴 때, 그들이 더 이상 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슬프지만 현실적이다. 대신,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충분한 잠을 누리며 건강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잠은 오직 산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숭고한 특권이며, 그 특권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