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욕 산재변호사 Nov 04. 2021

판사 기분 헤아리기

판사 기분,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뉴욕 종업원 상해 보험 케이스에서는 보험사와 다투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사고와 관련된 부위, 사고 전 소득, 치료와 수술의 필요성, 지급 거부된 치료비 처리, 대체 급여 (lost wage)의 지급, 보상 등 일련의 이슈에 있어 어느 하나도 편안하게 가는 케이스가 없습니다. 각 이슈들에 있어 보험사와 부딪히기 마련인데, 이때마다 행정법원 (Workers’ Compensation Board)의 주관 하에 히어링 (hearing)이란 것이 잡힙니다. 저희 변호사들은 하루 중 상당 시간을 히어링을 준비하고 참석하는데 보내고 있습니다. 


판사들은 하루에 처리해야 할 케이스가 20-30개에 이릅니다. 각 히어링마다 처리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짧게는 17분, 길게는 90분입니다. 하루의 제한된 일과 시간 안에 자신에게 할당된 케이스를 모두 처리해야 하는 만큼, 판사들은 촌각을 아껴가며 히어링을 효율적이고 빠르게 진행시키고자 합니다.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판사를 보조하여 효과적으로 히어링을 처리하는데도 일정 역할이 있다 하겠습니다. 변호사는 각 히어링의 목적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맞춰 논점을 개진해 가면서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는 것이지요. 판사가 청구인으로 하여금 변호사를 대동하게 하는 것이 청구인의 권리 보호 목적도 있지만, 히어링의 효과적인 진행에도 일부 목적이 있습니다.


다른 변호사들은 모르겠으나, 저는 히어링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담당 판사의 기분을 살핍니다. 온라인 히어링이니만큼 판사의 기분은 그분의 목소리나 어조를 관찰함으로써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아무래도 판사가 컨디션이 좋아 보일 때, 저도 기분이 좋고, 제가 준비한 멘트를 모두 맘껏 하면서 동시에 히어링도 원만하게 진행되는 것을 느낍니다. 판사도 사람인지라 기분이 좋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기 마련일 텐데, 그때마다 상황에 맞춰서 변호를 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판사의 기분에 영향을 주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그날 아침 판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영향을 많이 주었을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아무리 오랜 경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어떤 일을 수행하기 직전에 어떤 경험을 했는가에 의해 수행력이 많이 좌우된다고들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 출근길에 기다리던 버스가 재깍 오고, 차도 막히지 않으면서, 엘리베이터도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도착하고, 그날따라 컴퓨터 부팅도 빠르며, 커피 물도 빨리 내려지고 한다면 그날 하루는 왠지 잘 풀릴 것 같습니다. 전날 자녀가 시험에서 100점 맞았다는 소식에 들었다면 더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면서 최고의 컨디션이 되어, 평소 잘하던 일을 더 잘할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입니다. 반대로 출근길 차도 막히고, 엘리베이터도 늦게 오고, 컴퓨터 부팅도 느리며, 돌리던 복사기에 A4 용지가 끼는 아침을 맞이 하였다면 그날 하루는 왠지 잘 안 풀릴 것 같으면서 의기소침해 지기 쉽습니다. 게다가, 전날 배우자와 말다툼까지 하였다면, 정말이지 뚱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고, 평소 하던 일의 템포를 조심조심 늦추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군 복무를 해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습니다만, 훈련소에 입소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군복에 자신의 이름표를 바느질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안 해보던 바느질을 하면서 입소병들은 손가락도 찔려가며 천천히 바느질을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늦추면서 더욱 조심을 하게 되고, 상관의 말을 잘 따르면서 동시에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효과를 거두게 되는 것이지요. 


운동경기에서 사기를 올리기 위해 노련한 감독들은 경기 직전 운동과는 상관없는 쉬운 활동들을 선수들에게 일부러 시킨다고 합니다. 쉬운 활동을 하고 나면 왠지 그날 경기가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에 자신감도 향상되고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판사와 그렇지 않은 판사. 두 상황에서 판사의 목소리와 어조는 확실히 다릅니다. 판사가 기분이 좋을 때는 그 기분을 케이스에 전염시켜 제가 담당하는 히어링에 좋은 영향을 끼치게 하고, 판사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그것과 케이스를 구분시켜 히어링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는 것, 이것 또한 청구인의 대변인으로서 변호사가 감당해야 할 심리전략이 아닌가 합니다. 

이전 09화 마스코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