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킨타 Oct 07. 2021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

"공감'과  '공감의 배신' 사이에 서다.

 자본주의와 시장은 그 분업이 가져오는 소외와 상품화가 가져오는 인간의 본래적 가치에 대한 침식이 크다. 反인간주의가 내장하고 있는 부의 축적 시스템은 차라리 강탈에 가깝다. 자본주의와 시장이 사회관계를 파괴하고 재구조화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삶을 규정하는 근원적 요인이 경제라는 정서가 보편적이다. 오죽하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없다고 하겠는가. 시대의 기류와 공명할 수밖에 없는 개인으로서는 역설적으로 고담준론하는 정치에서 자신의 생을 존엄하게 도모할 길을 찾는다.


  그러한 반작용을 무색하게 하는 것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소득 양극화의 추세가 거침없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가 가난한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그리고 부자를 더욱 부자로 만든다. 최상위 1%가 99%의 희생위에 군림하는 1대 99의 사회구조는 99%의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을 비웃듯 확고부동하다. 정보통신의 발달에 따른 생산구조의 변화와 세계경제의 글로벌화에 따른 국제분업의 심화가 소득 양극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더욱이 경제가 산업화 단계를 넘어 지식기반 사회로 발전할수록 전문서비스와 같은 4차 산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가 소수에게 집중된다. 선진국의 경우 임금이 비싸지다 보니 제조업이 중국 등으로 이동해 전통적인 블루컬러의 소득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었다. 중산층이 얇아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의 경제위기, 불황도 정치적 위기로 전화되지 못하고 오히려 신자유주의 내지 신보수주의가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재편을 결과하였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그 모순과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정하게 해결하면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재생산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세상은 망할지라도 자본주의는 영원하다’라는 기세를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갈 것인가. 인간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아내고 더불어 자본주의와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할 요량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다양한 범주의 보호장치를 고안하여 왔다. 예컨대 산업사회에서 가정이 친밀성에 기반을 두는 핵가정으로 존재하거나, 종교적 분파로서 종파가 평등과 공생을 이야기 하면서 자본주의 파괴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보호의 공간을 제공하여 왔다. 보다 큰 시스템으로서는 현대의 유럽과 북미에서 개인들에게 충분한 자원을 제공하여 이들이 자립할 수 있게 하는 보호장치가 있고, 근대 초기의 유럽과 현대의 중국과 일본에서 볼 수 있는 보호장치로서는, 개인들보다 개인들을 한데 결속시키는 관계의 통합성을 보호하는 장치 등이 존재한다. 특히 중국의 경우 가족, 관계 연결망, 국가의 보호와 통제가 결합되어 사람들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있거나, 일본의 경우 가족과 국가가 해주지 못하는 보호장치를 기업이 담당하고 있다.


  특정국가의 경제제도는 국가 구조, 기업지배 구조, 금융 시스템, 산업 구조, 노사 관계, 조세 제도, 복지 제도 등의 영역에서 다양한 제도적 조합으로 구성된다. 나라에 따라 경제제도와 복지제도가 상이하다. 각 국가별 정책의 조합이 다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글로벌 환경하에서도 개별 국가의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우리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시장원리가 그 자체의 역할을 가지고 특별한 규제나 관리 없이 스스로 작동한다는 통념이 통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그러한 통념은 현실과 괴리된 것이며, 오히려 정부의 정책이 시장왜곡 또는 규제완화를 통하여 소득 불평등 또는 양극화를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적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대다수 구성원들의 희생하에 상위계층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시장의 원리를 구성하고 일부 소수자들만 성장의 혜택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데서 기인한다. 이러한 시장왜곡은 새로운 부를 창출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를 빼앗는 행위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여 시장경제원리의 핵심인 ‘효율성’을 훼손하고 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의 적폐 외에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은 소득 양극화로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사람들의 박탈감은 한계에 이르렀다. 대기업이 독식한 시장은 자본주의적 수요 공급의 미약한 생태계도 독점해버렸다. 최종 소비자만 살아남은 기형적 시장경제 체제는 승자독식과 세습 자본주의를 한국인에게 선물하였다. 정녕 더 나은 부의 재분배를 위한 현실적 방안은 있는가?           


  경제적 효율성을 제고하는 데에는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 내지 사회적 자본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치시스템과 경제시스템이 공정하지 않다는 통념이 팽배한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하여 시장에서의 거래비용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특정한 법률이나 정치적 제도 또는 경제적 제도가 일부 집단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의 결속력은 떨어지고 투자의욕과 시장의 효율성마저 낮을 수밖에 없다. 작금의 우리사회에서는 사회 전반에 이익이 되는 정책 대신 특정 집단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 공공정책의 탈을 쓰고 지속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실정에 더하여, 정부 세입 또한 사회적으로 진정하게 필요한 수요처에 투입되지 않고 4대강 사업 등 소수의 이익에 봉사하는 형태로 집행되고 있다.


  복지 안전판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은 ‘정글’이 우리 사회 곳곳에 현존하고 있다. 정부가 발표한 복지예산은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이나 노인 등의 취약계층을 아우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경제성장이 안 돼 세금이 구멍이 났다는 정부의 항변은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는 집단 편집증의 증세를 내 보인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불평등하다. 또한 빈부 양극화는 숙명과도 같다. 게다가 갈수록 그 격차가 벌어지고 있고, 계급화로 권위주의로 오염되는 영역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일로에 있다. 이제 논리정합적이고 현실적합성을 갖춘 대안의 제시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소득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나 복지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서나 포근한 자본주의를 실현함에는 그 재원이 필수적 조건이라는 데에 있다. 이래저래 재원마련이 당면과제이다. 법인세 인상, 부유세 또는 누진세의 신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세제개편만이 그 과제를 강력하게 감당할 수 있다. 소득 불평등이 불평등의 씨앗이요 저성장의 주범이라는 이유로, ‘반’자본의 고율의 자본세를 주장하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은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대기업을 비롯한 상위계층의 반발은 종래 기정사실이었고, 실제 국가정책에 영향을 주고 있는 면도 무시할 수 없다. 상속세 폐지를 대선공약으로 제시하는 일군의 정치인의 처세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소득 분배에 관한 제도의 진화가 가당하기 위해서는 국가사회의 구조 내지 틀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국가 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을 포함한 경제구조의 전반적인 내용이 변경되어야 한다. 디스토피아의 파국을 면하기 위해서는 가히 혁명적 수준의 개혁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부의 집중을 혁파할 수 있는 방안의 모색이 급진적인 좌파의 관점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구조주의의 측면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의 극복의 가능성을 가늠한 알튀세르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전 05화 김훈의 '남한산성'-PC운동과 프레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