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보니 Sep 08. 2022

달님, 달님


  하루 종일 날이 흐리더니 저녁 무렵에는 비가 내렸다.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하는 품새가 쉽게 그칠 비 같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요즘 내 코가 석 잔데 이 비가 그치면 무성해질 잡초들이 걱정이다. 추석이 코앞이라 한 번쯤은 풀을 베야 하지 않을까 하던 참이긴 한데 도무지 짬이 나질 않는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없다지만 그래도 더러 뒷골 밭을 오가는 아랫마을 할아버지가 있고, 반갑지 않은 청구서 따위를 꼬박꼬박 전해주는 우체부가 있으니 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작업장 앞마당에 심어놓은 부추는 누가 보더라도 혀를 끌끌 찰 만큼 방치된 지 오래고, 샘 주위로 수북한 잡초는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매번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손이 안 가는 걸 보면 천상 타고난 게으름뱅이가 틀림없는 모양이다. 

  빗소리를 들으며 그동안 밀려 있던 설거지를 했다. 싱크대에는 그릇이며 냄비, 남김없이 나와 있는 수저들로 수북했다. 집에서 가져온 반찬통은 또 왜 이리 많은지... 팔을 걷어붙이고 수세미에 세제를 듬뿍 묻혀 부글부글 거품을 잔뜩 낸다. 그리고 큰 냄비부터 하나씩 닦기 시작한다. 지하 100미터에서 올라온 샘물이라서 그런지 금세 손이 시리다. 아무래도 고무장갑을 하나 사야 할 것 같다. 못 쓰는 칫솔로 수챗구멍까지 싹싹 닦고 나니 이것도 일이다. 그래도 모처럼 싱크대 위가 깨끗하니 기분은 좋다. 이게 며칠이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작업장을 나섰다. 좀체 그칠 것 같지 않던 비는 어느 틈엔가 멎어 있었다. 먹장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달님이 휘영청 밝다. 달님 옆으로는 반짝이는 두 개의 별... 

  바람에 날려 나지막한 구름들이 달님 밑으로 휙휙 지나간다. 고개를 들어 한참 
달님을 바라본다. 그리운 얼굴, 이제는 잊힌 줄로만 알았던 님의 얼굴이 보름달에 가득하다.


  날 맑은 날에는 작업장 앞마당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다. 아무리 한여름이라 해도 해만 떨어지면 시원해지니 그것도 좋고, 집에서는 극성스러운 모기란 놈도 여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니 그것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빈틈이라곤 하나도 없이 하늘을 빼곡히 수놓고 있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낙원이 따로 없지 싶다. 게다가 시원한 바람이라도 한줄기 불어주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대로만.

  소리 없이 지는 별똥별을 만나게 되면 그때마다 이렇게 빌곤 했다. 여기서 더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며 지금 이대로만. 딴에는 지극히 소박한 바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법 많은 것들을 버리고 얻은 것인데 그마저도 내게는 분에 넘쳤나 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날을 되짚어보는 것은 언제나 뒤끝이 씁쓸한 법이다.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저 물방울처럼 떨어지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순리라면 또 어쩌겠는가? 그저 말없이 따르는 수밖에... 그렇더라도 이렇게 미련과 후회가 남는 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끝내 나를 버리지는 못했다는 것. 

  후회란 아무리 빨리 한다 해도 이미 늦은 것이라더니 내가 꼭 그 짝이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벌써 늦은 시각이다.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내려간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휘영한 달님이 말없이 내 뒤를 따르고 있다. 



이전 02화 산에서 길을 잃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