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비가 내렸지 싶다. 메말라가던 작은 개울에 제법 많은 물이 흐른다. 아마 이날도 비가 오락가락하던 중이었을 것이다.
이 개울은 변덕쟁이다. 비가 조금 많이 왔다 싶으면 금방이라도 넘칠 듯 흙탕물로 가득 찼다가도 며칠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순간순간 변하는 모습이 마치 변검 공연을 보는 듯하지만 아직 개울이 완전히 말라 버린 경우는 보지 못했다. 어디서 시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엔 틀림없이 마르지 않는 샘이 있으리라.
큰비가 내릴 때면 개울 위로 난 작은 다리 위에서 개울을 내려다보곤 한다. 검붉은 황톳빛 물살이 크고 작은 바위에 부딪쳐 물보라를 만들고 또 정신이 아득할 만큼 재빠르게 흐르고 있는 걸 보고 있자면 난간도 없는 다리에서 저절로 한걸음 뒤로 물러나게 된다. 유혹이란 언제나 달콤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큰비가 내릴 때면 늘 이 다리 위에서 개울을 내려다보게 되는 심사는 또 뭔지...
산수국을 만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제대로 된 비가 내렸다. 짐작대로 산수국이 서 있던 자리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여름 거친 물살에 휩쓸려 다시 꽃을 피울 수나 있을까 싶었던 산수국이 올해도 어김없이 꽃망울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금방이라도 넘칠 듯 개울 가득 휘몰아치던 흙탕물에 이파리 하나 남기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다 빼앗겼는데... 그 정도야 아무런 일도 아니었던 걸까? 산수국에게서 묵은 상처라곤 찾아볼 수 없다.
작은 꽃들이 흔히 그렇듯 산수국도 저 홀로 피는 법이 없다. 이맘 때면 어디든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있다면 다 꽃밭인데 겨우 콩알만 한 꽃 하나 달랑 피워봤자다. 무더기로 피는 것도 안심이 되지 않는 듯 산수국은 얼굴마담까지 내세운다. 마치 하얀 잎으로 눈속임을 하는 개다래처럼 헛꽃을 피우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자신을 대신해서 크고 화려한...
그런 건가 보다. 하필이면 작은 개울가 바위틈에 떨어진 자신의 운명도 탓하지 않고, 거센 물살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본능처럼 자신을 헛꽃으로 치장하며 단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오길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산수국이 살아가는 방식인가 보다.
오늘도 산골짝에선 자기 짝을 찾는 뻐꾸기 한 마리가 쉼 없이 울고, 작은 개울가에선 산수국이 조용히 나비를 기다리고 있다.
어제는 봄손님이나 맞아볼까 싶은 마음에 뒷산엘 올랐어. 아랫녘에서 들려오는 꽃소식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말이야. 내 오래된 꽃밭이야 어디에 어떤 꽃이 언제쯤 피는지 시시콜콜 다 알고 있으니 지금 가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고 더 위쪽을 더듬어볼 생각이었어.
혼자 생각에 저런 곳에도 꽃이 필까 싶어도 꽃은 여지없이 피어 있더라는 걸 지난해에서야 알았기 때문에 올해는 일찌감치 서둘렀어. 물론 나선 김에 뒷산 꼭대기도 한번 올라가 보고. 보기에는 야트막한 게 만만하게 보이지만 명색이 백두대간 줄기라 뒷산도 오르기가 만만찮아. 가파르기가 보통이 아니거든. 특히나 내 오래된 꽃밭을 지나치자마자 만나게 되는 산의 초입은 정말 '억'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들어. 산의 초입이라고 하니 어딘지 모르게 좀 이상하네. 내 작업장이 산의 중턱쯤에 있으니 실제로는 6, 7부 능선쯤 되는 곳인데 말이야.
숨이 턱까지 차도록 헉헉거리며 기다시피 올라간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우수수 떨어져 쌓인 낙엽과 헐벗은 나무들뿐이었어. 며칠씩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렸지만 여긴 아무 소용도 없었나 봐. 꽃눈이든 잎눈이든 봄비를 맞아 부풀어 오른 것조차 안 보였으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더, 좀 더 기다려야 하나 봐.
쓸쓸히 작업장으로 돌아오는 길, 미라처럼 바싹 말라버린 꽃 한 송이를 보았어. 뭔지 알겠어? 그래, 산수국이야. 피어났을 때 그 모습 그대로인.
산수국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겨울 그 많았던 눈도, 세찼던 바람도 저리 꼿꼿하게 서 있는 산수국을 어쩌지는 못했나 봐. 잎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떨어졌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비록 생기는 잃어버렸지만 산수국은 여전히 아름다웠어. 생생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기품까지 느껴질 정도로 말이야. 이제는 알 것 같아. 이 세상 모든 생명에 깃들어 있는 '자존'과 또 거기에서 풍겨 나오는 아름다움을. 바싹 말라버린 산수국은 말없이 그걸 웅변하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