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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니 Sep 21. 2022

찰나

  한 사람의 인생은 언제나 찰나에 결정된다. 어느 할 일 없는 사람의 계산에 따르면 1/75초에 불과한 그 짧은 시간에 말이다. 


  집을 나설 때부터 썩 조짐이 좋지 않았다. 원래 조짐이니 뭐니 하는 것을 믿지는 않지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단지 중부지방은 태풍의 영향권 밖이라는 일기예보와 달리 빗방울이 후두득 듣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늘 다니던 중앙고속도로를 피해 중부내륙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높고 푸른 하늘을 만날 수 있었다. 햇살은 여전한 듯해도 약간 열어둔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만큼은 이미 한여름의 그것이 아니었다. 중앙고속도로와 달리 덩치 큰 화물 트럭의 행렬이 끊이지 않던 곳이 어쩐 일인지 한산하기만 했다. 


  기분 좋게 달리다 보니 어느새 영동고속도로였다. 드높은 악명에 걸맞게 분기점을 지나자마자 어디에 숨 어 있었던지 차들이 몰려나왔다. 그저 밀리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꼴이 계속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는 죽도 밥도 모두 도로 위에서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중간쯤에서 동서울로 빠져 외곽순환도로를 타는 게 훨씬 빠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에도 양지에서부터는 늘 막히기 때문에 약 간 돌아가더라도 그게 훨씬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을 나설 때의 조짐이 현실로 나타나려고 했던지 호법에서 동서울로 빠지지 못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기 때문이다. 이천에서부터 다음에는 빠져나가야 한다고 스스로 주의를 주고 있었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것도 고쳐야 할 오래된 운전 습관 중의 하나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덕평을 지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앞서가던 차들의 브레이크 등이 수시로 들어오고 있었다. 뒤늦은 후회와 함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봤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앞서 가는 차들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저 밀리지만 않기를 바랄 밖에는... 


  어느 순간 앞서 가던 차들이 제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나도 따라서 기어를 바꾸고는 엑셀을 꾹 밟았다. 막 가속도가 붙으려는 찰나 뭔가 내 차에 와서 부딪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백미러를 보니 내 뒤를 바싹 따라오던 흰색 승용차가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속도를 늦춘다. 그것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온 신경이 곤두선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 차도 휘청거린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기분 나쁜 소리... 잽싸게 비상등을 넣고, 속도를 늦추고, 1차선에서 갓길로 차를 뺀다. 차에서 내리는데 아까 그 흰색 승용차가 씽하니 지나간다. 


  앞쪽에서 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아 짐칸 쪽부터 둘러보았다. 실려 있던 짐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바퀴를 살펴보는데 운전석 쪽은 말짱했다. 뒤로 한 바퀴 돌아 오른쪽 뒷바퀴를 살펴보는데 뭔가 이상하다. 타이어가 달려 있어야 할 자리에 타이어는 어딜 가고 무슨 걸레 조각이 달려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뒷바퀴의 흙받기가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그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내 뒤를 바싹 쫓아오던 차가 내 차를 추월하려다 뒷바퀴의 흙받기를 살짝 들이받았고, 우그러진 흙받기는 시속 100킬로로 굴러가던 뒷타이어를 갉아먹은 것이었다. 스페어타이어로 갈려고 보니 공구함 열쇠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공구함 열쇠가 달린 차 열쇠뭉치는 내 책상 서랍에서 고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일이 꼬이려고 하니 참 골고루로 꼬인다. 


  일단은 우그러진 흙받기를 발길질로 대충 폈다. 그나마 아직 상태가 좋은 쪽 타이어에 흙받기가 닿지 않을 정도로만 만들어놓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게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살살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수밖에. 


  슬슬 기다시피 해서 양지로 빠져나와 카센터를 찾아 들어갔다. 직원이 타이어를 보더니 깜짝 놀란다. 타이어 한번 쳐다보고, 내 얼굴 한번 쳐다보고... 한참을 그렇게 하던 직원이 한마디 한다. 


  "아저씨, 운 좋으시네요. 재수 없다 생각 마시고 이런 날은 로또라도 한 장 사세요." 


  그 직원 말에 따르자면 나는 죽다 살아난 거란다. 고속도로에서 타이어가 저 지경으로 터져 버릴 정도면 심한 경우 차가 뒤집히거나 아니면 휙 돌아버린단다. 그 이후의 일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혼자 열을 올리며 호들갑을 떠는 직원과 상관없이 나는 그저 카센터 앞을 씽씽 달리는 차들만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저 차들은 다 무슨 볼일로 지금 이 길을 저리 씽씽 달리고 있는 것일까? 죽다 살아난 게 정말, 다행인가? 


  '어쨌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고속도로에 올라서면서 든 생각이다. 조금 귀찮은 일이 있었을 뿐이고 그것 외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앞날에 변화가 있을 만한 놀라운 일은 고맙게도 여전히 나를 비켜가고 있다. 오늘 하루도 뻔히 예상되는 그런 일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누구나 깜짝 놀랄만한 반전은 앞으로도 절대 없다. 괜스레 웃음이 삐죽삐죽 입술을 밀고 나왔다. 


  한 사람의 인생은 언제나 찰나에 모든 게 결정된다. 1/75초, 그 짧은 시간에.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아래쪽 멀쩡한 새 타이어와 비교해서 보시라. 저것보다 더 심한 놈은 카센터에 버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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