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재에서 1
산 타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 년에 몇 번은 산에 올라. 이름난 산을 찾아다니는 건 아니고 그저 내 작업장 뒤편에 있는 산을 오르는 정도야. 또 가끔은 길 하나 건너 앞산으로도 원정을 가. 정상까지 시간 반쯤이면 충분하니 굳이 등산이랄 것도 없지만, 산이 무척 가파르고 길다운 길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땀깨나 흘려야 해. 내가 주로 찾는 뒷산은 초입부터 뭔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니 그 가파르기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갈 거야. 물론 산 전체가 그런 건 아니니 거기만 벗어나면 그래도 좀 수월해.
시골 동네 산이 요즘 다 그렇듯 여기도 일 년 내내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가끔 벌초하러 오는 사람 정도를 제외하면 말이야. 동네 사람들도 이젠 군불을 지피는 것도 아니니 산에 오를 일이 전혀 없어. 봄가을로 산나물이나 산열매가 지천이지만 맛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일 삼아 다니는 사람은 없어. 동네에 전부 연세 많은 어르신밖에 없는 탓도 있을 거야.
겉보기엔 야트막하고 별거 아닐 것 같은 산도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면 의외로 깊고 넓고 높은 경우가 많아.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직접 그 안으로 뛰어드는 것과의 차이야. 일종의 착시효과라고도 할 수 있고... 어떤 산이든 결코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라는 건 내가 뒷산에서 두 번이나 길을 잃어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 거야.
첫 번째 길을 잃었을 때는 너무 당황해서 그저 아래로, 아래로만 내달렸어. 그래도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계곡 비스무리한 걸 따라서 말이야. 갖은 고생 끝에 이젠 다 내려왔겠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참... 내가 내려온 쪽만 제외하곤 사방팔방이 전부 칡덩굴로 엉켜 있어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그저 운동화 하나만 꿰차고 산보 삼아 나온 길에 낫 같은 게 있을 리도 만무고 참으로 아찔했어. 그렇지 않아도 짧은 산골의 해는 벌써 산 뒤편으로 사라지고 곧 어둠이 밀려올 태세라 잠시도 머뭇거릴 새가 없었어.
길을 찾기 위해 다시 위로 올라가는 것은 곧 여기서 밤을 새우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어. 힘들어도 산 옆구리를 따라 칡덩굴이 좀 덜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어. 행인지 불행인지 겨우 칡덩굴이 덜한 곳을 찾아 산을 내려와 보니 그곳은 내 작업장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어. 터덜터덜 달빛을 벗 삼아 작업장으로 돌아가는데 힘도 없고 배도 고프고, 여기저기 쓸리고 할퀸 자리는 또 왜 그리 아프던지...
두 번째 길을 잃었을 때는 그래도 한번 경험이 있다고 그리 당황하진 않았던 것 같아. 둘러맨 조그만 가방 안에 물은 물론 간단한 요깃거리도 있었고. 거기다 전화기까지 챙겼으니 한결 안심이 되더라고. 이번에 내가 택한 방법은 아래로 내려가는 대신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어. 마침 해가 떨어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으니 시간도 넉넉했어.
어떤 산이든지 대개 그 정상에는 어떤 식으로든 길이 나 있게 마련이야. 나보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고마운 흔적이지. 아니나 다를까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도착해 보니 산등성이를 따라 사방팔방으로 조그만 길들이 나 있었어.
마침내 길을 찾았다는 안도의 한숨도 잠깐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어.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느 길인지헛갈렸기 때문이야. 이 길? 저 길? 그 어느 길도 확신이 서질 않았어.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마침내 제대로 된 길을 발견했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래 맞아. 나는 두려웠던 거야.
아직 어두워지자면 멀었지만 길을 잘못 선택해 똑같은 일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때까지도 내 체력이 버텨줄지 영 자신이 없었어. 산꼭대기에서 밤을 지새울 게 아닌 이상 어느 길이든 택해야 했어. 확신은 없지만 그저 저 길, 저 길을 따라가면 내가 돌아가야 할 그곳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만으로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어.
발걸음을 떼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어. 설령 그 길의 끝이 내가 돌아가야 할 그곳이 아니라면 또 어때.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산만 내려오면 또 다른 길이 보일 텐데...
올해는 뒷산조차 한번 오르지 못했어. 아직은 엄두가 나지 않고 슬슬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한번쯤은 올라가 볼까 해. 이제 뒷산에서 길 잃을 걱정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