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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초툰 Apr 13. 2024

다시 상담을 시작합니다.

악마 베스탄 LOVE 선애

 남에게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는 분명 남들과 잘 어울리는 밝은 성격이었는데 이제는 남과 눈도 마주치기 힘들게 되었고,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들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이제는 말을 뱉는 행위 자체가 뭐랄까? 나를 향한 말이라기보다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가식 덮인 것들일 뿐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불 특정한 수만 가지의 일들이 나를 향하는 것 같았고, 이제는 나를 비춰주던 거울들이 조각을 내며 나를 찌르고 비늘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그런 유령 같던 나를 알아보는 것처럼 어떤 남자가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 자신의 상담소에 놀러 오라고 속삭였다. 대충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려고 했는데 그가 건넨 종이에 적혀 있던 홍보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단 한 명이라도 이 거지 같은 기분을 들어준다면.."

 

 이 문구를 읽자마자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건 어쩌면 나에게 깨져서 나간 조각을 발견한 것처럼, 날카롭게 솟아 나를 찌르던 그 조각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허전해서 그리운 것인가? 너무 날카로웠기에 그 고통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일까? 알 수 없었을 때 그곳을 찾게 되었다. 마치 떨어졌던 그 조각들을 간신히 찾아 이어 붙이려는 것처럼 그래 그때는 이랬었지…. 아 이때는 그래, 힘들었었다며 헛소리를 몇 번 뱉으니 그럴싸한 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얼기설기 어설프게 붙여서인지 여기저기 쩍 소리가 나며 떨어지려고 했지만 남을 위해 억지로 쓴 가면보다는 이곳에서의 대화가 훨씬 더 나를 나답게 느끼게 했다.

 

실시간 댓글

-흥청망청 님 : 이곳이 어딘가요? 님하 주소 좀 알려주세요

-더 불놀이 님 : 브라보!

-사신 K 님 : 악마의 심리상담소에 직원이 더 필요하시지 않나요?

-선 애 님 : 조만간 커피 타러 찾아갈게요

-(바리스타) 승주 님 : 내 여자친구 글 잘 쓴다!!!

-유명한 변호사 님 : 저도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추천합니다. 내 돈 내고 내가 간다

-지철이 엄마 : 장하다 우리 아들

-지철이 아빠 : 응원해요

-조주만 님 : XXXX XXXXX XXXXX->비방 댓글은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어때요? 원장님? 홍보 글 인터넷에 올려 봤는데 반응이 괜찮더라고요"

혜련은 칭찬받고 싶은 얼굴로 지철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런 얼굴을 무시하면서 지철이 말했다.

"뭐 이런 걸 올려요? 필라테스 학원은 어쩌고 여기 있어요?"

"아.. 원장님께서 직접 보내주신 그 공짜 문자 때문에 찾아온 친구들 열심히 가르치고 파산했죠. 뭐. 그래도 원장님 원망 안 해요. 그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제 안에 묵혔던 감정들이 스르륵 녹아버렸거든요. 이제는 도망 안 치려고요. 선애 씨 조언대로 이곳에 있으면서 승주 씨와 함께 제 미래를 그려보려고요"

"다른 곳에서 미래를 그리면 안 될까요? 이곳은 가뜩이나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서 머리 아픈데?"

 

 지철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너도나도 번호표를 뽑겠다며 양보는 없다는 듯 싸우고 있었고, 대기실 가득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방금 배달을 하고 온 듯한 헬멧을 쓴 라이더, 부부 싸움을 하며 누가 맞는지 여기서 결판을 내자는 듯 씩씩대고 있는 남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노트로 적고 있는 다소 어두워 보이는 모자 쓴 남자까지 바쁜 지옥을 벗어나고 싶어서 시작된 일이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자꾸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한숨짓는 지철을 향해 혜련이 소리쳤다.

 

"원장님 빨리 그 새로 달아드린 코스모스 커튼에 들어가 있으세요. 우리 상담소 콘셉트 아시죠?"

"하이드 앤 시크... 그런데 혜련 씨 그 커튼 제 스타일이 아니라고 분명 말씀드렸었는데.. 혹시 혜련 씨 필라테스에서 쓰던 거 대충 가져온 거 아니에요? 냄새도 이상하게 꼬릿꼬릿 한 게..."

 

지철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한 혜련은 서둘러 지철을 상담실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원장님!! 또 그러신다 이런 일은 저한테 일임하시기로 했잖아요?"

 

 어쩔 수 없이 상담실로 넘어지며 들어온 지철은 문뜩 선애가 그리워졌다. 인간세계에 떨어지면 기억을 잃기 마련이었지만 지철은 기억만이 온전히 각인된 채 남아 있었다. 기억을 주고서라도 찾고 싶은 능력을 그리워하며 지철은 어색하게 오른손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만약 그에게 이 능력이 있었다면 혜련을 지옥에 이미 보냈었겠지만, 아마도 그건 지옥의 신이 그에게 내린 최소한의 벌과 같이 느껴졌다.

 

'제일 필요한 것을 가져가시고 쓸데없는 기억만 남겨 두셨군..'

 

 지철이 혜련을 만났을 때는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때라 선애보다 말 많고 기센 여자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에만 의지한 결과 지철은 그녀가 필라테스 강사로 오랫동안 일했다는 사실을 간과해 버린 것이다. 이제 그녀와 함께 펼쳐질 앞날이 그려보자, 자신도 모르게 단전에서 깊은 한숨이 '후' 하고 튀어나왔다. 그나마 이제는 일 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듯 시계가 9시 알람을 울리자,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었는데, 지철의 눈앞 커튼 속 흔들리는 알록달록 한 코스모스가 한눈에 들어왔다. 살랑살랑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그 코스모스는 마치 살아있는 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달콤한 사탕과 같은 냄새가 그 바람에 실려왔다. 지철이 그 익숙한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상담실 문이 끼익 하고 열리더니 익숙한 향기 속에 한 없이 다정하고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네요. 원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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