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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나 탈 걸 그랬나

제주 버킷리스트 1) 바다 드라이브

by 씬디북클럽


첫 제주도는 고2 수학여행 때였다, 신혼 초에, 수년 전쯤에, 작년에, 그리고 지난 설 연휴. 네댓 번의 제주도 일정 가운데 내가 운전대를 잡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트럭 운전수의 딸이면서도 운전을 하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장난스레 말하곤 했다. "내가 운전 안 하고 운전기사를 두면 되지."



스물셋 어학연수에서 만난 남자친구(= 現 남편)의 차를 얻어 타며 보조석에 앉아 생각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내가 차를 움직이게 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 도로 옆 풍경이 좋은데, 왜 여기 오기 전 운전면허를 미리 따지 않았을까. 왼쪽 차선으로 달리는 경험과 외국에서 차를 몰아 보는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웠었다.



오~ 필승 코리아 노래가 울려 퍼지고 비더레즈 빨간 티셔츠를 전 국민이 교복처럼 입고 다니던 2002년 여름, 운전면허증을 에 넣었다.



운전 경력은 20년도 넘었지만 실제 실력이 그만큼은 아니었다. 파란 중고 마티즈를 끌고 아는 가까운 길만 오갔다. 결혼을 해서는 주로 남편이 운전을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문화센터에 갈 때만 운전을 했지만, 그 역시 자주는 아니었다. 토끼 선생님이 되고 나서야 거의 매일 자주 종종 운전을 했지만, 교구를 싣고 시간 맞춰 이동해야 하는 직업적 동선만 확실히 알았다. 여행이나 시댁 방문 등 장거리 운전도 웬만하면 남편이 운전을 했다.



도보 10분 거리의 직장을 구하고 나서는 정말 크게 운전할 일이 없었다. 아이들 픽업이나 장 보러 갈 때만 운전을 하던 최근이었다. 주차가 힘든 곳은 차 없이 가는 것이 마음 편했다. 누구 딸인지 걷는 것은 자신 있었다. 그래도 한 번씩 그런 생각은 들었다. 바다를 옆에 끼고 달리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부자의 제주 라이딩 종주 계획에 충동적으로 합류한 여행이었다. 부자가 하루 먼저 도착해 코스를 시작해 달리는 동안, 모녀는 다음 날 도착해 렌터카로 이동해 부자를 만나기로 했다. 각자 시간을 보내고 예약해 둔 숙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렌터카 대여도 운전도 내 몫이었다. 이참에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운전을 해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고속도로는 늘 어렵다. 하루 먼저 출발하는 부자를 새벽 일찍 김포 공항에 태워다 주고 오는 길, 한번 길을 잘못 들어 살짝 돌아왔다. 우리가 출발하는 날도 아침 일찍 비행기였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 까맣고 까만 아직 밤의 운전, 초행길도 서울길도 길고 긴 터널도 익숙지 않았다.


공항픽업서비스 회사에서 도착을 묻는 전화를 받고 10분 후 도착 예정이었다. 이 길이 이 길인가, 들어서야 하는 길을 잘못 들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재검색합니다." 반복되는 딱딱한 음성에 긴장하며 순간 멈칫한 순간, 아뿔싸, 차선을 잘못 들었다. 까만 도로 바닥으로 나를 향해 가리키는 하얀 화살표가 분명히 보였다. 그렇다. 나는 중앙선을 침범해 말로만 듣던 역주행을 하고 만 것이다.



비상 깜빡이를 켜고 살금살금 달리며 제발 다시 제 자리로 갈 상황이 나오길 빌고 또 빌던 순간, 마주 하는 두 대의 차를 만났다. 순간 급정거! 뒷좌석에서 졸고 있던 딸아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를 비켜 가는 차들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한 채 간신히 맞는 도로를 찾아 올라섰다. 등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입으론 이 세상 온갖 신을 다 찾았다. '감사합니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반복하며 떨리는 마음과 운전대 둘 다를 부여잡았다. 하늘에 계신 그 어느 분이 도왔다고밖에 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분이 조수석에 앉아 나와 딸아이를 지켜주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도로 위에 있다는 자체가 떨리고 무섭고 겁나는 10분이었다. 그 10분은 한 상태로 목적지에 도착하게 했고 얼떨떨한 정신으로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 이륙했다가 착륙할 때까지 계속 몸이 떨렸다. 제주에서 나, 운전할 수 있을까.



비행기 창에서 만난 2024년 음력 해맞이








제주 공항에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비행기는 연착되었고 렌터카 직원분의 친절하지만 많이 화가 난 목소리를 들으며 셔틀에 올라탔다. 남편이 예약해 둔 차는 현대 코나. 작은 suv는 시동 걸기도 기어 변속도 처음 보는 형태였다. 하얀 차체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계기판의 주유 상태 사진을 찍는 것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아직도 머릿속이 까만 상태로 시동을 걸었다.



Nice to see you.




첫 목적지는 국토종주 제주환상자전거길 송악산 인증센터. 제주 도착 첫 임무는 라이딩 부자를 만나 짐을 에 싣는 것이었다. 하루 만에 보는 아들은 뭔가 성숙한 느낌이었고 남편은 뭐가 노쇠한(!) 느낌이었다. 장난스레 농담과 응원을 주고받고 헤어졌다. 새벽의 역주행은 우선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 덜덜 떨며 다시 시동을 걸었다.



제주의 도로는 친절했다.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는 직선으로 난 도로는 단순했고 한산했다. 시속 30이었다가 50이었다가 최고 80까지의 속도를 지켜가며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차선을 헷갈린 염려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다를 오른편으로 끼고 달리는 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초봄의 햇살은 이미 제주에 가득했다. 2월의 윤슬을 폰에 담을 수 없는 대신 눈에 가득 담았다. "와, 멋지다!"라고 소리 내러 얘기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겨났다.


제주 도로의 차들 또한 친절했다. 예전처럼 번호판에 '허'자를 달고 있지는 않았지만, 앞뒤로 달리는 차들 대부분이 나와 같은 외지인들이 렌터카를 몰고 있지는 않았을까. 방어 운전 저속 운전 양보 운전, 갖가지 아름다운 도로 위의 미풍양속들을 서로 지켜 가면서 평화롭게 각자의 길을 달렸다. 그 안에서 덩달아 평화로워졌다.



차를 세워 담은 산과 바다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이, 운전 또한 혼자만 잘해서 잘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가려면 당신이 멈춰 서서 기다려 주어야 하고, 당신이 가려면 나 역시 멈춰 서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신호를 지키고 속도를 늦추고 말로 할 수 없는 고마움을 깜빡깜빡깜빡 세 번으로 전하는 상호 간의 예의와 규칙이 존재한다.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 있을까 싶었던 걱정은, 친절하고 다정한 제주 도로와 운전자들로 인해 서서히 옅어졌다. 빨리빨리 이번 신호에 지나가야지 하는 조급함은, '괜찮아 천천히 급할 거 없어.'로 이어졌다.



부자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는 동안, 모녀는 같은 방향을 다른 속도로 달렸다. 높은 건물 없이 바다를 곁에 두고 달렸다. 천혜향 한라봉 가게를 만나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 차를 세울 곳이 있으면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이것이 바로 제주 드라이브의 맛, 실컷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었다.



돌도 많고 바람 많은 제주에 여전히 아가씨들이 더 많은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달린 2박 3일간의 도로에는 친절한 사람들이 많았다. 말도 많은 제주에서 말 한 번 못 탄 것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다음의 제주에선 뚜껑이 열리는 오픈카를 렌트해 바람 한 번 제대로 맞아볼까. 상상 속에서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배실배실 웃음 한 줄기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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