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은 제주에서 나서 자랐고, 다른 한 명은 제주에서 오래 살다가 현재는 캐나다에 살고 있다. 두 사람에게 제주의 카페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한 명에게는 존대어로 남쪽과 북쪽 한 곳씩, 다른 한 명에게는 반모(반말모드)로 남쪽과 북쪽 한 곳씩.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후루룩 본인들의 최애 카페 리스트를 나누어 주었다. 달콤한 커피 향이 사진 밖으로 피어올랐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 알차고 즐겁게 보내야지. 부자가 아침 일찍 출발하면 모녀는 예쁜 브런치 카페에 가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관광지나 가고 싶었던 곳을 갔다가, 지인들이 소개해 준 카페에서 오후 커피를 마셔야지. 1일 2 카페를 해야지. 공항이 북쪽이니 반시계방향으로 해안선을 따라 운전하면서 내려와야지. 서쪽에 하나 남쪽에 하나, 다음 날은 남쪽에 하나 북쪽에 하나, 마지막 날은 공항 쪽 카페를 들러 봐야지. 예쁘게 인증샷을 찍어 잘 다녀 간다고 안부 인사를 보내야지. 바다 드라이브에 이어 카페 로드가 되겠네...라고 동선을 정리할 때까지는 미처 몰랐다. 카페 추천을 부탁하는 톡에 '바다 뷰'라는 단어를 놓쳤다는 것을.
출발 새벽의 에피소드(라고 정의하기엔 아직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버킷리스트 1 글 참조.)로 공황 비슷한 정신 상태로 공항에 도착했다. 어둑어둑 비 오는 제주는 내 머릿속처럼 어둡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계획대로 반시계 방향 바다를 따라서 타원을 그리며 운전하고 싶었는데. 한라산을 비껴가며 섬 안쪽으로 거의 직선을 그리며 운전을 했다. 목적지는 7시 방향 남서쪽. 9시 방향 서쪽은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오케이, 바이.
1일 1 카페로 계획을 수정했다. 점심을 먹으며 지도를 살피며 펜으로 메모하며 인근 카페와의 이동 시간을 확인했다. 도착한 날은 마침 설 연휴 당일, 혹시라도 문을 열지 않았을까 검색이 못 미더워 전화로 확인을 했다. 마침내 이번 제주 여행의 첫 카페는 이중섭 거리에 위치한 '중섭의 집'으로 정해졌다.
심심하고 단조로운 도로들과는 달리 일반 시내 같은 길에 맞게 가고 있나 싶었다. 한산한 거리에 들어서자 익숙한 그림들이 벽에도 길바닥 위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주차를 하고 카페를 찾는 길. 일반집 대문처럼 생겼고 간판이 작고 입구의 초인종을 눌러야 문을 열어준다는 후기를 기억해 놓길 잘했다. 어두운 나무색 철문 옆으로 가지런히 쌓인 벽돌 위에 회색빛 간판에 새겨진 'ㅈ ㅜ ㅇ ㅅ ㅓ ㅂ ㅇ ㅡ ㅣ ㅈ ㅣ ㅂ' 옳게 찾아왔구나. '삐!' 초인종을 눌렀고 '철컥!' 문이 열렸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울창한 가운데 먼저 보이는 건물의 문을 열었다. 조금 큰 테이블에 한 팀만 조용조용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근처를 둘러보고 다시 나와 계단을 내려가 다른 건물의 문을 열었다.
주문을 받는 곳은 아래 건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커알못'도 느껴지는 향긋한 원두향. 지금까지 이렇게 심심하고 단조로운 인테리어는 없었다. 이것은 나무인가 가구인가 싶은 탁자와 의자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손님은 우리 둘 뿐이었다.
아껴놓은 오늘치 커피를 마실까 하다가 자주 올 수 없는 곳인 만큼 예쁜 사진 찍기가 카페인 수혈을 이겼다. 시그니처 메뉴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집양갱을 주문했다. 음료의 이름은 이중섭의 작품명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작품을 검색해 보는 동안 한라봉과 열대과일로 만든 연주홍빛 음료와, 매실청과 바질 등 초록의 맛이 느껴지는 음료가 도착했다. 동그랗고 네모지고 트리 모양의 작고 귀여운 양갱 3 총사는 팥 호지 말차 등 제주의 맛이 담겨 있다고 했다. 나뭇가지 같은 포크를 이용해 작게 잘라 한 입씩 사이좋게 먹었다. 집양갱은 달디달고 달디달지는 않았다. 우리 집 미슐랭이 말했다. "음, 맛있네."
너른 카페에 우리 둘만 있었다. 나긋나긋하게 깔깔대며 셀카를 찍었다. 각자 핸드폰을 보거나 들고 간 책을 읽었다. 바다도 섶섬도 보이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비 개인 2월 오후의 찰나 같은 시간, 우리는 중섭이었고, 이 집은 우리의 낙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