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챙겨 온 책은 3권이었다. 독서 모임을 앞두고 꼭 읽어야 하는 책, 공항이나 기내에서 두서없이 읽을 책, 만약 상황이 된다면 바다를 바라보며 아무 페이지든 펼쳐 의미를 찾을 책.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고인이 되신 한국과 미국의 세 작가님들의 책들이었다. 더 이상 육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지만 결코 소멸하지 않을 그네들의 글이 세상에 흩뿌려져 지친 영혼들에게 온기와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원고지 칸칸마다 꾹꾹 눌러 담았을 진심과 솔직함으로.
토지와 박경리 작가님은 오를 수 없는 산이고, 건널 수 없는 강 같은 느낌의 막연한 동경이었다. 그저 남일이었던 토지 전권 완독은 2023년 6월부터 시작한 '하나의책 토지 읽기' 독서모임 덕분이었다. 매 달 한 권의 토지를 읽고 줌으로 책 이야기를 나누는 오전 시간은, 1890년대에 시작해 일제 강점기로, 최참판댁 평사리로 시작해 용정 일대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중이다.
재독을 하고 꼼꼼히 필사를 하는 멤버님에게 자극이 되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읽을 요량으로 일독만 하기로 했다. 모임이 있는 화요일 오전을 앞두고 주말 이틀 동안 집중해서 읽었다. 하루 전이면 블로그 후기를 살펴보며 줄거리와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는 내내 고민했던 전권 구매 결정은 8개월 만에야 이루어졌다. 스무 권을 가장 높은 곳에 임하시게 한 건 책장 정리의 동기 부여가 되었을까. 비로소 내 책으로 읽는 토지 9권은 3부 1권,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서희와 여러 청춘들의 시대적 사회적 개인적 고민들이 가득했다. 마음껏 인덱스를 붙이고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내 생각을 메모했다.
제주 여행 중이면 충분히 완독 하겠지 싶었던 건 착각이고 오만이었다. 읽어야지 하면서 계속 미루기만 했다. 시작만 하면 후딱 읽힐 거야 하면서 시작은 점점 멀어졌다.
첫째 날 밤이 가고 둘째 날 밤이 되어서야 정말 시작했다. 펜션 복층 침대에 기대어 맥주 한 캔을 들고 시작한 책,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는데 완독은 무리가 있었다. 셋째 날 오후 들른 카페에서 잠시, 항공편이 지연되는 공항에서 또 잠시 펼쳐 들었다. 핸드폰을 보는 것이 모두의 당연한 일상이 된 지금, 누가 보면 엄청 재미있는 책이거나 몹시 대단한 공부라도 하는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자정이 넘어서 도착해 집에 와서도 대강 짐정리를 하고 마저 읽어 새벽 3시에 완독 해냈다. 지금까지의 여덟 권이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역시 엄청 재미있는 책이고 몹시 대단한 공부가 되었다.
(다음은 토지 모임 후기를 sns에 정리한 글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프니 청춘이라뇨. 아프면 환자이지 않겠습니까. 청춘의 기준은 그 누가 정할 수 있답니까. 그럼에도, 이번 책을 읽으며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니 저 위의 문장만 줄곧 떠오릅디다.
용이와 임이네의 아들 홍이, 조준구의 아들 병수, 김평산의 아들이자 거복(김두수)의 동생 한복이, 관수와 석이까지...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대를 이어서까지 어쩔 수 없는 한과 고뇌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한 고민의 범위가 개인으로 이어지는 것이 조금은 발전적인 모습인가 싶기도 했고요. 아프지만 청춘이고, 청춘이니 또한 괴롭기도 하겠지요.
유교도 기독교도 동학도 아우르지 못했던 백정 신분의 한에도 눈길이 갔습니다. 살아도 죽어도 신분제 사회가 끝이 났어도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삶이 애달파집니다. 끊어낼 수 없는 강력한 쇠사슬에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조준구에게서 평사리 집을 도로 찾아낸 서희의 복수는 예상보다 시시합니다. 제아무리 최서희일지라도, 김길상을 최길상으로 만들어 최환국 최윤국 형제로 최 씨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수밖에 없는 숙명에 여러 생각이 듭니다. 용정에서 빛을 발하는 길상의 모습에 다시금 前 최애남주에게 기대하게 됩니다. 종국에는 그들 모두 춤추는 나비가 되어야 할까요.
고민은 신중히 결정은 신속히. 드디어 토지 전권을 구매했습니다. 큰맘 먹고 책장 정리를 한 건 토지 스무 권의 자리 확보를 위한 큰 그림이었을 겁니다. 가장 놓은 곳에 모셔놓고 보니 몹시 든든하기만 합니다. 남매에게 물려줄 한 뙈기 땅은 없지마는,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 스무 권은 물려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려. 하하.
최서희가 기피하는 평사리 그 마을을 용이는 사랑했다. 좋은 시절,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었던 그 마을은 용이에게는 근원적인 것이다. 서러운 사연들이 묻혀 있지만 더럽혀지지 않은 자신의 존엄을 심었던 곳, 사랑을 심었던 곳, 고뇌를 심었던 곳, 용이는 새삼스럽게 고향을 떠난 기간이 얼마나 이지러진 세월이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p.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