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김밥 먹고 싶어. 가게에서 파는 거 말고 집에서 싼 거. 돌돌 만 김밥 한 줄을 자르지도 않고 그대로 한 입에 넣고 싶어."
반짝이는 눈으로 숨도 안 쉬고 말하는 네게오늘은 좀 귀찮다는 얘길 어떻게 할 수 있겠니. 그래, 김밥 뭐 어렵다고. 내가 김밥 싸 줄게. 아니 말아 준다고 해야 하나? 암튼, 뭐든 좋다. 그래, 오늘 메뉴는 김밥, 너로 정했다.
내가 얘기했던가? 나 이래 봬도 김밥집 딸이야. 우리 엄마가 나 외국 가 있는 사이에 덜컥 김밥집을 차렸지 뭐야. 다 큰 애들 데리고 홀로 막막했다 하더라도, 생전 사업 한 번 한 적 없는 양반이 아파트 팔고서 김밥집을 차리고 그 건물 3층으로 이사를 하다니. 남고 앞 김밥집 이름은 '엄마 김밥'이었어. 김밥 한 줄에 천 원, 라면 한 그릇도 천 원 하던 시절을 우리 엄마는 인생 최고의 흑역사라고 하시네.
김밥집 딸이면 김밥 잘 싸겠다고? 그럴 리가 있니. 나 이래 봬도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란 K 장녀인 걸. 아빠는 아들보다 딸을 예뻐했고, 남동생은 누나를 위해 신라면 3개(또는 4개)를 끓여서 대령하곤 했지. 엄마를 도와 김밥을 싼 적은 없어. 가끔 서빙을 하거나 간혹 배달을 가거나 그 정도만 거들었어. 나를 못 미더워했을지도 모르겠네.
특별한 비법 같은 거 있냐고? 글세, 그런 게 있었던가? 그냥 평범했어. 재료도 다를 게 없었고. 빨간 게맛살, 주황 당근, 노란 계란과 단무지, 초록 시금치, 갈색 우엉 그 정도지 뭐. 메뉴에 따라 참치나 볶은 김치, 볶은 소고기 정도가 추가되었던가? 기억이 잘 없네.
아, 밥에 넣는 촛물이 조금 달랐던 것 같네. 고슬고슬하게 갓 지은 하얀 쌀밥을 큰 양푼에 주걱으로 떠서 옮기고 밥에 양념하는 거 있잖아. 소금, 참기름, 깨소금 정도에 '엄마 김밥' 사장님인 엄마는 사이다를 약간 더 넣었던 것 같아. 식초였던가? 아, 진짜 기억이 잘 없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때였는지도 모르겠다.
자, 재료 준비도 밥도 다 되었네. 모처럼 실력 발휘 좀 해 볼까? 김발을 놓고 싸는 건 아마추어라고? 뭐래. 지금껏 재료 준비하고 김밥 10줄 싸기 시작하는 사람 앞에서 할 소리야? 먹기 싫으면 관둬. 김발 놓고 얼른 싸달라고? 그래, 진작에 그럴 것이지.
도마 위에 김발을 놓고 김을 펼쳐. 우둘투둘한 면이 위로 오도록 향해서 간이 된 밥을 얇게 펴 얹지. 밥이 너무 많으면 모양이 안 예쁘고 나중에 터지더라. 그 위에 빨주노초파남보 알록달록 재료들을 차례대로 올리면 돼. 재료 올리기 전에 깻잎을 깔면 좀 더 깔끔한 모양이 되는 것 같더라. 뭐? 시금치 말고 오이를 넣어 달라고?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이 좋다고? 참 나, 원하는 것도 많네. 냉장고에 오이가 있었나. 아, 마침 하나 남았네. 그래, 오이 넣어줄게. 이건 미리 준비할 것도 없고 그냥 길게 잘라서 넣으면 되니까. 그 정도는 인심 썼다.
뭐? 썰지도 않고 한 줄 그냥 달라고? 진짜 그렇게 먹을 참이었구나. 너도 참, 대단하다, 대단해. 그래, 알겠어. 여기 첫 줄을 너에게 주마. 아, 잠깐. 참기름을 솔에 묻혀 발라서 줄게. 김솔을 넣어두는 통 이름을 '김솔통'이라고 한대. 너무 귀여운 이름 아니니? "솔통아, 김솔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