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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은 Apr 29. 2024

우리 가족은 다섯 명

행복했었던 시절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우리 가족은 네 명이었다. 큰 키를 물려준 아빠와 짙은 쌍꺼풀을 물려준 엄마, 나의 이름을 지어준 언니와 나의 존재를 신기해하던 오빠. 나는 우리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났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섯 명이 되었다.


보통 어린 시절에 대해 선명한 기억은 한두 개 정도라던데 나는 꽤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직접 기억하는 것도 있고, 사진을 통해 그리고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상기된 기억도 있다. 우리 집은 늘 시끌벅적했다. 오빠가 친구들과 놀이터에 나가는 날이면 같이 따라 나가겠다고 엉엉 울었고, 언니는 우는 동생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그때 당시 유명했던 H.O.T. 영상을 보기 일쑤였다. 엄마는 그런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도 셋을 늘 정성스레 챙겼다. 치 샌드위치나 당근 주스 같은 건강 간식을 만들어주고, 늘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빠는 보통 해가 져야 들어오는 편이었다. 키다리 아저씨 같은 우리 아빠는 내가 유치원생 때까지만 해도 퇴근 후 우리를 꽉 안아주고, 옷을 갈아입자마자 기린과 사자 그림을 그려주는 날이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아빠의 눈도 안 마주칠 날이 올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당시 아빠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 셋을 키우는 집안치곤 여유롭게 살았다. 오빠는 사립초등학교를 다녔고 나와 언니는 학원에서 피아노와 발레를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새로운 길을 찾아보겠다고 일을 관뒀다. 앞날이 창창할 것 같았던 아빠의 기대는 점점 흑백으로 가득해졌다. 결국 아빠 명의로 된 집을 팔고 우리는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이사를 간다는 사실이 즐거워 동네방네 소문을 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돈을 마련하기 위한 이사였다. 


그렇게 아빠는 일을 구하느라 해가 져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지고, 엄마는 아빠 대신 돈을 벌기 위해 집 밖으로 향하는 날이 많았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는 엄마에게서 방치되어 언니와 오빠를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안방에선 아빠와 엄마가 다투는 소리가 잦아졌고 전처럼 행복했던 우리 집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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