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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은 May 03. 2024

스무 해가 지나고

조금 나아진 우리

벌써 스무 해가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총 다섯 번의 이사를 했고, 언니와 오빠의 입시 기간에는 경제적 상황이 제일 좋지 않아 경기도로 옮겨 지냈다. 둘은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마을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야 했고, 늦은 밤 언니와 오빠의 학원이 끝나면 엄마는 차로 데리러 갔다. 종종 엄마를 따라 마중 나가는 길목은 매우 어둡고 캄캄한 길이었다.


아빠는 지방에 있는 한 회사에 취업하게 됐다. 갑자기 주말 부부가 된 엄마는 돈을 벌려고 시도했던 일들을 모두 관두고 혼자서 우리 세 남매를 돌봤다. 학교를 잘 가지 않는 언니와 입시로 예민한 오빠, 그리고 사춘기를 겪는 나까지 엄마는 늘 셋 중 하나와 다퉈야 했고, 지쳐서 누워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도 아빠가 고생하고 엄마가 애써서일까. 우리는 운 좋게도 할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인서울 4년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나이 차이 때문에 대학을 다닌 시기는 다르지만 언니는 카페에서, 오빠는 생활용품 판매점에서 그리고 나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각자 용돈벌이 정도는 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 그사이 우리는 작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아빠는 여전히 지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언니는 졸업 후에도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지 못하다가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하면서 직접 운영하는 학원을 열게 되었고, 오빠도 사업이 잘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가족의 상황은 점점 나아지는 듯했다. 전처럼 돈 때문에 다투고 소리를 지르는 일은 보기 드물었고, 주말마다 서울로 올라오는 아빠의 손에는 늘 케이크나 빵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나의 작은 부모였던 언니와 오빠 덕분에 처음 해외여행도 가보고, 외제차도 타봤다. 엄마와 아빠는 다툼이 아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고, 그렇게 얼룩진 나의 어린 시절은 사라지는 듯했다. 거기에 나는 형부라는 소중한 가족을 한 명 더 맞게 되었다.


언니의 결혼, 오빠의 독립 이후에도 우리는 한 달에 몇 번씩 만나 시간을 보냈다. 이제 남들 눈에 화목한 가족으로 보일 수 있는 정도였다. 심지어 코로나로 인해 친구를 만날 시간에 가족을 만나며 우리는 끈끈해지기 시작했다. ‘가족이 제일 소중하다.’라는 말을 가슴에 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코로나가 잠잠해질 무렵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아빠와 엄마, 언니와 형부, 오빠와 나 이렇게 여섯 명이 제주도에 가기로 했다. 십 년 만에 가게 될 그곳을 생각하니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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