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밤 비행기라 오후까지 시간이 있었다. 짐 싸는 걸 마무리했다. 빠진 게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캐리어를 잠그는 순간까지 생각했다. 떠나기 전 부모님과 함께 이른 저녁을 먹고,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했다. 내리자마자 버스가 도착해 황급히 인사를 나누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마치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처럼 묘한 기분이 흘렀다. 언제든 집을 떠나는 건 뭉클하다.
저녁 8시가 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공항엔 사람이 북적거렸다. 주디언니와 나는 가장 편한 복장으로 만나 인사를 나눴다. 수하물 무게를 재고 긴 기다림 끝에 탑승수속을 밟았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우리는 환전한 파운드 지폐를 정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체코에서는 ‘코루나’라는 지폐로 환전을 한 번 더 해야 했기에 확실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언니와 나는 각자 책임질 지폐를 챙기고 여권을 확인했다. 어쩌면 우리는 이때부터 더블 체크병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몇 시간의 대기 끝에 탑승이 시작되었다. 우선 싱가포르까지는 6시간 정도 소요됐다. 우리는 밀린 영화를 보고, 기내식도 먹었다. 싱가포르 항공에서는 음료 중 하나로 ‘싱가포르 슬링’을 제공한다. 호기심에 마셔봤지만 맛은 그냥 새콤한 주스 같았다. 대화도 잠시, 어느새 잠이 든 우리였다. 희미하게 눈을 뜨자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은 새벽 5시. 고요한 공항이었다. 경유가 4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터라 우리는 공항 내부만 빠르게 구경한 후 다시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렸다. 공항 의자에서 우리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으로 졸다가 겨우 런던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우리 가서 시차 적응하기 힘드니까 잠은 웬만하면 참자.” 주디언니가 결심한 듯 말을 건넸다. 사실 자신은 없었지만 최대한 그렇게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다짐도 잠시. 우리는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고, 기내식을 먹은 후 잠이 들고, 불이 꺼져도, 켜져도 잠이 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덕분에 런던에는 나름 쌩쌩한 상태로 도착할 수 있었다. 런던까지는 총 14시간이 걸렸다. 싱가포르 항공의 매우 큰 장점은 와이파이가 된다는 것이다. 가는 내내 남자 친구, 가족들과 연락하며 지루한 길을 이겨낼 수 있었다. 도착 한 시간 전, 대강 양치와 세수를 하고 런던에 도착할 채비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24시간 만에 영국 땅을 밟았다. 긴 여정 끝에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