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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삐 Oct 23. 2021

세 번째 메뉴: 바닐라 라떼

순득  할머니와 용재

 항상 바닐라 라떼를 시키는 박순득 할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언니의 카페를 찾았다. 할머니는 카페 옆 슈퍼의 사장님이셨고 그날은 이따금씩 찾아오는 손자와 함께 카페를 방문하셨다. 여름이 지나고 쌀쌀한 공기가 마음에 들어오는 계절, 가을이 되었을 때 할머니는 손자와 함께 양손 가득 찐 감자와 옥수수를 들고 오셨다.

“할머니, 뭘 또 이런 걸 가져오셨어요…!”

“혼자서 일하는데 이런 거라도 무야지!!  마이 묵고 힘내서 일하이소!”

“매번 감사해요, 정말…. 할머니, 오늘도 바닐라 라떼 드시나요?”

“맞다, 오늘도 바나나 라떼인가 뭔가 하는 그거 하나 주고 우리 손자는…. 시커먼 거 있잖아! 아메리카노? 그거 하나 주이소.”

 할머니는 바닐라 라떼를 항상 바나나 라떼라 하셨고 언니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할머니 역시 창가 자리를 선호하셨는데 첫손님으로 오셔서 그런지 마침 내가 있는 곳에 앉으셨다.

 손자 용재는 담담하게 할머니께 안부를 물었고 할머니는 그런 용재와의 소소한 시간들을 함께 보내심에 행복해하셨다. 할머니는 취준생인 용재에게 하고 싶은 건 없는지, 취업준비는 잘되고 있는지 물어보셨다. 하지만 그 질문이 조금은 불편했던 것인지 용재는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사실 용재는 이제껏 학교를 다니며 교환학생, 인턴쉽 프로그램 등 스펙 쌓기에 열심을 다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녹녹지 않았고 그는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원하는 기업에 면접을 볼 때마다 1차는 합격했지만 2차에서 떨어지는 등 계속하여 실패의 쓴맛을 보았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된다고 생각하며 3년간 달려왔지만 계속되는 실패에 그는 더 이상 일어날 힘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 마음을 할머니께 조심스레 말하였다.

“할머니….  저 사실 취직 준비는 잠시 보류하려고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를 해도 잘 안되는 걸 보면 전 안되나 봐요. 실패를 계속하다 보니 더 이상 노력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이젠 안 들어요….”

“야야, 니 진짜 대단타!”

 계속해서 실패했는데요…?  3 동안이나요.”

그니까. 3년이나 니가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했다면서. 할매는 니가 3 동안 열심히 했다는 것이 대단타. 인내심이 아주 좋네. 그마이 열심히 하는게 어디 쉽나?   해도 할끼라.”

사람들은 각자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할머니와 용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같은 사건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그것은 용재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사실 사람이나 돌이나 모두 부정적인 사건을 계속하여 마주하면 실패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자신감이 떨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휩싸이게 되어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것이다. 그런 용재에게 할머니는 한 번 더 말씀하셨다.

“용재야, 인생을 걸어가다 보면 넘어지지 않을 수가 없데이. 그때마다 일어나면 되는기라. 당장 일어나고 싶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잠시 쉬다가 이제 고마 일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일어나면 되는기라. 인생은 장기전이니까 길게 봐라. 할매도 그랬다.”

 용재는 그 말을 듣고 울컥했다. 넘어지면 넘어졌다고 탓하고 일어설 힘이 없어 못 일어서면 탓하는 사회에서 할머니의 한마디는 용재에게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그동안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왔는지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용재와 마찬가지로 실패를 했을 때면 그 기억으로 모든 일을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작은 초점을 바꾸면 생각이 변화되고 가능성이 달라진다는 것을 순득 할머니를 통해 깨달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가을에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시각은 여전히 제자리에 멈춰 발전되지 않았을 것이다.


 쌀쌀한 새벽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모닥불이 꺼졌다. 우리 가족은 모두 빠른 귀가를 위해 지나가는 동물을 찾았고 다행히 그 지역을 순찰하던 부엉이 순찰대원을 만나 빠르게 귀가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께서 20년 전에 담가두셨던 훍탕물이 그대로 탁자 위에 있었고 우린 그것을 마시며 카페에서의 마지막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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