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단비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쳤고 엄마는 재체기를 했다.그동안 마음이 풀린 나는 엄마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려하는데 눈앞에 옅은 빛이 깜빡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빛을 따라 가보니 그곳엔 아버지와 동생이 있었다.
“너네 여기서 뭐하노?! 얼어 죽으려고 작정했나! 바람 때문에 몸에 금이라도 가면 어떡하려고 그러는데!”
“여보, 담요 덕분에 괜찮았어. 걱정마요. 우리 걱정되어서 나온 거예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춥다. 고마 들어가자.”
표현이 조금 거칠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아버지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아버지의 말 속에서 나는 10년전 언니의 카페에서 만났던 자매를 떠올렸다. 무채색의 콘크리트 바닥과 진한 녹색의 벽. 하늘하늘한 시폰 재질 커튼 사이의 알전구들. 잘 익은 스콘 냄새와 따뜻한 커피 향기가 나무 식탁과 의자들에 베여있는 언니의 카페는 작고 아늑한 분위기로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곳에서 제일 처음 만난 손님이 단비라는 학생이었다. 수많은 꽃들이 얼굴을 드러내는 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카페는 오전 10시부터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했다. 평소 출근 전에 잠시 들르는 손님과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 하러오는 손님들이 가득했지만 그날은 유독 사람이 없었고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첫 손님인 단비가 들어왔다. 매우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회색 교복, 노란 명찰과 삼선 슬리퍼는 그가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음….”
“항상 주문했던 것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인가요?”
“네, 그리고 오트밀 쿠키도 하나 부탁드립니다.
단골손님인 단비가 무엇을 시킬지 언니는 단번에 알아맞혔다. 그리고 음료와 쿠키 하나를 준비했다. 단비는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다 내가 있던 창가 쪽에 앉았다. 항상 밝은 얼굴로 이야기도 잘하던 단비였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잠을 잘 못 잤던 것인지 얼굴을 푸석해져 있었고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맞은 것인지 조금 붉어져있는 이마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단비는 그 전화의 진동이 끊어질 때까지 받지 않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단비의 엄마였다. 무슨일 때문인건지 단비는 전화 받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단비 엄마는 단비가 받을때까지 전화를 걸었고 결국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엄마와 통화하기 시작했다.
“네, 엄마…. 지금 카페예요. 조금 있다가 언니야 만나기로 했어요…. 언니야랑 공부하기로 했어요.”
전화를 하는 동안 그는 어딘가 불안한지 손톱을 오독오독 깨물며 다리를 떨었다.
“아…. 이번 수학은 성적이 잘 안 나왔어요…. 55점이요. 평균보다는 높은데…. 알겠어요! 오늘 집에 안 들어갈게요! 어차피 가도 문 잠궈둘거잖아요!”
엄마에게 혼난 것인지 단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닦은 휴지를 갈기갈기 찢어 가루로 만든 후 쟁반 위에 올려두었다. 마음 정리가 잘 되지 않은 단비는 30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때, 단비의 언니 단지가 그의 앞에 앉았다. 회사일을 마치고 돌아온 단지 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단비의 얼굴 이곳저곳을 만졌다.
“얼굴이 왜 이렇게 죽상이고…. 이마는 왜 이렇게 빨개? 설마 니 또 벽에 박았어? 시험 때문에 그래?”
“언니, 나 이번에 55점밖에 못 받았어…. 시험이 어렵게 나와서 평균이 50점이긴 했는데 나 어떡해? 엄마가 오늘 집에 들어올 생각하지 말라고 하고 화 엄청나셨던데…. 오늘은 나 언니 집에서 자면 안 돼?”
“재워주는 건 당연히 되지. 엄마도 참…. 알아서 잘하는 애한테 스트레스 엄청 주네. 너한테 거는 기대가 커서 그런가 보다. 그런데 55점? 잘했네! 절반 맞는 건 어디 쉬운 줄 아나? ”
“맞나…. 근데 엄마가 만족할 수 있게 하고 싶은데….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 뭘 해도 잘 못할 것 같고 나같은건 뭐하러 사나 싶다….”
“말 함부로 한다! 네가 왜 살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데? 고작 성적 하나 때문에? 잘 들어봐. 어렸을 때부터 너는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았어. 남들이 못하는 건 ‘다음에 잘하면 된다’라고 생각하고 위로하면서 네가 못하면 자책하고 며칠을 괴로워했잖아. 물론 엄마의 영향도 있었겠지. 늦둥이에 똑 부러지는 너를 보면서 엄마는 항상 최고를 바랐고 무엇을 해도 그 이상을 요구하니 당연히 스트레스 안 받고 배기겠나…. 근데 너무 그럴 필요는 없어. 네가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잖아? 언니는 네가 어떤 일이던 편하게 하고 남들에게 하는 것처럼 너에게도 말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네 편이 되어줘야지, 안 그래?”
단지 언니의 말을 들은 단비는 그제야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그 일을 겪은 사람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파왔다.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오는 그 느낌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항상 앞만 보며 쫓겨사는 그런 삶을 어린 나이부터 살아왔을 단비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때 단지 언니가 단비를 보며 말을 다시 이어갔다.
"단비야, 그리고 니 나이가 몇살인데 벌써 사는것에 의문을 가지면 어떡하니. 아직 가능성이 많은 나이데. 100세 인생을 24시간으로 보면 아직 너는 10대니까 새벽 1-2시밖에 안된거야. 20대 후반인 나도 시간을 나눠보면 새벽 6시다. 우리 둘 다 아직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나이고 충분히 많은 시간들이 남아있어. 그러니까 힘 좀 빼고 살아도 된다. 너가 항상 잘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만족할 수 있는 결과가 매번 나오는건 아니야. 너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거고. 그러니까 그런 생각으로 너를 너무 갉아먹지 말고 조금은 여유를 가지면서 살면 좋겠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잘 해내려 노력하지만 생각해보면 내 인생인데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조금은 아이러니한 것 같다. 힘을 조금은 빼고 살아도 된다는 언니의 말이 나와 단비의 마음 속에 따뜻하게 자리잡았다. 웃으며 돌아가는 단지언니와 단비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