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두 가지 말을 하는 남자는 믿지 않아. 여자 싫어한다는 놈, 그리고 돈 안 좋아한다는 놈. 전자는 진짜 여자 밝히는 놈이고, 후자는 사기꾼이야.”
앞에 앉은 조명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트너의 어떤 신체 부위를 좋아하는가? 젊었을 때의 대답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남자들은 가슴, 엉덩이, 목덜미, 허벅지 등이었고 가끔 특이한 취향을 가진 놈들이 뱃살을 얘기하기도 했다. 여자들도 남자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엉덩이, 어깨, 팔뚝, 허벅지, 가슴 등등. 다들 대답은 거기서 거기였다. 상식적이고 무난한 대답. 나도 30대 중반까지는 목덜미라고 대답했었다. 니트 위로 드러난 긴 목, 뒷모습, 잔머리, 역광... 순정만화나 <러브레터>의 한 장면... 뻥이다. 꾸며낸 대답.
요즘, 같은 질문을 받으면 손가락이라고 대답한다.
하얗고 섬세한 손가락, 나보다 얇은 팔목까지.
손가락은 전능한 신체부위다. 쥐고 만지고 던지고 찌르고 때리고 주무르고 집어넣고 꺼내고, 느리게도 빠르게도, 위로도 아래도, 움직일 수 있으며 게다가 사이즈도 다 다른 섬세한 다섯 개의 전능한 기계.
젓가락질을 하고 하나의 오타 없이 타이핑을 하고 얇은 책장을 넘기고 하얀 커피 잔을 잡았던 손가락이다. 핸드로션의 은은한 향과 부드러움이 남아 있는 손등과 스타킹의 올이 나가지 않도록 늘 부드럽고 둥글게 정리되어 있는 손톱과 마르지도 젖어있지도 않는 손바닥이 한데 어우러져 기능과 미학의 정점에 있는 존재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을 때, 웃으며 입을 가릴 때, 손부채질을 할 때, 신게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릴 때, 손가락은 손바닥과 하나가 되어 단호하게 결속된다. 가리비와 키조개의 껍질에서 보이는 완고함.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손가락들이 느슨히 분열된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때, 내 헤링본 재킷에 묻은 머리카락과 실밥을 조심스레 떼어 줄 때, 피아노를 치거나 기타를 칠 때, 그리고...
그 전능한, 때로는 거룩한, 때로는 우아한, 때로는 공격적이면서도 여린 손가락. 내 손으로 꽉 쥐면 부러질 것 같았던 손가락, 손을 잡으면 내 손에 파묻혔던 손가락, 깍지를 껴 손을 잡으면 수줍어 하던 온기가 전해지던 여린 손가락. 그 손가락이 가장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신체 부위를 쥔다.
그 손가락이 온몸의 혈류가 응축되어 이미 팽팽하게 기립되어 있는 무능한 신체,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는 강아지처럼, 자극이라는 주인 없이는 그저 비뇨기에 불과한 그것, 그것을 부른 주인이 자기의 것을 움켜쥔다. 그렇다. 그건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니기에 그 부위의 주인이"었던" 난 무기력감을 느낀다. 불현듯 찾아오는 서브미시브의 순간. 하얗고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검붉은 페니스를 부러뜨릴 듯 움켜쥔다. 기어 변속.
부러져도 좋을 것 같은 순간, 더 커지면 부러지거나 터져버릴 것 같은 팽창과 확장의 순간, 두려움과 긴장으로 심장은 더 빨리 펌프질 해서 그 팽창과 확장을 촉진시키는 순간, 이제 내 차례라고 하소연하고 싶은 순간, 그래서 슬슬 그 손에서 페니스를 빼내어 하나의 수컷 짐승으로 태세 전환하려는 순간, 그 순간, 그 손가락 위로 더 무기력한, 그러나 뜨겁고 부드럽고 더 붉은 신체 부위가 협공을 한다. 페니스도 사라지고, 나 또한 사라진다.
문명의 공간에서 인간을 어떤 종보다 우월한 종으로 만들었던 그 신체 부위가 가장 본능적인 도구로 전환될 때, 그 전환을 통해 다른 전능한 존재, 자신보다 훨씬 근육이 많고 힘도 세고 키도 크고 때로는 나이도 많은 그 존재, 그 남자라는 존재를 완전히 제압할 때, 그 제압의 순간을 목격할 때, 어떤 알 수 없는 포만감이 차오른다. 전능하지 않아도 된다. 그럴 필요도 없다. 난 오직 저 사람의 손에 내 운명을 맡긴다. 캡틴, 오 마이 캡틴.
섹스가 끝나고 미끄덩거리는 페니스를 손에 올려놓고 그 무게를 가늠하듯이, 아니면 어디 또, 할 수나 있겠냐고 묻듯이 부드럽게 희롱하듯 주물럭 거리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 볼 때, 난 내심 방심한 채 느긋해진다. 그 공간, 그 순간엔 이름도 없다. 그저 그녀의 남자만 있을 뿐. 느긋해지다 못해 좀 전까지 열심히 일하던 근육들이 쉬러 갔을 때, 눈치 없이 페니스는 주인의 부름에 쫄랑쫄랑 꼬리를 흔들며 일어난다. 내 것이지만 내 말을 듣지 않고 저 하얀 손가락의 부름에 좋다고 일어서는 저 무기력한 신체.
쉬고 있던 근육을 흔들어 깨운다. 팔, 다리, 가슴, 엉덩이. 자자, 복근에 힘주고, 어이 팔, 지금 쉬고 있을 때가 아냐. 허벅지, 야야, 안쪽에 힘 빡 주고. 자자, 2차전이야. 우리랑 상의도 없이 저 놈이 또 제 멋대로.... 아니, 아니, 아니지. 저 놈은 원래 주인이 따로 있지. 자자, 어떻게 레드불스라도 마실 거야?
2022 -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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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촉-손을 뻗치면 만져지는 것
"손을 뻗치면 무엇인가가 만져지고, 그 무엇인가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 그것은 멋있는 일이었다. 나는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오랫동안 그런 감촉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중에서.
기지촌에선 야한 농담이 흔했다. 종종 어른들은 00이네가 어떤 놈하고 배가 맞아서 집을 나갔다는 말을 했다. 배를 맞춘다는 것의 의미, 그 중요성을 절감한 건 마흔이 다 되어서였다. 그건 단순히 남녀 간의 섹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삽입을 중심으로 한 섹스는 배를 안 맞춰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신적인 플라토닉 사랑을 말하는 은유는 더욱더 아니다. 인간의 배를 그런 것 따위를 위한 메타포로 제공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오르가슴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배를 맞춰야 그게 생기는 것도 아니고 오르가슴을 느낄 때 오장육부가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또 그 진동을 둘이 나누는 것도 아니다.
배를 맞추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섹스의 행위를 함축적으로 묘사한다. 생태계에서 암컷과 수컷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교미를 하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 침팬지 같은 영장류 중에서도 그런 종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확실히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한 이 체위가 정상인 존재는 인간뿐이다. 다른 동물에게 이 체위는 비정상이다.
인간에게 몸이 필요한 건 걷고, 만지고, 느끼기 위해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걷지 않은 인간은 사유하지 못하고 퇴화의 징조로 비만이 된다. 손을 뻗어 타인을 만지지 않는 인간은 필요한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다. 타인, 특히 사랑하는 인간을 만지거나 그로부터 만짐을 당했을 때만이 나오는 호르몬이 인간에게 있다. 아무리 보약을 많이 먹어도 그건 타인만이 해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배를 맞춘다로 돌아가자. 섹스가 어떤 댓가이거나 교환의 대상이 아니고 강제성도 전혀 없이, 온전히 내적인 감정의 자발적 표현일 때 두 남녀는 최대한 밀착하고 그 밀착조차 아쉬워한다. 더 붙을 수 없음을.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불행히도 난 내가 아무리 사랑해도 그녀가 날 한 번이라도 거절하면 나도 그녀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그것이 재차 발생될 수도 있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인지.... 쓸데없는 자존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어찌 됐든 난 그렇게 해 왔다.
젊었을 때는 더 그랬다. 심했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미온적이거나 미적거리면 주저 없이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다. 철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삭막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겐 밀당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던 모양이다.
인간에겐 타인의 육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외로움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다는걸 마흔이 넘어서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게 익숙하다면 가까운 절에 가야 하는 거고...
애무-입으로 하는 지배
"나는 힘을 주려고 하는데 그 사람 손이 무릎을 스치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다 빠져버려. 보통 때는 소리 내는 거 조금 쑥스러워하는데 그 사람 앞에선 하나도 안 부끄러운 거 있지. 맘껏 소리 낼 수 있어. 그런데 소리를 내면 낼수록 내 몸은 내 뜻대로 움직이질 않고, 좁은 호텔방인데도 드넓은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분이 드는 거야. 나, 남자 손가락을 그렇게 정신없이 빨아본 건 난생처음이었어."
요시다 슈이치 <악인> 중에서.
어떤 영역의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그렇듯이 그걸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그걸 평론하게 되는 것 같다. 음악을 못하는 사람이 음악을 평론하고, 문학을 못하는 사람이 문학을 평론하고, 미술을 못하는 사람이 미술을 평론하고, 섹스를 못하는 사람이 섹스를 평론하고. 요즘 이렇게 섹스에 대해 많이 얘기를 하는 것도 섹스를 못하거나 안 하기 때문에 한발 비켜서서 실컷 떠들어 댈 수 있게 된 것 같다.
여자보다 힘이 센 남자-대부분의 경우를 말한다. 정재형 같은 뮤지션 같은 경우는 예외로 하고-들이 여자한테 꼼짝 못 하게 되는 경우는 사실 애무를 당할 때뿐이다. 그 외의 상황에서는 대부분 짜증을 동반한 복종이다. 그러나 침대에선 본인도 모르게 자기보다 어리고, 힘없고, 조용하고 말없던 그녀에게 지배당할 수 있다. 부러질 것 같이 연약해 보였던 그녀의 손가락과 입술, 혀, 그리고 온몸으로 말이다.
지배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행복한 정복이고, 기꺼운 식민지 선언이다.
그녀의 손과 입술, 혀가 닿는 곳마다 항복을 선언하고 그녀의 영토임을 선언한다.
그녀의 작은 터치만으로 남자는 팔과 다리,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된다. 맘만 먹으면 여자의 몸 전체를 떠안고 삽입을 할 수 있는 남자가 여자의 애무에 저항하지 못한 채 노예가 된다. 애무의 힘이다.
타인의 신체를 빨거나 문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타이슨이나 수아레즈 같은 인간들에겐 흔할지 몰라도... 빨리거나 깨물리는 것도 정말 드문 일이다. 유아기 때나 부모와 친구들과 놀면서 깨물리거나 빨리거나 할 거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이다. 그래서 아이들 중엔 자기 손가락을 열심히 빠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구순기니 항문기니 하는 어려운 말은 제쳐두더라도 입술과 혀가 얼마나 민감한 감각 기관인지 우린 잊고 있다. 또 입술과 혀가 몸과 피부에 닿을 때 우리가 얼마나 진저리 치듯 쾌감을 느꼈는지 잊고 있다.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유전과 금광처럼 숨겨져 있는 성감대를 타인에게 발견되는 기쁨을 우린 잊고 있다. 정신 놓고 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살수록 우리에겐 몸으로 하는 즐거움은 잊히고 있다. 가끔 이성을 끄고 몸이 세상과 타인을 몸서리치게 느끼게 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일부러 북극곰 수영대회 같은 데 가서 온몸의 각성을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사랑하는 이의 손과 입술에 온전히 내 몸을 맡기는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우리에겐 "정신없이" 타인의 신체를 탐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난잡과 건전 사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어의 개념이나 정의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채 난사를 한다. 성에 관련 된 단어들은 더 그렇다. 그 영역이 워낙에 사적인 것이기도 하고 상대적이어서 이기도 할 것이다.
예전에 지인이 나에게 물었다. "최작가, 난잡과 건전의 기준이 뭐야?"
난 한참을 생각했다. 한참이라고 해봤자 그 지인이 삼겹살을 하나 건져 쌈을 싸서 입에 넣는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남자 셋이 술을 마시는 자리에선 제법 긴 침묵이었다. 셋 중 한 명이 쌈을 먹으면 둘은 대화를 하는 게 이 바닥의 룰이니까.
"글쎄. 결국 횟수보다 상대의 문제 아닐까? 예를 들어서 아침, 점심, 저녁, 밤참까지 하루 네 번 섹스하는 남자가 있어. 어때? 난잡해?"
"오..."
"근데 이 네 번을 한 여자랑 해. 그래도 난잡해?"
"오호. 아니지."
"근데 이 네 번을 다 다른 여자랑 하면?"
"오~ 하루에? 그건 난잡하지."
우린 이후에 하루 네 번 하는 남자, 실존하지도 않는 그 남자를 부러워하며 야한 얘기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