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야한 농담들 4
올 해의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저녁을 먹은 뒤, 조감독의 차를 얻어 탔다. 부산까지는 50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결국 남자 둘만 있으면 나오는 여자 이야기가 나왔다. 나이가 들어도 남자는 평생 애다. 얘기 끝에 조감독이 러시아 여자를 사귀었던 경험을 꺼냈다.
“그래 어때? 우리보다 크잖아?”
“맞습니다. 그냥 큰 게 아니라 골격 자체가, 뼈가 완전 다르던데요. 덩치도 있고.”
“그래? 그럼 별로였나?”
“아뇨, 전 좀 큰 사람이 좋습니다. 뭔가 이렇게 푹 안길 수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에? 정말?”
“작가님은 안 그렇습니까?”
“난 별로. 사실 우리가 이성을 끄고, 그야말로 진짜 수컷이 되고 암컷이 되는, 순수하게 야성을 뿜어내는 짐승이 되는 순간은 그때뿐이잖아?”
“그렇죠.”
“그때, 뭔가, 육식동물? 포식자 같은 기분이 들고 싶다고나 할까? 상대방의 육체와 정신을 한 입에 삼켜버리고 싶은 욕망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게 생기더라고 난. 그런데, 나보다 크면... 그게 좀...”
“아...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두운 차 안에서 한참을 취향에 관한 논쟁을 이어갔다.
취향은 연인과 같다. 만나기 전까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아무리 사랑을 꿈꿔도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지 않는 이상 사랑은 현실이 되지 않는다.
취향은 그보다 더 심하다. 막연하게 소문만 듣고, 겉만 보고 피하는 것과 알고 싫어하는 것엔 차이가 있다. 개불의 외형만 보고 먹지 않는 사람은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면, 당연히 호불호를 표현할 수 없다. 외국인이 번데기의 생김새만 보고 먹지 않는 것도, 냄새의 악명을 듣고 홍어를 안 먹는 것도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종의 선입견이다.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프레임이다. 좋고 나쁨은 경험 이후에 생기는 것이다.
물메기나 아귀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잡히면 버리던 물고기였다. 생김새가 워낙에 흉측해서이기도 하지만 어업의 대상어종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군가 이 생선으로 요리를 해 먹으면서 취향이라는 것이 생겼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누군가 무엇을 경험하기 전에는 그 무엇에 대한 취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뭐는 좋아하고 뭐는 싫어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첫 경험이 엉망이면 그 취향이 불호로 정착되는 경우도 있다. 홍어나 과메기 같은 건 잘하는 집에서 제대로 먹어야 그 맛의 진가를 알 수 있다. 마트나 홈쇼핑에서 파는 걸로는 그 맛을 다 알 수 없다. 또, 너무 평범한 것이어서 딱히 취향이라 말하기에도 민망한, 그러니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특별한 식당에서 먹고 난 후에는 인생의 음식이 될 수도 있다. 짬뽕, 김치찌개, 고등어조림, 심지어 백반조차 우리 마음속엔 그 식당의 서열이 매겨져 있지 않던가?
연인의 취향도, 섹스의 취향도 마찬가지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내가 어떤 스타일의 사람을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해보지 않은 체위를 좋아한다 싫어한다 말할 수 없다. 그러니 경험이 적은 사람은 취향이 존재할 수가 없다.
더 불행한 건, 그 취향이란 것이 없어도 우린 대체로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고급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글렌피딕 대신 캡틴큐를 마셔도, 화요를 모른 채 평범한 소주를 마셔도 우리는 잘 살 수 있다.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취향이란 애초에 삶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다. 그걸 몰라도 사는 데, 생존에 지장이 없다. 여름에 평양냉면을 먹든, 함흥냉면을 먹든, 밀면이나 비빔면을 먹든 사는데 지장이 없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것을 먹기 위해 만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고, 긴 줄의 맨 뒤에 서서 35도가 넘는 한낮의 더위를 견뎌낸다. 그것이 바로 취향이다.
일단 취향이 생기면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취향을 알게 되는 건, 역설적이지만 자신이 모르던 자신을 알게 되는 순간이기에, 그 순간 이후엔 과거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살아가게 된다. 좋은 차를 타던 사람이 연비 높은 경차를 좀처럼 다시 타지 않고, 평수 넓은 곳으로 이사 가 살던 사람이 평수가 좁은 곳으로 줄여 이사 가지 않는 것과 같다. 일단 경험하게 된 후 취향이 발견되면 과거의 나와는 결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취향이 달라서 헤어질 순 있지만 그 사람의 취향이 나와 다를 것 같다는 이유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의 내 취향이 이러니 내 취향과 맞는 사람을 꼭 만나겠다는 생각도 버려라. 젊으면 젊을수록, 아니 나이가 들어 점점 자신의 세계가 완고해지더라도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의 한계를 미리 진하게 그어놓고 살기엔, 인생은 너무 짧고 고달프다.
이십 대 때, 삼십 대 때 내 성적 취향은 이렇다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도 후배들 중에 자기 취향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체형이 어떻고 체위가 어떻고 장소가 어떻고 조명이 어떻고... 야동은 이런 장르가 좋다느니 하는...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다.
뒷글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거울 앞에서 섹스를 하기 전까지 거울의 환상을 알지 못했다. <아메리칸 싸이코>를 볼 때도, “저 놈 제대로 미쳤네.”하고 혀를 찼을 뿐이다. 그러나 우연히 거울 앞에서 경험을 한 뒤, 온 방의 벽을 거울로 할까 생각을 했을 정도가 됐다.
소리나 땀, 욕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해 여름의 그녀가 없었다면 땀과 땀이 섞여 만들어내는 소리와 그 소리를 뚫고 나오는 낯선 괴성, 험한 말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소리가 얼마나 날 흔들어 깨우는지 절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당신 맘대로 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여름밤 두꺼비집 내려가듯 이성이 "퍽" 하고 꺼지는 경험도 못 했을 것이고, 그 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경험한 만큼 자신을 알 수 있다. 공부든, 섹스든, 일이든, 인생이든. 그러니 더 이상 알 게 없다는, 더 이상 경험할 게 없다는, 00보다 좋은 건 세상에 없다는 같잖은 말은 하지 마라. 아직 모른다. 아직 몰라. 갈 때까지 가보지 않으면. 나도 아직 뭔가 남았는지도.
2022.12.28.
다들 연애 시절에 모텔 좀 들락거렸을 거다. 전 세계에 이렇게 효율적인 사적 공간 대여 시스템을 가진 나라는 일본과 한국뿐이다. 게다가 그 시스템 안에 테마와 콘셉트를 부여한 나라도 두 나라뿐이고.
딱히 두 나라가 불륜의 천국이거나 섹스의 선진국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두 나라의 젊은 청춘들이 사적인 공간을 렌트하거나 소유할만한 경제적, 사회적 시스템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딱딱한 얘기 하려고 한건 아니고... 이제 딴 걸 딱딱하게 할 만한 얘기를.
모텔 검색 사이트마다 테마방이라는 게 있다. 월풀, 노래방, 게임방, 복층식, 공주방, 거울방. 근데 연인들에게 모텔이 연애 액션의 공간이라는 걸 감안해보면 저런 테마가 뭔 소용 있나 싶다. 심지어 천장이 열리고, 당구장도 있는 곳도 있으니까. 그런데 딱 한 테마만큼은 그 효과를 인정하고 있다. 바로 거울방.
아내랑 연애할 때다. 당시 수도권에 살던 내가 아내가 있는 부산에 놀러 왔었다. 아내의 차에 실려 송정에 놀러 갔다. 경기도 촌놈에게 겨울 바다는 경이로운 풍경이니까. 저녁을 먹고 술을 한잔하고 송정 해변의 한 호텔로 들어갔다. 아내가 멋지게 체크인을 했다. 난 뭐 담담하게 뒤에 서 있었다. 체크인을 해주고 아내는 집에 들어갈 것 같았다. 성격상 손목을 잡아끌며 오늘밤은 나와 보내달라는 사정은 못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좋은 데서 혼자 자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나보다 앞서 엘리베이터를 탔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들어간 객실의 벽 테두리는 거울로 되어 있었다. 침대보다 30센티 정도 높게, 거울의 폭은 1미터 정도. 침대 위에서 정상위를 해도 후배위를 해도 커플의 전신이 보이는 절묘한 위치와 크기였다. 처음엔 당황했다. 하면서 깨달았다. 인간이 제일보고 싶어 하는 야동은 자기 자신이 나오는 야동이라는 것을. 몰래 찍힌 거는 빼고.
그래서 다들 그렇게 셀카를 찍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게 유출돼서 갖은 고초를 겪은 유명, 무명인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걸 찍는 건 나를 타자화 시켜 성적인 대상으로 볼 때 느끼는 흥분이 모르는 타자의 섹스를 볼 때 느끼는 흥분보다 훨씬 크기 때문일 것이다.
거울은 사진보다 더 자극적이다. 실시간으로 내 모습과 파트너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흥분이 되면서 동시에 그 흥분이 성적 도구인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 더 섹스를 잘하게 되고 몰입하게 만든다.
물론 남녀의 실체적 비주얼이 누가 봐도 환상적이라면 거울 효과는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웬만큼 추한 얼굴과 몸매가 아니라면 충분히 아름답다. 그러니 생태 박물관에 꿈쩍 않고 있는 박제처럼, 찍고 나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잊힐 보디 프로필 사진 찍겠다고 쓸데없이 쇠질을 하고 굶고 닭가슴살에 목메는 대신 살아 꿈틀대는 자신을 만나보라. 거울룸에서 환하게 불을 켜고 내 신체의 가장 아름답고 관능적인 순간의 목격자가 되어보시라.
요즘도 가끔 그 송정에 있던 호텔이 생각난다. 그래서일까? 안방의 벽 하나쯤은 거울로 도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기능이 떨어지니까... 점점 변태적 증세와 환상이 심해지는 걸까?
2014. 8.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