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친 중에 바디프로필 사진 전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사진작가가 있다. 덕분에 종종 완벽한 몸매의 사진들을 보곤 한다. 대부분은 트레이너들이지만 가끔 일반인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의 돈 쓰는 일 중,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 중 가장 무가치해 보이는 일이 바디 프로필을 찍는 것이다. 몸을 보여주는 직업이 아닌 사람, 몸을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갖지 않은 사람이 이런 사진을 찍는 건 여러모로 낭비일 뿐만 아니라 깊은 후유증까지 남긴다.
다들 관련 기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디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 살인적인 운동과 그보다 더 끔찍한 식이 조절을 한 끝에 사진을 찍고 나면 그 반동으로 상상할 수 없는 요요 현상에 시달린다는 기사를. 혁명보다 무서운 건 반혁명이다.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면 그 뒤의 보복은 혁명의 불길보다 잔혹하고 보수화는 혁명 이전보다 견고해진다.
실패한 혁명의 후유증
한 번의 섬광 같은 사진을 위해 가혹한 혁명의 채찍을 감수했던 신체는 그 섬광이 꺼지고 나면 보상을 요구한다. 몸이 견디는 동안 상했던 마음도 치유를 요구한다. 탄수화물과 단맛과 매운맛과 짠맛으로 달래도 달래어지지 않는다. 무한정 넣어준다. 한도는 없다. 그래도 보상은 완료되지 않고 위로는 지연된다.
신체는 저 사진 이전의 상태보다 더 망가진다. 급격히 줄었던 사이즈는 그전보다 더 늘어난다. SNS를 통한 자랑은 잠깐의 영광을 가져왔다. 마치 한 번의 전투에서 승리한 혁명군이 잠시 점령한 하잘 것 없는 읍사무소나 작은 시골 파출소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을 때 느끼는 승리의 희열과 같다.
그러나 이어지는 전투에서 승리가 반복되지 않고, 결국엔 혁명이 실패하면, 그래서 영구히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나”라는 신체를 정복하여 다스리는 것이 좌절되면, 저 빛나던 사진은 역사의 구석으로 밀려난다. 바디프로필 사진과 그것을 SNS에 올리는 것은 그렇게 허무한 일이다.
한 명이면 충분하다.
불특정 다수에게 나 자신을 보여주려는 욕망은 부질없다. 나 혼자 보고 넘어갈 사진을 찍는 건 더 쓸데없다. 보여주고 싶은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노출되는 신체는 아름다워진다. 아니 그 사람에게 아름다운 신체라 인정됐기에 노출하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아름다운 신체는 소중한 한 명의 관객을 얻는다. 단 한 명의 관음증 환자, 오직 내 신체만 보고 싶어 하는 단 한 명, 그 단 한 명에게 더 아름다운 신체이고 싶은 다른 한 명.
나에게 기꺼이 자신을 노출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경이로운 사실, 내 신체를 볼 때마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놀라움. 이로 인해 보는 사람과 보이는 신체는 1인분의 자신감을 얻는다. 1인분의 자신감은 겉으로 드러나 태도를 바꾼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말은 사실이다.
신체에 새겨진 이력
프로필은 이력이다. 프로파일링은 오늘 벌어진 사건의 흔적을 모아 과거의 그를 구성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오늘의 사건의 흔적은 과거의 이력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다. 신체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의 신체는 살아온 대로 형성된 것이다. 직업병도, 근골격계 질환도 결국엔 생계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 몸에 새겨진 프로필이다.
신체의 프로필은 유니폼이다. 사투리다. 버릇이고 태도다. 신체에 삶이 있다. 바디 프로필에 적합한 몸을 만드는 것은 결국 인위적 신체 수정이다. 삶으로 형성된 자신의 신체에 가하는 인위적 조작이다. 그것은 자기 삶의 부정이자 신체의 부정이다. 자기 배반이자 과거의 자기를 축출하려는 쿠데타다. 항구적 혁명으로 이어갈 자신이 없다면 바디 프로필은, 결국 나를 망치는 사건이 된다. 결국 자기부정의 후유증은 현재의 나에서 미래의 나로까지 이어진다.
이력을 기억하는 신체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말은 신체가 사랑으로 인해 변하기 때문이다. 신체는 움직임 속에서 바뀐다. 평범한 신체, 일하는 신체는 연인을 통해 사랑에 적합한 신체가 된다. 사랑을 한 적 없는 사람은 연인의 신체가 된 적 없는 사람이다. 그 신체엔 사랑의 이력이 없다. 영원한 초보자. 사랑을 했던 사람은, 그래서 다시 사랑을 하면 금세 사랑의 신체를 회복한다. 능숙한 신체를 만나면 능숙해진다.
운동하는 신체도 마찬가지다. 수영을 그만 둔지 십여 년 만에 다시 수영을 한 것이 지난 8월이었다. 혼자 설렁설렁한 것이 아니라 클래스에 등록해 강사의 프로그램에 따라 운동으로서의 수영을 다시 한 것이다. 한 달 만에 살이 3킬로그램 빠졌다. 허리와 뱃살이 줄었고 활배근이 넓어졌고 팔 운동을 따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팔 곳곳에 잔근육이 붙었다.
가을쯤엔 사이즈가 줄었다. 32인치 바지가 헐렁거렸다. 꼭 겨서 입기 민망했던 터틀넥이 잘 맞았다. 작다싶었던 숏사각 수영복은 이제 잘 맞는다. 아니 오히려 느슨해진 느낌이다. 배와 허벅지를 이어주는 장요근, 흔히들 말하는 치골의 깊이와 윤곽이 뚜렷해졌다. 엉덩이 위에 붙어 있던 굳은살도 없어졌다. <스위트홈>에서 이시영이 보여줬던, 엉덩이 바로 위의, 이름도 어려운 하후거근의 윤곽도 보인다. 수영복을 꽉 조이지 않으면 스타트나 턴 할 때 앞뒤로 물이 들어간다.
내 몸은 수영하는 신체를 기억하고 있었다. 3,4개월 만에 수영하는 신체로 돌아갔다. 유선형의 신체, 물살을 더 빨리, 더 잘, 더 부드럽게 가를 수 있는 신체를 만들었다. 몇 개월의 빡센 수영이 신체에 새겨졌다. 수영 동호인의 바디 프로필이다.
내 몸에 남겨진 타인의 흔적
그렇다. 신체엔 우리가 움직인 흔적이 남아있다. 타인의 손길이 남아 있다. 새것이 아닌 신체는 손을 타고 때를 타서 달라진다. 움직이고 쓰면서 달라진다. 그것은 분명 새것이 아니고(그럴 수도 없지만) 신체에 새겨진 흔적으로 인해 고유성을 획득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래서, 바디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 급격하게 몸에 가하는 인위적 충격은 자기부정이다.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살아온 삶을, 자기의 신체를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애정을 부정하는 것이다.
마르면 마른 대로, 뚱뚱하면 뚱뚱한 대로 당신은 당신이다. 그것이 당신의 신체에 새겨진 이력이다. 세상의 모든 회사가 당신이 낸 이력서를 보고 만족하여 당신을 채용할 필요가 없듯이 신체에 새겨진 이력 또한 한 사람에게만 받아들여지면 된다. 물론 여러 이유로 투 잡, 쓰리 잡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자신을 수용한, 자신이 선택한 직업과 직장에서 충분한 자본을 획득하지 못할 때, 자신의 삶에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할 때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가욋일이다.
사람이든, 일이든, 직장이든 매칭이 되면 된다. 당신이 원하는 이력이 새겨진 신체를 선택하고, 당신의 몸에 새겨진 이력을 선택하는 한 사람을 만나면 된다. 모두에게 전시되는 삶, 그래서 그 전시를 통해 자본을 획득한 삶,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 사람에게만 그 이력이 통하면 된다. 당신이 연예인, VJ, 치어리더, 레이싱 모델, 에로 배우, 포르노 배우, 누드모델이 아니라면 지금의 신체를 갖고 그냥 살면 된다. 당신의 이력에 딱 맞는 누군가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니까.
밑에 글은 보이는 신체와 신체에 새겨진 이력에 대한 이야기다.
2023. 0108
크리스챤 베일의 거울
<아메리칸 사이코>에는 워낙 충격적인 장면들이 많이 나와서 어느 한 장면을 꼽기 힘들지만 크리스챤 베일의 몸매와 주인공의 광기가 잘 드러나는 장면은 매춘부와의 섹스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크리스챤 베일은 후배위를 하면서 정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즐기고 있다. 나르시시즘의 절정이자 정수인 장면이다.
난 거의 평생 혼자 운동을 해 와서 헬스장에선 어떤 심리로 사람들이 운동을 하는지 이해 못 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헬스장에 거울이 많은 이유와 모텔에 거울이 많은 이유는 비슷했다. 아마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이 섹스를 하며 거울을 보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듯.
모텔마다 사방이 거울인 방이 있다. 예전에 한 모텔에서 이런 방을 한 경험이 있어서 파트너에게 권유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몸매가 좋은 사람이 그런 데서 해야 흥분이 되지 몸매 꽝인 아줌마가 그런 데서 하면 흥분될 것도 안 된다."라고 해서 포기했다.
거울의 목적 - 자기 대상화
사실 대부분의 젊은 커플이든, 불륜 커플이든 몸매가 모델 같지는 않다. 다들 평범하다. 팔다리가 짧고 배는 나왔다. 피부에 뭐가 많이 났거나 털이 많을 수도 있다. 그런데 모텔마다 거울이 많다. 그 이유는 뭘까?
섹스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쾌락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워낙 사적인지라 타인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타인이 있는데서 할 수도 없다(통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렇다고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을 수도 없다. 워낙 흉흉한 세상인지라 아무리 연인이라도 그걸 어떻게 할지, 어디 가서 보여줄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자랑할 수도, 보여줄 수도, 기록할 수도 없다면 나라도 기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 섹스를 대상화해야 한다. 즉 내가 예술의 행위자이자 감상자가 되는 것이다. 그건 관음증하곤 다르다. 일종의 자기 감상이자, 그로 인한 기억 저장이고 회상에 의한 만족이다. 그런 상황에서 파트너가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아름답다, 섹시하다와 같은 멘트를 날려주면 감상자는 둘로 늘어나고 그 예술작업은 공동 작업이 된다. 더 나은 작품을 보기 위해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내가 더 열심히, 자극적으로 할수록 나와 파트너는 더 나은 장면을 감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상을 반복하기 위해선 자주 하거나 기억력이 아주 좋아야만 할 것이다.
나를 보는 나 - 제3자의 시선
그런 맥락에서 가끔 야동 같은 데서 행위 자체를 누군가 관람할 때 흥분하는 설정을 할 때가 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 스스로가 보기에 멋지고 섹시한 것과 제 3자가 보고 멋지고 섹시하다고 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 흥분이 되고 잊지 못할 경험이다, 멋지다, 몸매 좋다고 칭찬하는 건 자화자찬하고 차원이 다른 칭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같이 정상(그 범위와 정의는 불명확하지만 통상적으로)적인 사람들이야 섹스에 관람객을 초빙하지 않는다. 그럴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그런데 아주 조심스럽게 상상해 보자. 당신과 아주 친한, 각별한 누군가를 섹스의 자리에 초대해서 약간의 음료수와 스낵을 제공하고 침대 맡의 소파에 앉게 한 후 당신의 연인과 섹스를 하는 것이다. 그때 그 관객이 체위가 바뀔 때마다, 격한 효과음들이 터져 나올 때마다 연신 감탄사와 격찬을 늘어놓고 점점 흥분해서 음료와 스낵을 까맣게 잊고 소파를 침대 쪽으로 끌어당겨 앉아 감상한다면 당신의 기분이 어떨까?
물론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상식은-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평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거울로 가득한 모텔에서 스스로를 관람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것 자체가 자신을 타자화해서 타인의 시선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쾌감과 스릴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텔마다 거울을 적게는 한쪽 벽에, 많게는 사방에 장식하는 것이다.
모텔은 구조적으로 그렇게 섹스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설계된 곳인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불륜이 더 쾌락적으로 다가오고 해석되는 것이다. 계산된 쾌락의 구조 안에서 섹스를 함으로써 그 쾌감이 증폭되어서. 일종의 착시이자 착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앎에도 불구하고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그런 델 가보는 게 좋다. 나이 들어서 살이 처지고 발기도 안 되는 커플이, 겨우겨우 세워도 행위 도중에 금방이라도 심정지를 일으킬 것 같이 헐떡이는 커플이 거울 앞에 있는 건. 상상만 해도 서글프고 안쓰러운 장면이니까.
2015. 8. 20.
손을 타야 결이 만들어지는 것들
어딘가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어느 누구도 검증되지 않은 신인에게 거액의 다년 계약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연애 상대로 경험 없는 여성, 또는 남성을 찾아 헤매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라고...
아이를 키우면서 많이 들은 말 중에 하나가 손을 탄다는 말이다. 아기가 울면 엄마들은 금방 안아 준다. 낮잠도 안아 재우고, 이동할 때도 안고 이동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는 손에서 내려오질 않고 늘 그렇게 해달라고 보채는 아이가 되어 버린다. 그게 손을 탄다는 말의 의미다.
그러나 사람은 평생 손을 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의 몸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손을 타야만 나오는 호르몬이 있고 에너지가 있다. 손을 타야만 변화가 비로소 시작되는 신체 부위들이 있다. 연인의 신체를 첼로에 비유해 연인의 몸을 만지는 것을 연주로 표현한 시도 있다. 첼로를 껴안듯 그렇게 꼭 안고 손길이 스칠 때에만 낼 수 있는 인간의 소리가 있다.
연인이 만든 결
그렇게 오래 한 사람의 손을 타다 보면 익숙한 결이 생긴다. 연인에게 내 살결의 고랑 하나하나를 고스란히 읽히고 나면 연인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 된다. 내 결들을 기억하는 농부, 고랑 하나하나의 깊이와 흐름을 알고 있는 농부. 가장 고음에서 가장 저음까지, 현의 팽팽함과 느슨함을 모두 알고 있는 연주자.
연인이 그 살결의 고랑을 파고들 때마다, 연인이 저음부에서 고음부로 막힘없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난 오로지 연인에게만 허락된 숨결을 내뱉는다. 오로지 그의 손길로만 경작된 새로운 육체로 탈바꿈한다.
경작지와 황무지
그래서 어느 누구의 손도 타지 않는 육체는 그야말로 나대지,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은, 어느 쪽이 남쪽인지도 정해지지 않은 불모지, 누군가의 손이 떠난 육체는 그야말로 버려진 땅, 어느 것도 심어지지 않은, 그 어떤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희망찬 기대가 소멸된 광야, 어디서부터 손을 대서 개간해야 할지 막막한 황무지다.
달리 생각해 보면 마치 농사가 그러듯이 누구도 경작해보지 않은 땅 같은 사람보다는 한 노련한 농부의 손길에 의해 그 고랑의 가지런한 흔적이 있는 땅 같은 사람이 연인으로서는 더 훌륭한 상대일지도. 누군가 그 땅을 썼던 용도가 내가 쓰려고 했던 용도와 맞아떨어진다면 그 땅을 수고스럽게 처음부터 개간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물론 이제 막 이십대로 접어든 청춘에겐, 모두들 미지의 땅일 수밖에 없는 청춘에겐, 그리고 모두가 이제 막 귀농한 도시 출신 농부처럼 서툴 수밖에 없는 농부 같이 연애에 서툰 청춘에겐 서로가 서로에게 처음인 땅이자, 첫 번째 농부이길 원하겠지만....
세월이 좀 지나서 사람의 결이 보이는 나이가 되면 사람의 멋과 매력은 사랑의 손길을 통해 만들어진 그 사람 고유의 결로 결정 된다는 걸 알게 되지 않을까. 그 손의 주인공들이 부모가 됐든, 친구가 됐든 또는 연인이 됐든 말이다. 그래서 그들 손에서 마음과 몸, 머리에 어떤 깊이와 방향으로 결이 나는지가 결정된다는 걸... 그것을 알게 되면 좋은 연인, 좋은 사람의 기준도 조금 변하고, 어쩌면 좀 느슨해지지 않을까.
그리고 귀뚜라미가 날개를 비벼 소리를 내는 것처럼 타인의 결과 내 결이 서로 부대끼며 세상에 전혀 없던 소리를 낸 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래서 좋은 소리를 내려면 결이 없는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내 결과 타인의 결의 홈이 잘 맞아 들어가야 함을 알게 되면, 그걸 알만한 그런 나이가 되면 결국 사람의 결을 찾아가는 그 과정과 시간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지도...
그리고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또 하나의 결을 인생에 새겨나가는 것임을 알게 되면 그 결을 새겨준 사람이 떠나가는 것에 대해 그렇게 미련을 갖게 되지 않을지도. 또 다른 연주자가 내 결을 연주하여 또 다른 부대낌을 만들어, 나 스스로도 몰랐던 새로운 소리를 찾아줄 테니. 그런 기대를 하면서 외로운 시간들을 묵묵히 버텨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