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시간과 중년의 시간 앞에서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1 - 프롤로그

by 최영훈

아빠도 딸도 5학년

딸은 이제 5학년이 됐다. 나도 쉰한 살이 됐다.

둘 다 5학년. 딸은 어린이에서 소녀로, 난 중년의 시기로 가고 있다.


딸은 소녀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더 큰 세상과 만날 준비도 하고 있다. 키는 150Cm가 넘었다. 발사이즈는 엄마보다 커졌다. 가슴도 살짝 솟아오른 모양이다. 엄마에게 얘기해서 작년 봄부터 패드가 있는 러닝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스포츠 브래지어와 비슷한 형태의 속옷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영어도 학교 수업과 방과 후 교실에서 열심히 배우고 공부하고 있다. 이젠 그림이 있는 책은 보지 않는다. 루리의 <긴긴밤>을 읽은 후부턴 서재에 꽂혀 있는 엄마가 읽었던 소설들을 읽고 있다. 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 이미예 작가의 <달러구트 꿈백화점>을 읽었다. 요즘엔 매트 헤이그 작가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손에 잡고 있는 것 같다.


아빠가 예전에 사놓은 시집도 꺼내 읽고 있다. 우선은 김용택 시인이나 류시화 시인이 좋은 시를 모아 놓은 모음집을 권해줬다.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서 거실 벽 한쪽에 만들어 놓은 작은 책꽂이에 이런 시집을 꽂아 줬다. 오며 가며 읽기 바라서다. 그 옆에 레이먼드 카버의 시집인 <우리 모두>와 박노해 시인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와 <노동의 새벽>, 그리고 나태주 시인의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도 말없이 꽂아 놨다. 손에 잡히면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보겠지.


조금 큰 마음, 아직은 애

이제는 아빠가 꾸중을 하거나 잘못을 지적해도 왈칵 눈물부터 쏟지 않는다. 조금은 참는다. 억울한 지적이 있으면 자기 의견을 말하기도 한다. 제법 단단해진 모양이다. 남자 애들이 놀리면 똑 부러지게 응수하고 바이올린 교실에서 어려운 곡을 만나도 좌절하지 않는다. 음악 줄넘기는 이제 고급 단계를 코앞에 두고 있다. 아주 어려운 동작 하나를 두 달 가까이하고 있다. 선생님은 조만간 고급으로 갈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덕질을 시작했다. 1학년 때부터 방송 댄스 교실에서 아이돌 춤을 따라 했지만 아이돌을 열렬히 좋아하기 시작한 건 4학년 들어서부터다. 재미있는 건 남자 아이돌이 아니라 여자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것. 이성적 호감이 아니라 닮고 싶은 선배를 발견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요즘엔 아이브에 푹 빠져 있다. 집에 CD 플레이어도 없는데 음반을 두 개나 사줬다. 연말에는 시즌 한정판 굿즈도 주문해 줬다. 춤도 따라 하고 유튜브 채널도 열심히 본다.


그래도 아직은 애다. 가끔 음식을 흘리고 가끔 엎지른다. 그러나 이젠 자기가 수습한다. 그래도 아직은 애다. 안아달라고 하고 잘 때는 옆에 누워 재워달라고 한다. 볼이나 이마에 뽀뽀를 해주면 “헤헤”하는 소리를 내며 좋아한다. 여전히 아침이면 아침 메뉴부터 고민하고 등교 준비를 할 때마다 함께 옷을 골라달라고 한다. 아직은 애다.


한정된 시간, 선택의 순간

아빠도 중년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여름부터 수영을 다시 시작했고 늦가을엔 마스터 A반으로 옮겼다. 수영장 오전 클래스 중에서 가장 속도가 빠르고 운동량이 많기로 악명이 자자한 열한 시 마스터 A반. 이들과 함께 운동하기 위해선 선택을 해야만 했다. 결국 술을 줄이고 맥주를 덜 마시고 있다.

나이를 먹으면 체력과 지력이 떨어진다.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는 없다. 결국 선택해야 한다. 시간도, 체력도, 지력(知力)도 마찬가지다. 밀려 있는 책은 많고 우리 팀의 일도 다행히 잘 풀리니 머리도 힘도 시간도 쪼개어 쓰는 수밖에 없다. 쓸데없는 짓은 최대한 안 하려고 노력하면서 말이다.


얼마 전 딸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친구와 영상통화를 한 시간을 했던 날이었다. 통화 내내 아이브의 포토 카드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 딸에게 말했다. “너,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지? 그때, 아빠가 뭐라고 했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지? 평범해지는 건 너무 쉽다고도 했지? 그냥 주변 친구들 하는 데로만 하고, 사는 데로만 살면 된다고 했었지?”, 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다 쓸데없는 짓을 해. 돈도 안 되는 그런 짓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 따지고 보면 아빠가 맥주를 마시는 것도, 돈을 써가면서 수영을 하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야. 한 푼의 돈도 벌어들이지 못하고 명성을 높여주지도 않아. 그냥 그게 재미가 있고 사는 데 활력이 되기 때문에 하는 거지. 그런데 그거 때문에 정말 해야 될 걸 소홀히 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토요일 오후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주산을 배운다. 수업이 끝난 후 백화점 영화관 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산 음료수를 백화점 옥상의 공원에서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리 부녀의 루틴이다.

뇌의 용량과 선택의 기로

음료수를 마시다가 전날 아빠가 했던 말이 생각났는지, 불쑥 딸이 물었다.

“아빠, 뇌의 용량이 백이면, 아빠는 어떤 게 차지하고 있어? 그러니까 관심 있는 거, 생각하는 거 말이야. 몇 퍼센트씩 차지하고 있는 거야?”

“아빠야, 뭐, 너랑 엄마가 한 90퍼센트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십 퍼센트는 책이나 글쓰기, 일 같은 거에 쓰는 거지.”

“그러면, 아빠는 내가 뇌를 어떻게 나눠 썼으면 좋겠어?”


이 질문에 길게 대답했다. “아빠는 네가 공부를 못해도 스트레스를 안 받으면 덕질을 하고 그걸로 친구랑 오래 통화하고 관련 유튜브를 보는 것도 괜찮아. 아빠는 네가 행복하고 건강하면 그걸로 만족하니까. 그런데, 넌 시험을 보면 항상 백 점을 맞고 싶고 성적도 반에서 1등을 하고 싶잖아. 원하는 성적이 안 나오면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면 그걸 잘하고 싶은 거잖아. 그럼 그걸 잘하기 위해선 거기에 시간을 투자해야지”하고 말했다.


계속 말을 이었다. “은채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건 시간 밖에 없어. 너나 아빠는 천재가 아니잖아.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읽고 많이 공부해야 돼. 아빠도 집에 있을 땐 그냥 술이나 마시고 TV나 보고 싶어. 그런데 글도 잘 쓰고 싶고 좋아하는 일도 더 오래 하고 싶으니까 책도 보고 글도 계속 쓰는 거야. 타고난 것이 없으면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


딸에게 물었다. “네가 덕질하는 것이 네가 원하는 성적을 내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그러니까 덕질과 공부를 함께 다 잘할 수 없다면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우선순위를 둬야 하지 않을까?” 딸은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협 불가능한 두 가지

“아빠가 요즘 술을 좀 줄였잖아. 그 이유가 뭔지 알아? 수영 때문이야.”, 앞서 말했듯이, 십 년 만에 다시 수영을 시작한 것이 지난여름이었다. 한두 달, 마스터 B반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의 여성들과 함께 운동하면서 수영 체력을 만들었다. 그러다 11월 중순쯤, 우리 반의 1번 주자 아저씨가 급한 수술 때문에 한 달 정도 운동을 쉬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마스터 A반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열한 시, 마스터 A반은 템포가 빠르고 운동량이 많기로 악명이 자자하다. 그 반의 1번 주자가 맨 끝에 오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바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이 반에서 버틸 수가 없어 할머니들과 운동하는 마스터 B반으로 내려가거나 시간을 바꾸곤 했다.


나도 처음엔 힘들었다. 그러다 결론을 내렸다. 내가 좋아하는 수영을 이렇게 열심히 하게 하는 사람들과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수영만큼 좋아하는 술을, 특히 맥주를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겨울에 접어들면서 주량을 줄였고 주종을 바꿔갔다. 또 수영하는 내내 힘들어도 쉬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 결과, 해가 바뀌고 나서는 꽤 괜찮은 3번, 또는 4번 주자가 됐다.


양자택일의 비정함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상호배타적일 때가 있다.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과 덕질의 마음은 시간과 돈을 사이에 두고 상호배타적이다. 딸에게 그랬다. 네가 덕질을 위해 사고 싶은 음반과 좋은 성적을 위해 사고 싶은 책이 있을 때, 돈이 많다면 다 사면된다. 그러나 용돈은 한정적이니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덕질에 들이는 시간이 많아져서 성적에 지장을 준다면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 또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둘 다 가능한 사람은 그래도 된다. 술을 마시고 싶을 만큼 마시면서 수영 체력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된다. 덕질을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친구와 몇 시간씩 영상 통화를 하고 짬이 날 때 공부를 해도 원하는 성적을 낼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된다. 그러나 난 그런 사람은 아니다. 돈도 시간도 체력도 뻔 한 사람이다. 어떤 건 표준 이하다. 그렇다면 선택을 해야 한다. 아껴 써야 한다. 딸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 그런 것이었다.


인생은 불공평하다

하고 싶은 걸 다 하며 사는 삶은 흔치 않다. 꿈을 꾸면 다 이뤄진다는 거짓말을 해주고 싶진 않다. 재능이나 집 안의 부유함의 정도가 우리의 출발선을 다르게 한다. 빌 게이츠가 말했듯이 인생은 불공평하다. 그나마 공평한 것이 있다면 시간 밖에 없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결정하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미래의 내가 어떤 모습이길 원하는지에 따라 오늘 하루의 시간의 씀씀이가 바뀐다.

딸은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한다. 1등이 하고 싶고 학생회장도 되고 싶고 유학도 하고 싶고 꽤 유능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천재인가? 체력이 엄청나게 좋은가? 뛰어난 외모를 갖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선택해야 한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한다.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만드는 건 나 밖에 없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쪼개어 쓰는 건 결국 나다.


딸에게 이런 냉혹한 삶의 진실을 말해준 며칠이었다. 어쩌면 추운 날 할 이야기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에게 배반당했을 때 느끼는 절망감에 비하면 요즘의 혹한은 따뜻한 축에 속한다. 그 배반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렇게 모진 말을 했다.


이렇게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작년부터다. 올해,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딸을 보며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의 아빠의 마음을 옮겨 보려 한다. 4학년, 한 해의 일상과 생각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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