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첫주, 여름 문턱
은채는 탈퇴 했습니다.
여자 친구들의 유력 사조직인 일명 6공주파(물론 이건 제가 붙여준 이름입니다. 자신들은 딱히 이름이 없었죠.)를 탈퇴했죠. 이 조직의 탄생의 기원엔 학기 초부터 단짝이었던 은채와 하영이가 있습니다. 기원이야 어찌됐든 두 세 명의 친한 친구들이 모임 비슷한 걸 만들었고, 열 명도 안 되는 여자 애들이다 보니 당연히 이 모임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애들이 생겼습니다. 재미있게도 아이들은 어떤 친구를 일원으로 받아들일지를 공개적인 거수투표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반대가 많으면 당연히 그 친구는 그 모임에 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다보니 친구들을 넙죽넙죽 받아주면서 여섯 명까지 늘어난 것이죠.
문제는 나머지 네 명의 친구였죠. 거부당하거나 가입 할 엄두도 못낸 친구 네 명.
은채는 이 모임의 시스템에 대해서 5월 말쯤에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내와 저는 제법 속으로 놀랐습니다. 고학년이나 되서야 이런 모임을 만들고 소위 왕따 같은 현상이 생길 줄 알았는데 벌써부터 이런가 싶어서 말이죠. 그러나 우린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못 들어온 친구는 좀 슬프지 않을까, 하고 은채에게 질문 했을 뿐이죠.
은채는 친구들이 모임에 들어오는 걸 승인하고 거부하는 그 과정이 상당히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느 날 집에 와서 그 모임을 탈퇴 했다고 했습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냥 다 같은 친구인데 누구랑은 놀고 누구랑은 안 놀고 그러는 게 좀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전부터 이 모임의 정체성은 은채 때문에 크게 흔들렸습니다. 은채가 모임 밖 친구들과도 열심히 놀았으니까요. 게다가 선생님이 모둠의 구성원을 수시로 바꾸면서 안 놀던 친구와도 놀게 될 수밖에 없으니 모임의 폐쇄성이 유지될 수가 없었죠. 흐지부지 됐던 모임은 결국 자연스럽게 해산 됐습니다. 발대식도 없었으니 따로 해산식 같은 것도 없었겠죠. 그냥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마침 하영이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모임의 또 다른 구심점이 없어지는 바람에 해산이 가속화 됐겠죠.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왕따 문제와 성 관련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아들 둔 부모든, 딸을 둔 부모든 그야말로 노심초사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다는 것이죠. 저랑 함께 일하는 감독은 딸이 중학생인데 소위 잘 나가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한숨을 쉬곤 합니다. 아내의 친구 딸도 중학생인데 이 친구의 목표는 일진이 돼서 후배들이 자기가 나타나면 눈을 깔고 90도로 인사하는 것이라고 해서 엄마가 마음고생을 아주 오래했죠. 뉴스로만 보던 문제들이 이제 남일 같지 않습니다. 왕따, 학교 폭력, 이성 문제 등등. 딸이 학생이 되고 제가 학부모가 되니 이제 조만간 닥칠, 그리고 헤쳐 나가야 할 내 문제로 인식됩니다.
돌아보면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는 심플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다녔던 중학교는 그 지역에서 아주 거칠기로 소문난 학교였지만 그 거친 친구들이 누굴 괴롭히는 걸 본적은 없습니다. 불량 써클 친구들은 그들의 세계가 있었고, 운동 좋아하는 친구들은 그 친구들의 세계, 저 같이 문학 소년은 우리만의 세계,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그들만의 세계가 따로 존재했죠. 그래서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듣고 함께 운동하고 얘기는 하지만 그 각각의 세계는 침범해서도, 침범할 수도, 침범할 필요도 없는 세계였습니다. 물론 하굣길에 소위 삥을 뜯기기는 했지만 대부분 모르는 친구들- 다른 학교 친구들이거나 이미 학교를 그만둔 선배나 친구들-에게 당했지 얼굴을 아는 친구들에게 당한적은 없습니다. 싸움을 해도 비슷한 애들끼리 싸움을 했지 불량 써클 친구와 농구 팀 친구가 싸움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반에 20명 정도 되는 학교생활에서 몇 명이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와 다른 세계의 구성원들 간에 그 영역을 상호간 인정해주고 다른 세상 놈들이라고 아예 모른 척하는 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화장을 하고 다니는 애들과 안 하는 애들, 공부를 하는 애들과 안하는 애들, 잘 노는 애들과 안 노는 애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아이들의 세상이 나눠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때처럼 어중간하게 중간에 머무는 “보통의 아이들”로 남는 건 불가능해진 것이죠. 주도하고 싶은 애들이 있으면 끌려가는 애들이 있어야 하고, 지배하려는 애들이 있으면 지배당하는 애들이 있어야 하니까요.
은채도 어쩌면 어느 순간, 넌 어느 쪽이냐고 질문을 받고 입장 정리를 하라고 친구들로부터 압박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요즘의 은채처럼 그냥 우린 다 같은 친구야,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 용기를 내서 스무 명 안팎의 작은 세계를 다시 잘게 쪼개서 위계가 만들어지고, 파벌이 만들어지는 걸 막아 낼 수 있을까요? 아니 최소한 그런 현상과 상관없이 자신의 세계를 지켜 나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