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구는 못 말려”의 극장판 제목이다. 올 1월의 어느 아침에 딸이랑 TV를 보는 데 이 광고가 나왔다. 난 무심결에, "얼추 네 명이 뭐야. 네 명 정도는 셀 수 있는데."하고 말했다. 그러자 딸이 옆에서, "아니, 그게 아니라 대충 용사 같아 보이는 네 명을 얘기하는 거 아닐까?"하고 답했다.
그러니까, 우리 부녀의 논쟁의 핵심은 저 얼추라는 부사가 어떤 명사를 꾸미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얼추는 "대충", "어떤 기준에 가깝게"의 의미로 쓰인다. 그러니까 누군가 "지금 방에 몇 명 있어요?"하고 물었을 때, 안을 슬쩍 보고 "얼추 열몇 명 되겠는데."하고 답할 때 쓰거나, 어딘가로 지루한 드라이브를 할 때 조수석의 눈치 없는 인간이 "다 왔어?"하고 물으면, "얼추 다 왔어."하고 답할 때 쓸 수 있다.
자, 그러면 관건은 저 얼추가 네 명을 꾸미느냐, 용사들을 꾸미느냐이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가. 내 주장은 네 명은 구분 가능한데 왜 네 명 앞에 쓸데없이 얼추를 붙였냐는 것이었다. 딸은 용사라고 하기엔 덜 떨어진 사람들이 용사랍시고 나섰으니 얼추 용사라고 불러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말이다. 실제로 만화 내용이 한 사람의 구실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네 명이 모여 용사 노릇을 하는 것이라면 이 얼추는 딸이 생각한 방향으로, 제대로 쓰인 것이다. 그러나 만화 내용이 그렇지 않다면 얼추는 잘 못 쓰인 것이다.
아, 경우의 수가 하나 더 있다. 네 명 중 한 명은 사람이 아닌 경우다. 예를 들어 흰둥이가 전사 노릇을 할 경우엔 네 명이라 부를 수는 없으니 얼추라고 써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람 세 명과 개 한 마리가 대략 네 명 몫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다음 날이던가. 퇴근길 동해선에서 책을 읽다가 이와 비슷한 움찔함을 겪었다. 테드 휴즈의 <오늘부터 詩作>에 나온 문장이다. "그런데 제가 그를 정말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얼핏 보면 별 문제없다. 그런데 난 순간 "‘정말’이 ‘그를’ 앞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저 위치가 맞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니까 만약 정말이 그를 앞에 있다면 이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한 인물의 진면목을 느꼈다는 의미로 쓰일 수 있다. 아마도 정말이 생생하게 앞에 쓰인 건 생생함의 정도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전에도 느꼈다고 여긴 적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야말로 정말 생생하게 느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카피는 창작이 아니다.
부산의 한 대학에서 카피라이팅을 한 십여 년 강의했었다. 그때, 카피를 쓰는 건 결코 창작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이런 내 말을 처음 듣는 학생들은 이 양반이 뭔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어이 아저씨, 우리는 이 대학에서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이야.’라고 따져 묻는 눈빛도 던진다. 그러면 내 의견을 부연한다.
시와 소설은 이해받지 않아도 된다.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된다. 같은 영상이어도 영화는 난해하거나 예술 영화이어도 된다. 천만 관객이 들지 않아도, 도대체 뭔 소리인지 알 수 없어도 된다. 예술과 문학은 그래도 된다. 그러나 카피는 그러면 안 된다. CF는 그러면 안 된다. 광고는 기업의 입장에선 생계가 달린 문제고 소비자 입장에선 제품 선택의 문제가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광고홍보학과 1학년 때 가장 많이들은 말이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하라는 것이었다. 조사론을 배워야만 하는 이유, 통계학을 배워야 하는 타당함이 여기에 있다.
광고의 말은 일상에서 나온다. 오늘을 사는 사람 곁에서 나온다. 그래서 모든 광고는 말은 건네는 대상이 있다. 하나의 광고가 나에게 이해가 안 간다면 그 광고는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하나의 광고가 당신에게 이해되지 않길 바라는 마케터나 카피라이터도 있을 수 있다. 아니, 당신이 이해하면 화를 낼 수도 있다. 광고가 실패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니 어느 광고를 이해 못 하겠거들랑 나한테 말 거는 게 아닌가 보다 하고 웃어넘겨라.
일단 써라
자, 잠시 이야기가 멀리 갔다. 결국 카피라이팅 시간에 학생들에 요구한 건 일단 쓰라는 것이었다. 제품이 소비자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소비자는 그 제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지 그 삶과 사회를 한참 들여다보고 거기서 떠오르는 사실과 감정들을 쏟아내라고 했다.
완벽한 카피나 문장 따위를 쓰겠다고 마감 시간이 다가오는데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지 말고 최대한 많이, 빨리 쏟아내라고 했다. 그래서 기말 시험도 라디오 카피를 세 시간 안에 써내는 걸 문제로 냈다. 매년 같은 문제를 냈지만 단 한 번도 학생들이 이 문제를 반기는 걸 본 적이 없다. 이 문제엔 소위 선배가 후배에게 물려줄 만한 족보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카피는 쓰기보다 고르기에 가깝다. 시대와 소비자와 제품이 공유하고 있는 단어와 정경, 일상을 찾아 적절히 배치하는 것에 가깝다. 세상일에 도통 관심 없고 뉴스를 보지 않는 카피라이터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도 그렇게 카피를 썼다. 최대한 빨리, 많이 쓴 다음에 그중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을 더 오래 했다. 쓰는 시간보다 글을 보고 골라내고 잘라내는 작업에 더 오랜 시간을 들였다.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카피라이터는 말을 골라 배열하는 사람이다. 카피라이터는 쓰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떠도는 말을 잡아 효과적으로 배열하는 사람이다. 내 카피라이팅의 철학이다. 다른 이가 아니라고 해도 별 수 없다. 어찌 됐든 난 이런 철학으로 카피라이터로 20여 년을 먹고살았다. 그렇게 나온 광고는 일을 한다. 내 이름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이름으로, 제품의 이름으로, 시장에서 일을 한다. 소비자의 마음에서 일을 하고 대중 속에서, 미디어에서 일을 한다. 그 일을 지켜보는 재미가 의외로 크다.
딸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이런 재미를 누리며 십오 년쯤 살았을 때 딸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한글을 가르치면서 인간이 글을 읽고 쓰는 환희는 그 어떤 기쁨과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 기쁨임을 알게 됐다. 딸은, 당연히, 말을 먼저 했다. 아빠를 가장 먼저 했고, 그다음 엄마를 했다. 눈앞에 있는 사물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면, 당연하게도 아빠와 엄마에게 물었다.
음식과 꽃의 이름, 옷의 이름, 친구의 이름을 알아갔다. 글을 배우자 주변 사물과 곤충, 동물, 교통수단, 사람의 호칭과 지하철 역 이름과 내부의 각종 광고와 안내문구들을 읽기 시작했고, 그 이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행위가 한 인간의 자긍심과 자존감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도 이때 알았다. 딸은 친구들에게도 글을 알려줬고 받아쓰기를 통해서 일종의 효능감을 얻었다. 그건 일종의 주체의 자리매김 같은 것이었다.
언어의 습득, 세계의 확장
학교에 들어가서 일기를 쓰는 딸을 보면서 다른 걸 알았다. 완전한 구조로 하나의 문장과 그 문장을 덧이어 하나의 문단을, 그 문단을 포개어 하나의 글을 완성하는 것이 큰 즐거움임을 말이다. 미셸 푸코가 어딘가에서 말했듯이, 글을 쓰는 일이 행복하거나 즐겁지 않아도, 그것이 인생에 행복감을 준다면 글을 쓰는 것이 설령 고통스러워도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딸이 딱 그랬다. 일기를 쓰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지만 이리저리 궁리해서 한 편의 완벽하고, 누구보다 긴 일기를 써내어 아빠에게 들이밀 때, 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득의양양해 보였다.
4학년인 딸은 이제 영어를 읽고 쓰고 말한다. 얼마 전 백화점에 가서 음료수를 마시다가 소화전에 쓰인 영어 안내 문구를 무심히 읽고 있는 딸을 보며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단어를 모르고, 뜻을 몰라도 알파벳의 소리를 추적하여 단어의 소리를 유추하여 읽어냈다. 한 인간의 세계는 이렇게 별안간 확장되어 버리는구나 싶었다.
딸의 한글 실력은 이제, 저런 사소한 만화 영화 제목 하나 갖고도 아빠와 아주 진지한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어떤 책을 읽으며 그 세계에 흠뻑 빠져 있다가 다시 나와 그 책의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할 만큼 성장했다. 뉴스 속 정치인의 말을 듣고 그 행간의 미묘함을 눈치채어 그 진정한 속내가 무엇인지 아빠에게 물어볼 정도가 됐다. 그 때문인지, 자신의 글을 쓰는 데 있어서도 더 공을 들이고, 더 나은 단어를 찾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무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있다.
읽고 쓰는 인간이 누리는 행복
두 해전, 인터넷 언론사를 운영하는 대학원 동기에게 칼럼을 써보라는 의뢰를 받고 내 이름으로 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제 겨우 글을 쓰는 행위의 쾌감을 알아가고 있다. 내 이름으로 글을 쓰는 일의 엄중함과 곤란함을 알아가고 있다. 하나의 단어가 들어갈 곳에 들어가 있는지, 내 생각의 조각이 이 단어의 조각에 들어맞는지 따져보는 괴로움을 겪고 있다. 그것은 분명 괴로움이고 고통이고 더 나아가 돈을 버는 일종의 노동임에 분명한데 즐겁다. 쓰는 인간이 누리는 행복이 뭔지, 아빠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4학년 내내, 딸이 읽는 책의 두께는 조금씩 두꺼워졌다. 요즘엔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고 있다. 판타지와 담을 쌓고 사는 아빠와는 취향이 다르다. 이런 아빠에게 툭하면 이상한 주문을 걸곤 한다. 아빠에겐 안 통한다는 걸 알면서도, 차라리 요상한 댄스가 아빠를 웃음 짓게 하는데 훨씬 효과가 크다는 걸 알면서도 심심하면 길고 긴 주문을 건다. 이런 주문을 들을 때마다 딸과 내가 같은 책을 읽고 치열하게 토론을 벌일 날도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그날이 올 때까지 내 글이, 내 지성이 둔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