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6
딸은 방학 때도, 일주일에 두 번 수 금, 오전 열한 시, 학교 방과 후 교실에 가서 바이올린을 배운다. 1학년 때부터 그랬다. 애초에 수강신청 기간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방학 때도 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나라면 방학 때는 가기 싫을 것도 같은데 꾸역꾸역 잘도 간다. 1학년 때 쓰던 바이올린은 그나마 손에 간단히 들 만한 사이즈였는데 덩치가 커지면서 3/4 사이즈로 악기를 바꿨더니 제법 큼직해졌다. 대부분은 내가 들어주지만 종종 자기가 들고, 등에 메고 간다. 이 바이올린은 내 평생 집에 들여놓은 가장 비싼 악기다. 무슨 스트라디 어쩌고 같은 비싼 건 아니고, 그냥 3/4 바이올린 중에서 쓸 만한 거로 추천받았다. 원래 쓰고 있던 악기는 돌봄 교실 선생님이 딸이 쓰던 걸 그냥 주셨다.
사실 바이올린 선생님이 악기를 바꿀 때가 됐다고 말씀하셨다는 딸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사주는 걸 망설였다. 어차피 취미로 하는 건데 악기까지 바꿔가며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선생님한테 물어서 괜찮은 악기점과 악기를 추천받았다. 나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바이올린으로 먹고살건 아니어도 나름 빠지지 않고 성실히 수업에 참여하고 연습해 온 시간들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취미로, 그것도 방과 후 교실에서 하는 애들은 대체로 한 두 학기 하다가 그만둔다. 설령 꾸준히 나오는 아이라도 열정엔 차이가 있다. 그 열정의 차이는 진도의 차이를 만들고 같이 시작한 사이여도 수준의 간격을 만든다. 딸이 바이올린을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방과 후 교실 신청 기간 때마다 바이올린을 신청하는 거 보면 뭔가 재미를 느끼긴 느끼는 모양이다.
올 1월, 겨울방학 때도 딸은 방과 후 교실에 열심히 갔다.
"아빠, 선생님이 자꾸 눈치 주셔."
"응, 왜?"
"아니 선생님이 다섯 번 연습하라고 하셔서 다섯 번하고 성유랑 놀고 있었거든. 그런데 자꾸 흘깃거리면서 나를 보시는 거야."
"은채야. 네가 음악 하는 사람들을 잘 몰라서 그래. 아빠가 겪은 사람 중에서 가장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음악 하는 사람, 그중에서도 클래식, 그중에서도 악기 하는 사람들이야."
"진짜? 아빠가 어떻게 알아."
"아빠 대학 다닐 때 기숙사에 4년 살았잖아. 거기 음대 애들도 많았고, 아빠 친구들 중에 음대 애들도 몇 명 있었어. 경험상, 음악 하는 사람들은 조금만 더 하면 잘할 것 같은 사람한테만 잔소리를 하고 눈치를 줘. 맨 날 연습 시간에 놀고, 열의도 없고 그런 애들한텐 선생님이 잔소리도 안 하고, 눈치도 안 주지?"
"응."
"그러니까... 선생님은 네가 좀만 더 열심히 했으면 하길 바라시나 보다."
"아... 나 진짜 열심히 한다고. 오늘도 가자마자 옷 걸고, 바이올린 꺼내고 연습했다고."
"후후, 선생님이 너에 대한 기대치가 높으신가 보다."
이날만 투덜거린 건 아니었다. 바이올린 방과 후 교실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선생님이 좀 더 열심히 하길 바라신다고, 눈치 주고, 더 완벽하게 연주하길 바라신다고 투덜댄다. 제 깐에는 나름 열심히, 그것도 다른 친구들이나 선후배들보다 집중해서 하는데 왜 그러시는지 이해가 안 가나 보다. 그래서 결국 저렇게 격려 아닌 위로, 위로 아닌 격려를 해준다.
대학 때를 돌아보면 음대 친구들은 자기 관리에도 철두철미했고 연습도 철저했다. 대학 2학년 때 같이 방을 쓰던 방졸은 바리톤 전공의 신입생이었는데 탄산음료나 녹차 같은 것도 안 마셨던 걸로 기억된다. 게다가 성악곡들의 국적이 다양한 만큼 익숙해져야 할 언어도 많았기에 이런저런 언어를 익히는데 애를 먹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악기 하는 친구들은 기숙사에 오래 못 있었는데 악기 놓을 만한 곳이 없어서이었기도 했지만 마땅히 연습을 할 만한 공간이 없어서이기도 할 거다.
최근에 은채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알게 된 것이지만 작은 바이올린에서 나는 소리도 집 밖을 넘어간다. 그러니 설령 기숙사에 연습 공간이 있다 하더라도 연습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대학 시절 기숙사처럼 수십 년 된 낡은 건물이라면 방음은 기대할 수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걔 중엔 나처럼 4년 내내 기숙사에 있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국악과에서 대금을 전공하던 장사익 선생의 장남도 아마 그중 한명일 것이다. 기숙사 행사 때면 종종 그 친구의 대금 연주를 듣고 했으니 말이다. 대금 소린 그렇게 크지 않았었나?
어찌 됐든 살면서 이런저런 음악 하는 사람들을 만나본 결과 그 양반들만큼 예민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없다. 미술도 입시 때는 그런 것이 있지만 음악은 학창 생활과 커리어 내내 소화해야만 하는 곡, 해내야만 하는 연주라는 게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음대에 들어간 성악과 학생이라면 모두 불러야만 하는 곡이 있고, 기악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몇 곡만 시켜보면 상대방의 실력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음악가들은, 의외로 냉정하다. 답이 없다 싶으면 말도 안 한다. 어느 수준이 다다라야 레슨이 시작된다. 너무 백일하에 드러나니 선생도 학생도 그야말로 민낯이다.
은채가 바이올린을 배운다고 했을 때, 내가 기대했던 건 반복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이었다. 한번 할 때보다, 두 번, 두 번 보다 네 번. 연습하면 할수록 기술이 늘고 잘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체득하길 바랐다. 같은 맥락에서 3학년 때부터는 농구도 가르쳤다.
바이올린 선생님은 어떤 애들-은채 친구 하나는 이 날도 안 왔다-은 수시로 빠지고, 오더라도 대부분의 애들이 놀고 떠들고 시키는 것만 달랑하고 끝나면 짐 싸서 나가기 바쁜 느슨한 방과 후 시간에 묵묵히, 끈덕지게 삼 년을 하고 있는, 더우나 추우나 꾸역꾸역 오는 은채에게 뭔가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왠지 이해가 갔다. 딸도 선생님의 그 마음을 알았으면 해서 선생님을 대신해서, 지난 3년 동안 틈나는 대로 저런 위로의 대화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딸이 내가 대학 시절 좋아했던 바네사 메이-요즘 친구들은 모를지도-나 미샤 마이스키 같은 연주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그야말로 눈곱만큼도 없다. 딸에게 늘 하는 얘기지만 셜록 홈스처럼 음악이 일상의 위로가 되고 아이디어의 원천이 될 정도로 연주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아빠는 연습을 꾸준히 할 만큼 성실하지 못해서 기타나 베이스 같은 악기도 어느 정도 수준에서 만족하고, 서른 이후로는 음악도 때려치웠지만 은채는 성실한 음악 애호가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그렇다. 솔직히 성실하고는 거리가 있다. 그럭저럭 꾸준히 하고 꾸역꾸역 밀고 나가는 에너지는 있는데 예습 복습하고 밤을 새워 공부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저 해야 될 걸 하고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걸 더 좋아하고 잘하기 위해 애쓰는 정도다.
그나마 성실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생긴 건 카피라이터가 되고 나서부터였다. 부산에 와서 운명처럼 만난 일이 카피라이터 일이었고 회사는 당시 부산에서 제일 잘 나가던 회사였다. 부산에 본사를 두고 마산, 대구, 서울에 지사를 둔 회사였다. 내가 일하던 부산 본사에만 영업과 기획을 주로 하는 AE들이 열댓 명이 넘었고 키 촬영을 할 수 있는 파란 벽을 갖고 있는 촬영 스튜디오와 라디오 광고를 녹음할 수 있는 녹음실, 영상편집실을 비롯한 모든 촬영 장비가 완비된 광고 대행 및 제작 회사였다.
문제는 사장이 부산 업계 전반에 소문이 자자한 양반인지라 이직률이 심하다는 거였다. 때문에 내가 들어갔을 땐 요즘 말로 사수, 그러니까 선배 카피라이터가 없었다. 사장은 내가 학부에서 광고홍보, 석사는 신문방송을 전공했다는 거에 혹해 어떻게든 카피를 뽑아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덜컥 나를 뽑았고, 난 그 속도 모르고 출근을 했던 것이다.
막막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20초 라디오 카피에 몇 글자가 들어가는지, 10분짜리-당시에는 러닝타임이 15분이 되는 홍보영상도 흔했다. 지금 우리 팀은 3분 이내가 이상적이라고 고객에게 소개하고 있다-홍보 영상 시나리오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TV CF의 카피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야말로 글로만 배웠던 터라 모든 것이 막연했다. 그래도 해야 했다. 카피라이터. 이 명함을 받아 들었고 뺏기고 싶지 않았다.
온갖 노력을 다 했다. 당시에는 광고 심의서-우리나라의 경우, 광고는 사전심의 제다-를 출력해서 갖고 있던 시기였기에 선배들이 써 놨던 카피를 볼 수 있었다. 그걸 쌓아 놓고 봤다. 광고와 카피에 관한 책을 사들여 읽었고 마케팅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 싶어 당시 유행하는 마케팅과 트렌드에 관한 책은 섭렵했다. 2002년 월드컵 직후의 일이다. 그렇게 이십 년이 훅 지나갔다.
이 날 오후, 딸하고 집 근처 중고서점에 갔다 왔다. 지는 살 게 없었는데 그 옆에 아트박스에 마음이 있어 따라나섰다. 그렇게 책을 사고, 지가 맘에 들어했던 다꾸세트(다이어리 꾸미기 세트)는 생일 선물(2월)로 사주기로 약속했다. 오는 길엔 슈퍼에 들러 맥주와 딸이 마실 음료수를 샀다. 집에 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은채야. 아빠가 산 책들이 뭐에 관한 책인 줄 알아?"
"뭔데?"
"다 문장에 관한 책이야. 그러니까 글 잘 쓰기 위한 책."
"응? 왜? 아빠는 잘 쓰는 거 아냐?"
"아... 뭐... 그럭저럭. 근데 아빠 이름으로 글 쓴 지 이제 겨우 일 년 반 정도 됐잖아. 그런데 아빠 글을 누가 읽는지 아빠는 전혀 몰라. 칼럼이나 브런치도 다 인터넷에 올리고 읽으니까. 그래도 어찌 됐든 꾸준히 아빠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뭐랄까... 야, 이 사람 글이 좀 나아지는구나... 뭐 이런 기분을 들게 해주고 싶다고나 할까? 뭐 일종의 고객 만족? 애프터서비스? 업그레이드? 뭐 그런 거지."
"아~"
이런 생각으로 올 초에는 글쓰기엔 관한 책을 몰아서 읽었다. 순서가 뒤바뀐 셈이다. 대학원 동기의 칼럼을 써보라는 권유를 얼씨구나 좋다 하고 덥석 받아들인 것이 딱 2년 전 5월이었다. 동기는 온라인 경제 저널을 운영하고 있었다. 대체로 경제 신문 및 TV와 같은 한국 경제 언론사의 논지는 보수적이다. 이 저널도 예외는 아니다. 시장 경제와 규제 완화, 정부 간섭의 최소화를 기조로 딱딱한 기사와 논평들이 주를 이뤘다.
동기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주제와 소재, 방향을 내 쪽에서 말했고 저 쪽에선 편수와 분량, 마감일과 게재 일을 정했다. 얼마나 오래 할지, 할 수 있을지 감도 없었다. 일단 써지는 데까지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칼럼 연재 몇 년 전부터 페이스북을 시작했고 칼럼 연재, 그 몇 개월 뒤 브런치를 시작했다.
그렇게 내 이름으로 여기저기 글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지 일 년 반이 넘어가던 올해 초 불쑥 내 글을 열심히 읽고 있는 몇 사람들이 생각났다. 만나 적은 없지만 분명 내 열독자였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보다 소수의 열독자가 신경 쓰였다. 그들은 내 글의 추이를 간파하고 있을 터였다. 분명 잘 쓴 글과 못 쓴 글을 가려낼 것이었다. 내가 발전하고 있는지 정체되어 있는지, 아니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지도 판가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무서워졌다. 매번 정해진 광고주와 광고주의 고객을 설득하는 글만 쓰던 나였다. 처음 칼럼 제안을 받아들이고 원고료를 들었을 땐 그저 책값이나 벌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책을 읽어서 뭐에 쓰려고 하냐는 아내의 타박에 칼럼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핑계가 생겨서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무심히 해와 달을 무수히 보낸 뒤에 처음으로 순수하게 내 글을 좋아해 주는 몇 사람의 무게를 실감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좀 체계적으로 글쓰기를 공부해 보자. 그런 다짐을 정초에 하고 글쓰기와 관련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수열 선생의 <우리말 바로 쓰기>와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 쓰기>부터 시작했다. 이어서 평소 좋아하는 고종석 선생의 <고종석의 문장>과 테드 휴즈의 <오늘부터 詩作>으로 넘어갔고, 뉴저널리즘의 기수인 존 맥피의 <네 번째 원고>와 <두려움 가득한 작업실에서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 더 패치>, 스탠리 피시의 <문장의 일>, 김정선 작가의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와 <동사의 맛>, 나카무라 구니오의 <하루키는 이렇게 쓴다.>로 나아갔다.
논픽션 쓰기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마크 크레이머와 웬디 콜이 엮은 <하버드 니먼 재단의 논픽션 글쓰기 가이드 : 진짜 이야기를 쓰다.>와 피터 엘보의 <힘 있는 글쓰기>를 읽으며 내 글쓰기 방법이 그렇게 이상한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우치다 타츠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를 읽고 나서 일단 정초에 시작된 대장정의 1막을 끝냈다.
그 후부터 월별로 테마와 작가를 정해 놓고 책을 읽기로 하고 스케줄을 짰다. 예전처럼 중구난방으로 읽어서는 책을 다 소화 못할 것 같았고 글쓰기의 체계 잡기와 업그레이드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때마침 작년 겨울에 동해선이 완전 개통된 덕분에 주로 화요일에 가는 울산 작업실로의 110분 출퇴근 시간을 꼼짝없이 독서 시간에 쓸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했다.
그렇게 아빠는 쉰이 넘어서야 자기 글에 대한 무게감을 느끼고 성실함을 향해 한걸음 내디뎠기에 딸에겐 좀 더 일찍 성실을 가르치고 싶었다. 키워보니 머리도 좋고 신체도 건강하고 운동신경도 좋은 아이다. 내 자식이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타고난 것이 많은 사람이 성실하게 노력하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원하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돈이나 명예, 권력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더 잘하게 되면 그 일을 더 좋아하게 된다. 자기가 사랑하는 일에 일가를 이루고 경지에 다다르면 세상의 존경과 명성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원하지 않아도 중요한 자리에 불려 다니고 그 일에 필요한 사람 딱 한 명만 대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름이 된다.
나 또한 한 가지 일에 매진한 시간이 이십 년 가까이 되자 서서히 그런 기운이 다가옴을 느낀다. 심사위원으로 와 달라는 전화도 몇 년 전부터 받기 시작했고 강연을 해달라는 제안도 작년부터 받기 시작했다. 좋기도 하지만 불안도 하다. 부름에는 이유가 있고 자리에는 무게가 있다. 사람이 그 이유와 무게에 걸맞지 않으면 먼저 나 자신이 알고 상대방도 언젠간 알게 된다. 결국엔 업계와 세상이 알게 된다.
이 불안이 책과 글로 나를 내몬다. 더 많이 읽고, 더 자주 쓰게 한다. 읽어야 써지고 쓰고 비우면 다시 읽을 욕심이 난다. 하루에 분량을 정해놓고 수학 문제집을 풀고 주산 과제도 하고 학교 숙제와 바이올린 연습도 하는 딸을 보면서 반성한다. 내가 좀 더 일찍 부지런하였다면, 성실하고 진지했더라면 어떤 모양새로 살고, 어떤 수준의 글을 썼을까. 돌아보고 후회한다. 그 후회의 꼬리를 더 길게 남기지 않고 싹둑 잘라내려 한다. 쌓여 있는 책을 빚더미로, 내 글에 반응을 보이는 몇몇 분들의 호의를 채찍으로 느끼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