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공부, 어른 수업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5

by 최영훈

엄마와의 약속을 어긴 딸

오월의 어느 일요일, 딸이 혼났다. 세 살 때부터 친구인 지유와 일요일 오후를 보내겠다고 해서 지유 엄마에게 맡겨 보냈다. <인생 네 컷>이라는 곳에서 사진도 찍고 아트박스에도 들렸다가 다이소에도 들렀다고 한다. 그곳에서 여러 잡다한 걸 사 왔다.


분명 집에서 출발할 때는 쓸데없는 건 안 산다고 엄마와 약속을 했다. 이날 오전에 엄마랑 한의원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도 그리 얘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과는 다르게 싸구려 마스카라를 포함해서 그야말로 잡동사니를 잔뜩 사 왔다. 엄마는 딸을 매섭게 혼냈다. 저녁 내내 사람 취급도 안 했다.


몇 년 전 보리차 음료수 <하늘보리>가 "날은 더운데 남친은 차가 없네."라는 카피로 광고를 해서 제대로 욕을 먹은 적이 있다. 그것도 하필, 아니 당연하게도 버스 승강장에 광고를 해서 더 욕을 먹었다. 난 딸이 이런 생각을 가진 인간으로 크진 않길 바랐다.


개념도 배워야 한다.

공부한 것이 광고홍보와 신문방송 등 사회과학 계열이어서 논문을 읽거나 쓸 때 늘 개념의 정의를 먼저 들여다보라고 배웠다. 카피라이터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카피라이터는 광고주를 고를 수 없으니 백지 이전에 낯선 것 앞에 서 왔다. 막 이 업계에 발을 디뎠을 때는 전국에 대형 찜질방이 유행이었다. 알다시피 그 안에 얼마나 자잘한 방들이 많나.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그 방들의 소재와 그 효과를 이해하기 위해 제법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그뿐인가.


언젠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해초를 광고해야 한다고 AE가 들고 왔다. 조그만 샘플 통에 담겼던 걸로 기억하는데 처음엔 파래인 줄 알았다. 물으니 아니라고 했다. 그럼 말리기 전의 김이냐고 물었더니 그도 아니라 했다. 매생이었다. 이십여 년 전의 매생이는 전국구 해초가 아니었다. 경기도에 살다가 온 나에겐 부산의 빨간 고기만큼 낯선 것이었다. 알고 봤더니 당시 부산 사람들도 자주 안 먹는 해초였다. 그렇게 크고 작은 낯선 사물과 서비스, 그것들을 이루는 개념들과 씨름하며 20여 년을 보냈다.


아이가 개념을 배우는 과정

아이를 키우다 보니 사람은 모든 개념을 배우며 큰 다는 걸 알았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알고 있다고 느끼는 감정들의 이름 또한 그랬다. 이런 감정 중엔 시간을 들여 가르쳐야 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랑, 기쁨, 슬픔, 분노는 자연스레 생기는 감정이다. 그 감정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뭐라 부르는지 단어만 가르쳐 주면 된다.


아빠가 안 보이면 보고 싶고 엄마가 출근하면 아쉽고 퇴근하면 반가운 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임을 아는 건 쉽다. 아빠가 “아이고 내 새끼." 하며 엉덩이를 토닥이고 꼬옥 안아 주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도 금방 안다. 마음에 솟아오르는 감정과 그 감정으로 발생하는 행동에 특정한 명사를 반복하여 붙이면 아이도 그 감정과 행동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한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줄도 안다는 말이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닌 이유다.


그러나 어떤 단어는 설명하기 힘들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딸은 내게 애틋한 피붙이다. 무슨 팔자인지 곁에 있는 혈연이 이 놈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딸이 있는 자리에서 아내가 “아빠한테 넌 애틋하고 귀한 딸이지.”하고 말해줘도 딸은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한다. 나 또한 애틋한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는데 설명하기 어렵다. 국어사전에는 물론 친절히 설명되어 있지만 내가 가진 애틋한 마음과는 그 뜻이 어긋난다. 맥주를 홀짝이며 딸이 숙제하는 옆모습을 물끄러미 볼 때 마음속에 서서히 차오르는 감정을 난 애틋하다고 한다.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설명할 수 없다.


사회적인 감정과 단어들

아이가 크면서 사회적인 감정과 단어를 제대로 가르칠 필요를 느꼈다. 예를 들어 감사, 존중, 배려, 희망 같은 태도와 감정은 그 뜻과 함께 그런 삶의 자세와 적절한 표현 또한 가르쳐 익히게 해야 한다. 이걸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미숙한 존재가 된다.


이 중 제일 어려운 감정은 감사가 아닐까 싶다. 성경 고린도 전서 13장에도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다고 했지만 감사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다. 이건 명령이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그것이 의도적으로 인식하고 느껴야 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감사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받은 호의와 사물, 환경과 처지를 사유한 뒤에 나오는 것이다. 자신을 반성적인 자세로 돌아보지 않는 인간에게 감사가 없는 이유다.


감사를 배우는 시간

당연한 것,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걸 가르치는데 주저한 것이 사실이다. 내 유년 시절의 결핍이 당연했다고 해서 딸의 풍요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딸은 내 어린 시절의 기준으로 보면, 상투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유복한 집안의 맏딸처럼 크고 있다. 내 기준으로 봤을 땐 없는 게 없고, 부족한 게 없다. 이 정도면 하늘에서 원하는 것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다.


종종 딸과 운동하러 갈 때 딸이 입고 있는 운동복 차림을 보면 스포츠 브랜드 전시장이다. 신발은 다 유명 브랜드고 어떤 건 한국에 나오지도 않은 것이다. 미국에 사는 이모와 할머니가 보내준 선물 꾸러미에 종종 이렇게 시즌을 앞서 온 것들이 있다. 어릴 때는 그걸 자랑하지 않더니 예닐곱 살쯤 되니까 슬슬 은근슬쩍 자랑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다. 들고 다니는 책가방도 좋은 브랜드다. 그 가방에 들어갈 학용품도 그렇다. 연필깎이도 외할아버지가 하이 샤파를 사주셨다. 그 은색 기차 말이다. 자기가 읽고 싶다는 어지간한 책은 다 사주고 공부에 필요하다면 어디든 데려가 줬다.


그런 딸을 보면서 내심 이 모든 것들이 너무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을 했었다. 그런 걱정이 들 때마다 이건 어디까지 내 기준에서 그런 것이다. 요즘 세상, 요즘 아이들에겐 이렇게 사는 것이 기본이고 당연한 것이다. 스스로 타일렀다.


이번에 엄마에게 딸이 혼나는 걸 보면서 말이 아닌 개념으로, 실천으로 감사를 가르쳐야 할 나이가 됐음을 깨달았다. 용돈이 당연히 자기 돈이 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나이가 됐음을 깨달았다. 아내는 용돈으로 올봄 할아버지 생신 때 선물, 아니 카드라도 샀냐고 따져 물었다. 너에게 한정 없이 사랑을 퍼주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무한 사랑에 대한 감사

앞선 글에도 말했듯이 정이 많으신 외할아버지는 첫 손녀에게 무한 사랑을 주시고 있다. 개인택시를 하시는 외할아버지는 손녀가 백일 때까지는 종종 들르셔서 손수 목욕을 시켜주셨다. 또 재미있게도 손녀의 이동을 위한 것은 다 사주셨다.


신발부터 휴대용 유모차, 거실에서 타고 놀던 붕붕카, 첫 번째 킥보드, 첫 번째 세 발 자전거, 좀 큰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거쳐 최근에 롱보드도 사주셨다. 난 위험한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외할아버지는 손녀가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졌을 때 속상할까 애가 닳아 덥석 사주셨다. 사주시고 나서 조심해서 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딸이 이렇게 받은 것들의 가격은 몇만 원에서 몇십만 원짜리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애가 그 돈의 가치를 알 리 없고 그걸 모르니 그 돈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의 수고를 들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기는 그저 사물을 누릴 뿐 그 사물을 만들어낸 어른들의 수고는 다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더 감사를 가르쳐야 한다.


타인에 대한 예의

나정도 나이가 들면 사람에 대한 연민이 생긴다. 내일 눈 뜨기가 두렵던 열몇 살 무렵엔 그때까지 살 수나 있을까 싶은 나이가 됐다. 이 나이까지 버티고 살다 보니 타인의 버텨냄이 눈에 보인다. 사람이 하는 일 중에 뭐 하나 쉬운 게 없고 남에 돈 버는 것이 쉽지 않은 걸 알게 된다. 그러니 식당에 가서도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하는 직원의 수고에 감사를 표한다. 미국이라면 팁으로 그 서비스에 감사를 표하겠지만 한국엔 그런 것이 없으니 말이라도 풍성하게 하려 한다.


감사는 그렇게 타인의 수고와 존재가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는데서 시작한다. 내가 누리고 받는 이것이 누군가의 수고와 애씀을 통해 여기 있음을 철저하게 따져보는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아이가 좀 큰 다음에나 “감사합니다.”라는 말에 의미가 담긴다.


지금 감사를 안 가르치면 무례한 어른이 될까 봐 걱정이다. <하늘보리> 광고 카피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을 당연시하는 인간이 될까 봐, 나라는 존재를 사랑해 주는 타자에 대한 벅찬 감동과 감사 없이 그 타자의 결핍을 보며 불평하는 천박한 인간이 될까 봐 두렵다. 그런 인간은 자식이라도 보고 싶지 않다. 감사를 더 늦기 전에 가르쳐야만 하는 까닭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딸이 괜찮은 인간이 되길 바란다.

예쁜 여자나 똑똑한 인간 따위는 세상에 흔하지만

괜찮은 인간은 의외로 흔치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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