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13
(작년) 오월 중순의 일이다. 딸이 오랜만에 슈퍼를 따라왔다. 더 어릴 때는 과자 한 봉지, 뽀로로 주스 한 병이라도 얻어먹을 속셈으로 부지런히 따라오더니, 이제는 컸다고 아비 혼자 보내고 지는 집에 남아 동영상이나 보고 책이나 보고 숙제를 하곤 했다.
요즘엔 신제품에 관심이 많아졌다. 아이들이 모으는 무슨 빵이나 유행하는 과자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애들 표현을 빌리면 신상 음료수나 과자, 빵을 먹어 보는 건 나름 트렌드를 앞서가는 것이어서 은채도 그 흐름에 뒤치지 않으려고 이렇게 가끔 따라나선다.
파스타 소스와 면을 사고 주류 코너에 섰다. 그 옆이 음료수 코너여서 딸의 음료수를 먼저 고른 뒤였다. 맥주들 앞에서 어떤 맥주를 살까 고민할 때 딸이 물었다. "아빠. 내가 막 성인이 됐어. 그래서 이제 맥주를 처음 마셔보려고 해. 그때 아빠가 나에게 권해주고 싶은 맥주가 뭐야?"
원래 딸들은 아빠의 말문을 막는, 기가 막힌 질문을 하는데 특화되어 있다. 이제 막 독서를 해보려 하는 사람이 좋은 책 한 권 추천해 달라는 것만큼 그 답을 찾기가 어려운 질문이었다. 조건이 일단 까다롭다. 인생 첫 맥주라. 어느 영화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인생 맥주로 밀러 라이트를 골랐었다. 그 이유가 처음 맥주를 마신 때가, 아직 음주할 수 없는 나이였는데, 그때 아버지 몰래 마신 밀러 라이트 맥주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만큼 첫 경험이 중요하다. 흠.... 한 2m쯤 되는 맥주 코너를 10초쯤, 두 번 훑어봤다. 난 요즘 IPA를 좋아한다. 국산 하우스 맥주 중에서 훌륭한 것이 있어서 네 캔을 살 때는 꼭 그 브랜드 한 캔을 넣는다. 그러나 처음 맥주를 마시는 이에겐 씁쓸하다. 맥주의 청량감과 깔끔한 목 넘김의 세계를 소개하라고 보내기엔 좀 터프한 안내자다. 밀 맥주, 바이젠은 어떤가. 대체로 단맛도 있고 부드럽긴 하나 쓴 맛도 시원한 맛도 좀 덜하다. 게다가 국산 맥주 중에 고르기엔 그 종류가 너무 적다. 필스너도 괜찮으나 쓴 맛이 좀 있는 편이라 초보자에겐, 그것도 처음 맥주의 세계에 입문할 아가씨에겐 추천할 수 없다. 결국 라거를 둘러보다 답을 찾았다.
"아빠가 맥주를 마셨을 때, 와, 이거 진짜 맛있다고 생각했던 첫 번째 맥주가 하이네켄이었어. 맥주 입문자에겐 라거가 딱이고... 그래서 라거 중에서 고르라면 아빠는 하이네켄." , 딸은 아빠가 집에서 종종 마시던 그 초록색 캔을 유심히 봤다. 나중에 크면 마셔보겠다고 다짐이라고 한 걸까? 어찌 됐든 그렇게 또 하나의 난해한 질문을 선방했다.
재미있는 건, 내가 하이네켄을 처음 마신 건 어머니의 재혼 파티 때였다. (뭔가 이렇게 말해 놓고 나니까 쿨하고 멋지게 보인다.) 여하간 그러니까, 어머니는 내가 대학 다닐 때 미국 남부 신사와 재혼을 하셨는데, 난 그 결혼식 파티에 기숙사에서 친한 이들 몇 명을 초대했고, 그들은 마침 비어 있던 우리 집에서 뒤풀이 파티를 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비어 있던 집에는 커다란 아이스박스가 있었고 안주거리가 테이블에 잔뜩 쌓여 있었다. 아이스박스 안엔 가득 찬 얼음과 셀 수도 없이 많은 하이네켄, 그리고 위스키 몇 병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 나중에 등장하지만 내게 술을 가르쳐준 재윤이와 동네 후배이자 날 대학까지 쫓아온 근용이, 근용이의 친구이자 기숙사 후배 종훈이까지... 여하간 이십 대 사내 녀석 몇 명이서 그 술을, 시쳇말로 작살을 냈다.
오랜 지기이자 일의 동반자인 서 감독의 딸은 고2다. 감독은 반주로 소주 반 병 정도를 마시곤 하는데 아내가 술을 못 마셔서 조만간 딸에게 술을 가르칠 거라고 했다. 그러나 소주는 좀 그러니 맥주로 시작해 볼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무심히 들었다. 그저 아이를 좀 일찍 나아 키우면 쉰이 되기 전에 술을 가르쳐 술친구로 삼을 수 있구나 하는 부러움이 있었을 뿐이다. 딸의 난해한 질문에 적당한 답을 준 뒤, 슈퍼를 빠져나와 집으로 오는 동안 약간은 심난해졌다. ‘딸이 성인이 된 뒤에, 딸과 함께 오래오래 술을 마시려면 건강관리를 좀 해야겠구나, 그렇다면 지금부터 술을 좀 줄여야 하나, 어쩌지.’하는 생각들을 했다.
부모에게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가르쳐야 할 것들이 있다. 뭐 엄청난 인생의 가치관이나 교훈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소한 것들이다. 얼마 전 유튜브에 <dad how do i>라는 채널을 연 중년 사내가 가르치는 내용들이 다 그런 것이다. 그는 낚시하는 법, 면도하는 법, 넥타이 매는 법, 다림질하는 법, 시나몬 롤을 만드는 법, 자전거 펑크를 고치는 법, 미식축구를 이해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가 열네 살 때 집을 나간 아버지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기에 혹시라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 누군가를 위해 그는 랜선 아빠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넥타이 매는 법, 바지 주름잡는 법, 버튼다운 셔츠를 비롯한 셔츠의 종류와 그에 따른 넥타이 노트의 변화, 치노 팬츠의 장점과 주름 숫자의 종류, 빅밴드에서 시작하는 재즈의 역사, 바흐에서 시작하는 클래식의 역사, 좋은 맥주와 와인을 고르는 법, 술에 맞게 안주를 고르는 법, 첫 번째 데이트 때 입어야 할 옷차림, 운동으로 몸을 만드는 법, 좋은 축구공과 농구공을 고르는 법, 발에 맞는 축구화를 찾는 법, 인사이드 킥과 아웃사이드 킥..... 이 모든 것들을 혼자 깨우쳐야 했다. 인생의 여정과 직업, 적성과 같은 심각한 주제라면 차라리 낫다. 돌이켜 보면 오히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아버지의 부재를 체감케 했다.
술은 대학 가서 배웠다. 스물넷이었다. 신앙을 가르친 어머니 때문에 늦게 배운 술이다. 한 기숙사의 지붕 밑에 살게 된, 서울의 유복한 가정의 장남이던 재윤이에게 술을 배웠다. 그놈은 재수인가 삼수를 하고 들어 왔는데, 잘 생긴 얼굴에 언변이 좋아 무역학과의 큰 형님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놈이 차기 동장-기숙사 한 동을 관리하는 일종의 대장-으로 적격이었고, 예비역 선후배 동료들도 적임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녀석은 사양했다. 나보고 하라고 했다. 그 대신 자기는 밤의 규율을 책임질 테니 네가 낮을 책임지라고 했다.
내가 동장을 떠맡아 기숙사 대내외적으로 공식적인 업무와 얼굴 마담 노릇을 충실히 하는 동안, 녀석이 기숙사의 단합을 맡아줬기에, 그 녀석의 역할에 도움을 주고 싶어 그 녀석에게 술을 배웠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녀석의 술버릇이 깔끔했고, 나 또한 기숙사 간부라는 책임 때문에 이렇다 할 주사가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후배들이 기숙사의 각 방에 잘 들어오는 걸 확인해야 마음이 편한 위치였으니 전체 회식 때를 제외하곤 만취를 피했다.
사실, 결혼하기 전까진,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처남은 군대 가기 전, 장인어른에게 군화를 묶는 법, 군대에서 생활하는 법에 대해 상세히 배웠다. 아내 또한 장모님에게 육아와 음식에 대해 배웠다. 처제가 먼 미국에서 출산했을 때는 장모님이 두 달 정도 곁에 머무시면서 산전/산후 간호를 하셨다.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혼자 복잡한 서류 앞에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기 위해 혼자서 신문에 나온 표를 보고 고민하던 기억이 있다. 취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그 고민을 터놓을 이가 없어 막막했던 기억이 있다. 그 뒤 아내를 만났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과 사소한 순간, 커다란 문제와 사소한 문제를 나눠야 할 사람을 만나 그럭저럭 이십 년 가까이 살았다. 솔직히 대부분의 중요한 문제는 아내에게 떠넘기고 이렇게 팔자 좋게 글이나 쓰고 애나 돌보며 살고 있다.
그래도, 딸에겐 꼭 필요한 아빠다. 여전히, 아직도, 아침마다 딸의 옷을 골라준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딸이 옷 좀 골라달라고 부탁하면 함께 골라준다. 키 크고 예쁜 애들은 아무거나 입어도 된다고 주입시켜 놔서, 아빠의 말도 안 되는 코디도 군말 없이 좋다고 입는다. 아직은 애다.
학년이 올라가면 더 이상 수학 문제의 답을 줄 수 없다. 학업의 문제들은 슬슬 전문가의 손에 넘어간다. 이제 아빠는 사소한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 문제 해결의 중첩을 통해 아빠라는 존재의 역할은 기댈 언덕, 최후의 보루, 태풍을 피해 숨을 방파제가 된다. 아빠라면, 이 문제에 답이 있지 않을까? 하며 찾아오는 존재가 된다.
답이 없어도 된다. 그저 하이네켄 몇 캔을 비우며 딸의 문제를 귀 기울여 듣고 이미 갖고 있는 딸의 의견과 생각을 격려하고, 그래도 조언을 구하면 조심스레 과거의 경험을 펼쳐 놓으면 된다. 그러면 된다. 거기, 그렇게 있으면 된다. 아빠의 자리에. 내가 그렇게 필요했던 그때, 그 자리에.
"나는 이유가 없으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 다자이 오사무, 작가의 마감, p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