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토박이가 되는 중입니다.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13

by 최영훈

성묘 가는 길

지난 추석에도 길은 막혔다. 감전동 처가에서 나온 때가 열 시 좀 넘어서였는데 고성에 있는 아내의 할머니 산소에 도착한 건 한 시쯤이었다. 부산에 산지 올해로 딱 이십 년이다. 그 사이 부산-고성 사이의 국도는 기존 국도 옆에 두 배 넓게 새로 개통됐고, 마창대교가 놓여서 돌아가던 길은 그야말로 해안 드라이브 코스가 됐다. 창원이 통합시가 되고 장유에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주변도로는 정비되고 확충됐다. 그러나 명절 때만 되면 어김없이 막힌다.


2년 전, 고성에 있는 한 중견 조선소의 홍보 영상을 의뢰받아 감독과 수 차례 고성을 간 적이 있었다. 해안에 위치한 조선소까진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따라가야 했지만 부산에서 한 시간 반 밖에 안 걸렸었다. 그전까지, 그러니까 명절 때 부산에서 고성에 가본 경험만 있었을 때는 이 길이 원래 항상 막히는 줄 알았다. 도로 사정이 교통량에 비해 열악해서 말이다.


사라진 명절

그전까지, 고향에 간다고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보내본 적도 없다. 물론 큰 집에 갔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까지, 그러니까 내가 다니던 시절의 이름으로 하면 국민학교 때까진 서울 강북의 창동에 있는 큰 집에 갔었다. 할머니도 계셨고 큰아버지, 큰고모, 막내 삼촌도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 큰아버지가 차례를 드리지 않는 특정 종교(개신교는 아니다. 의외로 제사나 차례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종교들이 여럿 있다)에 심취한 뒤로 명절의 왕래가 뜸해졌고 아버지가 집을 나가신 이후엔 명절도 집을 나가버렸다.


어머닌 어머니 나름대로 외가 쪽, 그러니까 어머니 식구들을 마주하는 것이 고역이었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집을 나갔을 때 어머닌 겨우 삼십 대 초반이었다. 돌싱남녀를 다룬 프로그램이 흔한 요즘 기준으로 보면 두세 번 더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쓸만한 남자를 골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고 해도 욕먹을 상황도 아니었다.


어머닌 그러지 않으셨다. 그것이 어머니의 종교적 신념 때문인지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남매 때문인지 알 수는 없다. 어찌 됐든 어머니는 남매를 인생의 짐으로 떠안고 살아가기로 했다. 앞날이 창창한 큰딸의 그런 미련한 선택을 칭찬할 부모는 없다. 외국어대 앞에 살던, 의정부에서 국철을 타고 한참을 가서 휘경역에 내려 좁은 골목을 돌고 꺾어 들어 한참을 걸어 찾아오는 조카에게 맛있는 칼국수를 해주시던 막내 이모를 제외하면 우리 세 식구를 반겨주는 외가 식구는 없었다.


외할머니는 마주 앉으면 한숨부터 뱉었고 남매가 없을 때는 책망이 이어졌으며, 이제 막 중학생이던 내겐 어디 공장이라도 들어가서 엄마에게 보탬이 되라는 말을 불쑥하곤 했다. 어머닌 그 이후 무려 십몇 년간 외가와 왕래를 끊으셨다. 내가 외가 식구를 다시 본 건 스물넷,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간 뒤였다.


처음 보는 명절 풍경

이십여 년 전, 처가 식구들과 처음 고성에 갈 때, 그렇게 많은 차들이 길 위에 있는 모습을 난생처음 봤다. 뉴스로만 보던 명절의 고속도로와 국도 상황을 처음으로 몸소 체험했다. 장인 장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옛날이야기를 했고, 운전대를 번갈아 잡은 아내와 처남도 그러려니 했다.


장인은 창원의 한 공원묘지 근처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최서방, 저기 산길 보이재? 옛날엔 저 산 너머 공원묘지까지 가는 길이 딱 저거 하나였거든. 길도 좁았어. 옛날에 뭐 자가용이 흔했겠나, 저 너머까지 버스로 갔거든, 그 버스가 저 굽이를 돌다가 많이 굴러 떨어졌다. 조상님 뵈러 가다가 다들 많이 죽고 많이 다쳤지.” 하며, 옛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린 시절, 속초로 가던 교회 승합차에 실려 넘어가던 옛 한계령 길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볼리비아의 융가스 로드가 떠올랐다. 조상님을 뵈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위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실려 위태로운 산길을 오르던, 버스를 가득 채웠을 가족들을 상상했다. 한복이며 추석빔을 입고 모처럼 단장을 한 엄마 아빠의 손을 꼭 잡고 힘겹고 위태롭게 오르는 버스 안에서도 마냥 즐거워했을 자녀들을 상상했다.


처가의 선산

공룡 엑스포 말고는 아는 게 없던, 그전까진 한 번도 안 가본 고성은 이제 명절의 장소가 됐다. 거래처도 있어서 일상에서도 제법 가까운 지역이 됐다. 고성엔 처가의 선산이 있고 장인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선산에는, 장인과 처남에게 몇 번이나 말을 들었지만 지금도 몇 대 위인지 아직도 정확히 모르는 분봉이 다섯 개 있다. 장인이 직접 벌초를 하시기엔 무리가 되는 연세가 되신 후부턴 처남과 내가 벌초를 하고 있다.


마흔이 넘은 막내아들이 못 미더웠던 장인이 가끔 따라오시곤 하셨지만 그때마다 벌초 내내 지켜만 보신 후, 벌초가 끝나면 소주 한 잔을 분봉에 둘려 뿌린 후 처남과 절을 하셨다. 이때, 난 절을 한 적은 없다. 언제나 처남과 장인어른, 두 남자만 절을 했다. 난 멀찍이 서서 두 남자의 등을 지켜봤다. 장인이 따라 올 기력도 없어진 후엔 처남 혼자 절을 한다.


선산 너머엔 아내의 할머니, 할아버지 묘소가 있다. 그러니까 그곳에 벌초를 하기 위해선 다시 산을 돌아 나와야 한다. 명절 때의 성묘는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 묘소만 한다. 아내를 비롯한 할머니의 손자 손녀들은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면 이곳을 찾는다.


명절이 아니어도, 그저 사는 게 힘들거나 인생에 고비가 찾아왔을 때, 중요한 시험이나 승진을 앞두고 있을 때 할머니 묘소를 찾아온다. 심지어 사춘기 때 가출한 아내 사촌을 할머니 묘소에서 찾아온 적도 있다. "지가 가면 어딜 가겠노." 하고, 식구들이 주저 없이 와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만큼 사랑 많은 할머니였기에 지금도 아내는 불쑥 할머니 얘기를 하곤 한다.


딸과 함께 맞이한 명절

딸이 크자 명절의 의미도 달라졌다. 어린이집에 들어간 이후, 은채는 명절마다 한복을 입고 외갓집에 갔다. 설이면 세배를 한 후 할아버지 곁에서 차례를 드리고 함께 성묘를 갔다. 처음엔 아빠처럼, 아빠와 멀찍이 서서 절하는 걸 구경만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은채는 엄마 옆에 나란히 자리 잡고 같이 절을 하기 시작했다. 장손인 장인어른과 삼촌이 먼저 절을 한 뒤 아내의 차례가 오면 그렇게 자연스레 엄마 옆에 서기 시작했다.


등이 닮은 두 여자가 절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뭔가 모를 뭉클함이 올라오곤 했다. 설이면 수많은 세월 그렇게 별 탈 없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며 아이도 무탈하게 크고 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새롭게 시작된 한 해도 그렇게 무탈하게 살아내길 바랐다. 추석 때면 한 해의 반을 잘 넘겨 가을로 접어드니 해가 다 가기 전에 바라던 것들이 이뤄지길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설이 지난 후 그새 커버려서 추석 때마다 달라진 사이즈의 새 옷을 입고 있는 딸을 보면서 그 또한 욕심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조상이 돌보는지 신이 돌보는지 알 수 없지만 어찌 됐든 무탈하게 가을을 맞이했다는 감사함이, 할머니와 증조할머니에게 추석 인사를 끝낸 후 선대의 어느 어르신이 심었다는 밤나무들 밑에서 밤을 줍는 아내와 딸을 보면서 밀려온다. 올해도 두 여자는 산소 뒤의 길도 없는 숲에 들어가 열심히 밤을 주웠다. 그게 뭐가 재미있는지 이 아빠는 도통 모르겠지만, 딸은 이 연례행사를 무지하게 즐거워한다.


뿌리를 만들어줬다는 안도감

아이에게 뿌리의 실체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이야기나 족보 같은 글로 써진 길이 아니라 그 여정과 장소, 그리고 그 여정의 반복과 장소의 순례를 통해 스스로 뿌리의 이야기를 누적시켜나가고 있다는 데에 안도감을 느낀다. 어느 해 추석엔 그랬지, 어느 해 설에 그랬지 하며 명절 때마다 기억의 엇갈림 속에서 나눌 명절의 추억이 쌓여 가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


아이는 이미 완벽한 부산 소녀다. 입맛, 사투리, 성격,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부산 소녀다. 한 집에서 낳고 자라고 큰 십 년이 지났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컸고 한 친구와는 어린이집에서부터, 세 살 때부터 붙어 다니며 컸다. 강심장이거나 어지간한 장난꾸러기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같은 반 소년들은 이 거신 부산 소녀의 눈치를 보고, 딸의 같은 반 소녀 중 그나마 여린 친구들은 남자애들이 괴롭히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딸에게 하소연한다.


딸은 이미 부산 토박이

얼마 전엔, 앞서 썼듯이 멀끔하고 귀엽게 생긴 부산 소년 하나를 점찍어 제 남자 친구 삼았고, 그놈은 뭐가 좋은지 기다리는 아빠에게 가는 은채를 굳이 따라와 내게 인사를 하고 간다. 여름엔, 아니 앞서 말했듯이 5월부터 밀면을 찾아먹고 아무런 이유 없이 불쑥 돼지국밥을 먹고 싶어 한다. 아빠가 즐겨보는 <고독한 미식가>에 자기가 사는 동네의 맛집인 <오륙도 낙지볶음>이 나왔다고 자기 일처럼 즐거워한다. 회를 좋아하고 순대는 당연히 막장에 찍어 먹는다.


한 십 년만 더 부산에, 그중에서도 대연동에, 그중에서도 살던 집에 계속 살면 딸은 스스로 토박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꼭 그 때문은 아니지만, 집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다. 아내는 딸의 방을 지금의 딸 방보다 조금 큰 방으로 바꿔줬고 침대를 넣어주기로 했다. 대신 내 서재를 가장 작은 방으로 배정했고, 그나마도 딸과 함께 공부방으로 써야 한다. 그래서 원래 서재의 한쪽 벽을 다 차지하던 덩치 큰 책상은 내다 버렸다.


뭐, 그러면 어떠랴, 지금 이 글은 서울로 장기 출장 가서 비어 있는 광안리의 처남 집에서 쓰고 있다. 아, 광안리라고 바다가 보일 거라고 상상하지 마시길, 황령산 바로 아래에 있어 창문을 열면 바닷바람 대신 산바람이 들어온다. 여하간 이렇게 환경이 바뀌어 정신없는 곳에서도 써야 할 글은 써진다. 그러니 아빠가 키보드를 요란하게 치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눈치를 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글도 쓰고 책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빨리 가는 소녀의 계절

게다가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아이가 집에서 어른을 기다리는 시간보다 어른이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다. 좁은 공부방, 자기 자리에 공부할 걸 펼쳐 놓고 그 책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며 얘기해 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중년의 지인들은 추석 지나고 돌아서면 겨울이라며 세월이 너무 빨리 간다고 하소연하지만, 소녀의 계절만큼 빨리 가는 계절이 있을까?


딸에게 고향과 친척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회를 좋아하고 돼지국밥과 밀면을 좋아하고.. 벚꽃 구경은 등굣길에 하는... 그런 부산 소녀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아주 큰 안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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