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반과 고급반의 가장 큰 차이는 뭘까? 수영 체력? 기술? 속도? 이 중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차이는 속도 조절이다. 응?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냐? 아니다. 의외로 쉽지 않다.
초급반은 거의 비슷한 속도로 간다. 아니면 모두 다른 속도로 가거나. 전자의 경우엔 대체로 자유형이 그렇다. 후자의 경우엔 자유형을 제외한 세 가지 영법에서 그렇고. 그래서 배영을 하다가 다른 사람 발 위에 머리를 올려놓는 경우도 흔하고 접영을 하다가 앞에 사람의 발을 찰싹 때리기도 한다. 평영을 할 때는 발바닥을 찌르기도 하고 말이다. 게다가 이때는 사람들 간의 체력과 실력도 제 각각이다 보니 호흡이 차거나 리듬을 잃어버려서 레인의 반도 못 가 서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그러면 연쇄추돌이 일어나고 강사가 뛰어들어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
중급반쯤 되면 다들 비슷한 속도로 간다. 조금 쳐지는 사람은 뒤로 가고 좀 빠르고 체력이 좋은 사람이 1,2번이 돼서 반의 운동을 이끈다. 그러나 이 때도 영법에 따라 실력 차가 좀 있다 보니 초급반 같은 사고가 심심치 않게 나곤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개를 들어 앞에 사람과의 간격을 확인할 여유도 없고 앞에 사람의 킥이 일으키는 물의 진동을 구별하며 느끼지도 못하기 때문에 앞에 사람과 종종 추돌을 일으키곤 한다. 이런 추돌이 잦아지면 앞에 사람도 눈치가 보이고 뒤에 사람도 민망하게 된다.
고급반쯤 되면 속도 조절이 된다. 1번이 “오늘은 좀 바짝 땡겨 볼까요?”하면 우리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반면 몇 명 안 나온 날에는 “마, 오늘은 쉬엄쉬엄 갑시다.”하면서 뒷 줄에 여유를 주기도 한다.
속도 조절의 중요성
이런 속도 조절은 반에 새로운 사람이 왔을 때 중요하다. 옆의 고급 B반에서 넘어온 사람이라면 그 사람도 우리의, 우리도 그 사람의 속도를 대충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간대에서 넘어왔거나 다른 곳에서 수영을 하다 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늠이 안 된다. 일단 눈치작전이 펼쳐진다.
아무리 강한 E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도 일단 처음 오면 적당히 뒤로 간다. 속도에 자신 없는 기존 회원이 자신의 뒷자리를 사수하며 약간 앞으로 보내기도 하지만 대체로 후미의 한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다 대충 개인 혼영으로 몸을 풀고 몇 바퀴 돌다 보면 자기 앞사람의 속도는 물론이고 선두 그룹과 중간 그룹, 후미 그룹의 속도가 가늠된다. 돌면서 몇 번 앞사람의 발을 건들거나 뒷사람이 내 발을 몇 번 건들면 서로의 양해 하에 순서를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앞사람의 발을 건드는 걸 아주 실례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수영장의 에티켓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도 그렇다. 앞사람이 남자인 경우엔 신경이 덜 쓰이지만 여자인 경우엔 나이를 막론하고 더 신경이 쓰인다. 특히 접영이나 핀 수영을 할 경우엔 앞에 사람과 간격이 확 줄어들 때가 있어서 더 신경을 쓴다.
이건 성적인 맥락이 아니라 배려와 존중의 맥락이다. 내 앞자리를 사수할 정도의 여자 회원이라면 실력에 자신 있거나,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이 반에서 수영을 해 왔다는 걸 의미한다. 어느 정도 서로의 실력이 가늠될 때까진 그 실력과 경력을 존중해줘야 한다.
앞사람의 발이 손에 닿을 듯하면 속도를 조절한다. 스트로크와 킥의 피치를 떨어트린다. 자동차가 서행하듯이, 자전거의 페달을 천천히 밟듯이 그렇게 속도를 떨어트린다. 접영이라면 물을 더 길게 타주고 평영이라면 글라이드를 더 오래 가져간다.
수영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앞사람과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는데 내 뒷줄의 간격은 점점 촘촘해진다면 그 정체의 원인이 자기한테 있다는 걸 안다. 결국 출발 지점에서 레인 쪽으로 빠져, 속도가 자기보다 빠르거나 체력이 남아 있는 사람을 먼저 보낸다. 자기는 후미로 자연스럽게 빠진다. 장거리일 경우엔 이런 배려가 필수다.
퀵 앤 슬로우
사실, 고급반 정도 되면 초급반이나 중급반 회원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정말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만 스트로크와 킥을 하면서 슬로우 모션처럼 갈 수 있다. 그러나 초급이나 중급반, 심지어 고급반 사람 중에도 속도를 늦추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급작스레 속도를 올리는 데도 서툰 편이다. 강사가 대쉬를 하라고 해도 RPM을 올려 속도에 큰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적정한 속도로 적절하게 운동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수영에 노련해졌다는 건 결국 아주 느리게도, 아주 빠르게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 수영을 해도 그 사람의 속도에 맞춰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나보다 경력이 짧거나 체력이 적거나 실력이 안 되는 사람과 수영을 할 경우, 그 사람이 운동이 될 만한 속도로, 적절한 페이스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 반의 페이스를 끌 수도, 한 반의 페이스에 따라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기꺼이 뒷줄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 어제 진짜 많이 마셨어. 오늘은 좀 봐줘.”하면서 말이다.
다들 전력 질주였다.
다들 젊었을 땐 엄청 바쁘게 살았을 것이다. 돌아보면 젊었을 땐 기어가 하나밖에 없지 않았나? 다들 풀 악셀이지 않았나? 난 그래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느긋한 편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웃사이더로 살다 보니 주류의 속도와 흐름과는 조금 동떨어져 산 편이었다. 게다가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소위 수도권이라 불리는 나라의 중심에서 벗어나서 살았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이를 먹고 나서 돌아보니 나름 바빴고 치열했다. 심지어 연애도 그렇게 했다. 맘에 들면 고백했고 헤어지자고 하면 그러자고 했다. 누굴 잡아 본 적도 없고 매달린 적도 없다. 당연히 오랫동안 기다려 본 적도 없다.
뭐, 섹스라고 안 그랬을까? 나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남자들이 서툴고 허둥대며 급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서두르지는 말아요. 거칠게 다루지 말아요. 이미 가졌으니까. 아주 천천히 나를 느껴요.”라고 유성은이 <마리화나>라는 곡에서 노래하던데, 요즘 젊은 남자들도 우리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나보다. 그러게 말이다. 작심하고 자신의 알몸을 보여준 연인이 어디 갈 리도 없는데, 젊을 땐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무슨 대회라도 하는 것처럼.
완급을 조절할 수 있는 나이
성격 상 그런 건지, 직업 상 어쩔 수 없는 건지는 몰라도, 여전히 예민한 성격에 불안과 우울감이 옅게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랄까, 여유라는 것이 생겼다. 나보다 나이 어린 여성 고객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경청하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가볍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긴장을 풀어줄 수 있는 농담도 적절하게 던질 줄 알게 됐다.
나보다 나이 많고 제법 사회에서 잘 나가는 고객을 만나도 딱히 신경 쓰지 않고 협상을 진행한다.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려도, 뭐 나름 그 자리에 올랐으면 믿는 구석이 있겠다 싶어 적당히 맞장구 쳐주고 넘어갈 줄도 알게 됐다. 어린 사람도 언젠간 나이를 먹어 이 사회의 어른이 될 테고, 나이 들고 잘 나가는 사람도 나름의 불안과 초조함을 안고 살아가는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연민을 보내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섹스? 그건 어떤지 잘 모르겠다. 소문에는 20대 여자가 50대 유부남한테 빠지면 답도 없다던데, 난 솔직히 고객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20대 여자와 만나서 이야기해 본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 뭐, 아직 그쪽으론 아내한테 구박을 받지 않으니 그걸로 적당히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 적당히. Full, 만땅으로 채우지 않아도 괜찮다. 엔진이 허락하는 속도까지 밟지 않아도 괜찮다. 채워짐과 비워짐, 어느 쪽도 딱히 연연하지 않는다. 스피드를 원하는 고객에겐 속도를, 느림과 여유를 원하는 이에겐 느긋함을 선사하면서, 그렇게 완급을 조절하며 일을 하고 살고 있다.
7월엔 팀 전체가 좀 달렸다. 난 좀 한가해졌지만 감독은 8월 중순까지 촬영에 붙잡혀 있을 듯. 8월 하순엔 팀 전체가 숨을 좀 고르고 9월에 다시 악셀을 밟는다. 추석이 올 때까지.
"총은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신제품보다 상태가 좋은 중고가 오히려 더 믿을 만 해." 다마루는 권총을 아오마메에게 받아 들고 다루는 법을 설명했다.1Q84 - 2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