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한다.

수영장에선 건진 철학 21

by 최영훈

참회의 날

월요일마다 회개한다.


수영의 신이시여 나의 죄를 사하소서. 주말 동안 국산, 수입산 할 것 없이, 라거/에일/바이젠 할 것 없이, 캔/ PET/병 할 것 없이 주는 대로, 있는 대로 들이부은 저를 용서하소서. 맵고 짜고 단 거 가리지 않고, 한식 양식 빵과 과자 할 것 없이 처먹은 저를 용서하소서. 동네 산책은커녕 맥주를 사러 갈 때를 제외하곤 컴퓨터 앞에 앉아 유튜브로 스포츠 하이라이트나 보고 아내 몰래 야한 사진이나 보면서 하루 종일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줄 몰랐던 저를 용서하소서. 수영의 신이시여. 이 월요일의 수영을 무사히 마치게만 해주시면 다음 주말부터는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겠나이다.


날 책임지는 건 나뿐이다.

수영은 외로운 운동이다. 마라톤 하고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박태환이 마라톤과 비교하며 말했듯이 볼 경치도, 사람도 없다. 그저 수영장 바닥만 보고 간다. 혼자만의 레인에서 묵묵히 앞으로 간다. 강습 때도 마찬가지다. 물속에서는 나의 뿌듯함을 아는 이도, 나의 실수를 아는 이도 없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나를 칭찬해 주는 사람도, 나를 도와주거나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다.

수영장에서 나의 수영을 완벽하게 만드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아무리 훌륭한 강사도 나를 대신해 킥을 해줄 수 없고 스트로크를 해줄 수 없다. 같은 이유로, 당연히, 수영이 안 될 때 하소연할 곳도 없다. 수영이 잘 안 될 땐, 스스로 뭔가 잘 못 됐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닫고 흐트러진 호흡과 리듬을 수습하고 앞에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 전날 먹은 매운 음식 때문에 쓰리기 시작한 속도, 주말 동안 마신 술 때문에 어느 때보다 무거운 월요일의 몸도 오래 생각해선 안 된다. 그럴 수도, 그럴 새도 없다. 긴 후회는 휴식의 욕망을 부를 뿐이다. 긴 후회는 휴식의 핑계가 될 뿐이다. 빨리 잊고 가야 한다.


회개, 순례, 휴식

잊음은 어제의 게으른 나에게 보내는 용서다. 오늘의 수영을 방해할 짓을 한 어제의 나를 용서하는 것이다. 회개는 오늘의 일이고, 용서는 과거를 향하며 구원은 미래로 향한다. 유일한 회개의 방법은 오늘 뭔가를 계속 “하는 것”이다. 오늘의 느림과 무거운 몸을 유발한 어제의 과오를 재빨리 상기한 후, 그 과오를 저지른 어제의 나를 가혹하되, 순간적으로 책망한 후, 다시 오늘의 레인 위로 돌아와 앞으로 가는 것이다. 오늘의 수영은, 그래서, 회개의 여정이자 순례다. 오늘의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 또한 같은 의미다.

물론 회개의 시간과 순례의 여정을 멈추고 잠시 레인에 기대어 쉬어도 된다. 그러나 그 휴식도, 회개와 순례처럼 레인 안에서만 가능하다. 힘들다고 벗어나면 안 된다. 십 분이나 이십 분 먼저 나가선 안 된다. 진정한 회개는 죄로부터 기인한 처절한 후유증과 사태를 온몸으로 체감한 후에야 가능하다. 강사가 “오늘 운동은 여기까지.”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올라오는 구토를 참으면서 꾸역꾸역 돌아야 한다. 순례가 성지에서 끝나는 것처럼 수영장에서의 회개는 그렇게 끝이 난다.


수영하는 도중 과거의 죄를 생각하는 것이 길면, 그 회개가 길면 가라앉는다. 그래서, 회개를 길게 하고 싶으면 차라리 쉬라고 했던 것이다. 고난 주간에 금식을 하는 것처럼, 기도원에서 며칠 씩 기도를 하는 것처럼, 특정 기간 동안 열리는 부흥회 기간 동안 목 놓아 통성 기도를 하며 찐한 회개를 한 뒤, 개운한 마음으로 다시 지 맘대로 사는 교인들처럼 말이다.


쉬고 싶지 않다면 회개는 짧아야 한다.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다. 계속 수영을 하고 싶다면, 앞사람을 따라가고 싶다면 회개를 빨리 해치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용서는 당신의 킥 템포보다 빨리 이뤄져야 한다.


사람은 다 그렇다.

백번 실수하고 백번 고치는 것이 인생이다.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지만 내일이면 그걸 둘러엎는 것이 사람이다. 같은 죄를 99번 저질렀지만 설마 백 번은 안 하겠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초인적인 의지를 가져서 단박에 자기 자신을 고치는 사람에겐 회개와 용서가 필요 없다.

스스로를 용서해라. 물론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만큼 어렵다. 아니, 더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매일 나에게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구원을 얻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한 오늘의 나는 무거운 짐을 질 수밖에 없다. 용서를 하다 보면 언젠간 꽤 괜찮은 나를 만나질도 모른다. 좀 작은 죄를 짓고, 죄를 짓는 횟수가 줄어들지 모른다. 그러나 용서는 죽을 때까지 반복된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에게 가장 큰 죄인이다. 나에게 가장 많은 걸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기에 나를 가장 많이 배신하는 것 또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뭐라도 되어 있겠지

이 글의 초안은 처남이 물려준 갤럭시 노트에 있는 펜으로 메모했다. 메모는 모처럼 오랜만에 출근한 작업실에서 퇴근한 후 탄 동해선의 남창역쯤에서 시작해서 내릴 역인 벡스코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됐다. 그러다 부산 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탄 뒤 ‘책 좀 읽어볼까’ 하던 차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대연역에 내릴 때까지 이어 썼다.


그동안 책을 읽은 사람도, 글을 쓴 사람도 나뿐이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휴대폰으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내 양 옆에 사람들은 누군가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틱톡 따위를 보고 있었다. 그건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시간을 보내는 대신 뭐라도 해라. 뭔가를 하다 보면 뭐라도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며 심지어 약간이라도 잘하기까지 하는 그 뭔가를 성실하게 하다 보면 언젠간 뭐라도 되어 있을 것이다. 그 "뭐"라도 되기 전에, 우선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를, 아닌 나를 용서해라. 실패와 포기를 거듭했으며, 사소한 유혹에도 홀딱 넘어가기를 반복했던 나를 용서해라. 기특하지 않은가? 그 수많은 실패와 포기와 유혹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덕였으면서도 끝끝내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뭔가를 열심히 해도 아무것도 안 되어 있을 수 있다. 운동을 해서 몸을 만들고 피부 관리를 해도 연애에 실패할 수 있다. 스펙을 쌓고 이력서를 잘 쓰고 자기소개서를 잘 써도 취업에 실패할 수 있다. 최신 고급 정보를 취합해서 투자를 해도 수익이 바닥일 수 있으며 전망 좋은 분야라고 해서 딴 자격증이 몇 년 뒤 흔하디 흔한 자격증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나이를 먹으면 남들처럼 좋은 차도 있고 적당한 지위에도 오르뿐만 아니라, 아내와 귀여운 자식도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혼자서 넷플릭스나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이 금세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정신 차려 보니 나이만 먹었다. 여전히 <경이로운 소문>은 나에게 들리지 않고 <킹더랜드>는 멀리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용서해라. 살고 있고 살아가고 싶다면 스스로를 용서해라. 안 그래도 사는 게 힘들고, 짊어진 삶의 무게도 버거운데 과거의 죄까지 스스로 지우지 마라. 오래 생각하면 가라앉는다. 쉬지 않고 앞으로 가고 싶으면 후회도, 회개도 짧아야 한다. 용서는 즉시 이뤄져야 한다. 처벌은 운동이 다 끝나고 해도 늦지 않다. 일단 주어진 운동은 다 해야 하고 가야 할 길은 끝까지 가야 한다. 내 인생에 대한 단죄는 죽은 뒤, 남은 자에게 맡겨라. 무책임한가? 이렇게라도 해야 우린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 있다. 어떻게든 앞으로 가야 할 것 아닌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나를 용서하는 것도, 우선은 내가 먼저 해야 한다. 나도 사랑하지 않는 나를 남이 사랑할리 없고, 나도 용서하지 않는 나를 남이 용서할 리 없다. 사랑은 미래를 향하고 용서는 과거로 향한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뭐긴 뭐야 숨을 참고 최대한 빨리 물살을 가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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