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강습이 끝난 후의 개인 연습 시간, 초급반의 두 아가씨가 접영을 하는 걸 봤다. 그녀들은 내 맞은편에서 서툰 접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도착한 한 아가씨가 나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오, 쥐 난다.”, 그 아가씨에게 무심히 한마디 했다. “그렇게 열심히 발을 차니까 힘들죠.”, 아가씨가 대답했다. “그러게요. 그런데 앞으로 잘 안 가요”, 그 아쉬운 마음을 알기에 짧은 위로를 보냈다. “아직 힘들죠? 좀 여유를 갖고 물을 크게 탈 줄 알게 되면 괜찮아질 거예요.”,
잠시 후, 아가씨가 우리 레인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우리 반의 맨 뒷번을 사수하는 글래머 여자 회원(다른 글에도 몇 번 언급했던 그녀다.)이 접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와, 잘하신다.”, 그 아가씨가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글래머 여자 회원이 숨을 고르며 내 옆에 섰을 때, 내가 말해줬다. “접영, 잘하신대요.”, 여자 회원이 그 기초반 아가씨를 웃음 띤 얼굴로 보며 답했다. “고맙습니다.”
잠시 후, 그 아가씨와 다른 아가씨가 반대편 방향을 향해 접영을 하기 시작했다. 앞을 막고 있는 수영장의 물을 몸통과 두 팔로 밀고 나가고 있었다. 그 접영을 같이 보던 우리 반의 글래머 여자 회원이 웃으며 말했다. “와, 그래도 끝까지 가네요.”, “그러게요. 우리 보고 일부러 저렇게 하라고 그러면, 중간도 못 갈걸요?”, 둘이 잠시 웃었다.
기다리는 시간
난 누굴 기다려 본 적이 없다. 그 자체를 싫어한다. 맛 집에서 웨이팅 하는 것이 시간을 보내는 행위 중 가장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다른 글에도 썼듯이, 십 분 이상 여자를 기다려 본 적도 한 번뿐이다. 그 마저도 이십 대 초반의 일이다. 내가 서른이 넘어 유일하게 기다렸고 기다리는 사람은 딸뿐이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 시간을 허비할 만큼, 그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아니 그 사람을 보기 위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전혀 실감되지 않을 만큼 그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언제 오든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기다림은 행복한 기다림이다. 겨울에 봄꽃을 기다리는 마음과 같다. 무더운 여름, 코스모스와 국화를 기다리는 마음과 같다. 나를 기다릴 때도 이런 마음이 들까?
기다림의 인색함과 너그러움 사이에서
우리는 자신을 기다리는데 인색하거나 너그럽다. 인색함은 초조함을 불러 지름길을 찾게 하거나 포기하고 돌아서게 한다. 반면 너그러움은 나태를 부른다. 그러나 내 주변 사람들, 특히 청춘, 후배들을 보면 대체로 자신을 기다리는데 인색하다. 그러니 우선은 인색함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제 막 수영을 시작한 사람은 우리 반의 글래머 여자 회원 같은 고급 A반의 맨 끝 주자도 부럽다. 수영장에 다닌 지 반년 정도 지나도 여전히 그 주자와의 체력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자유형과 배영은 어떻게 좀 따라갈지 모르지만 평영과 접영은 어림도 없다. 남자면 좀 나을 것 같다고? 어림도 없다. 짬밥이라는 게, 세월의 무게라는 게, 하나의 영역에서 보낸 시간과 들인 노력의 무게라는 게, 그게 그렇게 단숨에 추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걸 다들 알아서일까? 나랑 같이 일하는 감독도 수영장에 몇 번 등록했지만 그때마다 항상 배영까지 하다가 말았다고 한다. 바쁘기도 하고 규칙적으로 수영장에 가는 것이 쉽지 않아서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실력이 나아진 나를 기다릴 여유가 없어서 일 테고 말이다. 아마 다들 이유가 비슷하지 않을까? 수영장에 다니다 삼 개월을 못 넘기는 이유가 말이다.
우리 수영장은 초급반과 고급 A반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이제 겨우 발차기를 한 사람, 이제 겨우 자유형과 배영을 하는 사람, 평영과 접영으로는 수영장의 반도 못 가는 사람들이 수영하는 레인 바로 옆 레인에, 그 수영장에서 가장 독하게 수영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성깔 있고 체력 좋으며 실력까지 좋은 1번 주자를 따라가기 위해 애를 쓰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실력이 좋아진 그 사람들 옆에, 하필이면.
우리 수영장의 이 시간 대 고급 A반은 다른 시간대 A 반하고 비교해도 무시무시한 반이다. 강사들도 체력, 훈련량, 기술 등에서 압도적이라고 인정한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소화해 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한다.
그러니 이 반의 맨 끝 자리 주자라면 인정해줘야 한다. 후보라도 맨체스터 시티의 후보라면 급이 다르지 않나? 이런 반에 있는 회원의 수영 실력을 부러워하고 스트레스 받는 건 시간 낭비다.
막연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
두 반의 물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심리적 거리는 멀다. 난 언제 저렇게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건 강사도 모르고 수영의 신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모른다. 그러게, 얼마나 오래 수영을 하면 고급반처럼 할 수 있는 거지? 참고로 내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 세월은 십 년 터울을 두고 한 시간을 다 합쳐도 채 만 3년이 안 된다. 그 사이, 여기저기에서 몸 풀 듯이 한 수영까지 합해도 그 정도다.
결국, 다시 말하지만, 초급반 레인을 넘어 고급반으로 넘어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건 수영장에서 보낸 시간과 그 시간 동안 한 운동의 강도와 질에 달려 있다. 초급반만 겨우 다닌 뒤 그 뒤로 호텔 수영장 같은 곳에서 유유자작하게 수영을 하며 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면 당신은 결코 고급 A반과 함께 수영을 할 수 없다. 여기는 자비란 없는 곳이니...
자, 결국, 이 막연함이 우리를 포기하게 한다. 수영이라면 괜찮다. 취미로 배우는 기타나 피아노, 골프, 테니스 같은 것도 괜찮다. 우리가 박태환이 될 것도 아니고 타이거 우즈나 권순우가 될 것도 아니지 않나. 서른이 넘어서 기타를 배우는데 지미 페이지가 될 리도 없고 손열음이나 임윤찬이 될 리도 없지 않나? 그러니 그런 건 그냥 힘들면 접으면 된다. 아, 이게 아닌가 보다 하고 말이다.
그러나 쉽게 포기가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다. 그러나 계속하고, 더 잘하고 싶다. 앞서가는 1번과 2번을 따라잡고 싶다. 지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계속해야 한다. 그런 마음이 계속 든다면 버텨야 한다. 한 달이면 될까? 두 달? 세 달? 아니 1년? 아무도 모른다. 포기하지 않을 거라면 자신에게 시간을 줘라. 물론 재주가 없을 수도 있다. 타고나 체력이 별로 안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시간을 들이는 그것이 생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시간을 펑펑 써도 된다.
그렇다면, 생계와 관련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타고난 것은 어쩔 수 없다. 음악적 재능이 없는데 음악가를 꿈꿀 수는 없다. 예전에 대학 강사를 할 때의 일이다. 학생 중에 재즈 기타리스트가 되겠다고 제법 오래 학원을 다니며 기타를 치던 녀석이 있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학원에 강사로 온 유명 기타리스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넌,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겠다.”
그 친구도 알았다. 천재들은 배우지도 않은 프레이즈를 한 번 듣기만 해도 번개처럼 쏟아낸다. 음악의 신이 그 손 끝에 머문다. 그건 시간을 들여 배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 친구는 수능을 보고 광고홍보학과에 들어왔다.
이 이야기엔 두 가지 교훈이 있다. 취미의 영역이든, 생계의 영역이든, 일단 당신의 한계와 능력을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일정양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영역이든 일단 하고 싶은 영역이라면 인생의 일부분을 소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낭비라고? 아니다. 그건 낭비가 아니다. 인생에 낭비란 없다. 분명히 말한 건대 당신이 그렇게 애쓴 시간은 언제 어디선가 쓸모를 발휘한다. 마치 언제 만들고 저금했는지 몰라서 잊고 있었던 통장처럼 말이다.
인생에 숨겨진 주름들
할 만큼 했는데 당신이 원하는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영역에선 어떻게 해야 할까? 후퇴도 필요하다. 재정비하고 다른 영역에 도전해야 한다. 라이프니츠와 들뢰즈,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이론을 잘 정리해 소개한 이정우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의 인생엔 주름이 있다. 앞서 다른 글에서 말한 것처럼 그 주름 안엔 기초반 A와 고급반 A가 모두 들어 있다. 어느 주름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인내심을 갖고 하나씩 주름을 펼치다 보면 만날 수 있다.
물론 그 주름들 중엔 실패한 당신, 다시 도전하는 당신도 있다. 나에 주름 중엔 카피라이터인 나, 아빠인 나, 수영에 미쳐 있는 나, 누군가의 선배인 나, 글을 쓰는 나가 들어 있다. 숱하게 연애에 실패한 나도 들어 있으며, 수 없이 많은 출판사에 거절당한 나도 들어 있다. 포기한 나, 좌절한 나, 분노한 나, 상처받은 나도 들어 있다. 어떤 주름은 이미 펼쳐서 다시 돌아가서 볼 수 없고 어떤 주름은 가능성을 품은 채 접혀 있다. 아직 펼쳐지지 않은 그 주름들은 내가 어떤 시도를 하기 전까지, 펼침의 순간이 올 때까지 그렇게 접혀 있다.
그래서 그 주름 안엔 다른 걸 잘하는 나와 당신이 숨어 있다. 수영은 못하지만 달리기를 잘하는 나, 수영은 못하지만 골프를 잘하는 나, 수영은 못하지만 축구나 농구를 잘하는 나가 숨어 있다. 그걸 시도해 보기 전까진 그 주름을 펼쳐지지 못한 채 접혀 있다. 그 주름을 펼치는데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지 모른다.
그 주름 안에 당신이 원하는 당신의 모습이 없을지도 모른다. 실패나 좌절, 포기의 주름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걸 기억해야 한다. 어떤 영역에서 당신이 실패를 겪고 물러난다면 당신은 당신 인생 안에 있던 하나의 주름을 펼쳐 보인 것이다. 그런데, 굳이 그런 주름까지 다 펼칠 필요가 있을까?
한 번뿐인 인생인데
얼마 전, 울산광역시의 시의원 모두와 차례로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한 시의원에게 다른 시의원에게 하지 않았던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 시의원의 목소리가 유독 우렁차고 내가 감히 가질 수 있으리라 엄두도 못 내는 열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만간 환갑을 바라보는 그 시의원에게 사는 게 힘들어서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고 사는 청춘들에게 인생 선배로써 한 말씀 부탁드렸다.
걸걸한 목소리로 답했다. “마, 저는 어제도, 내일도 생각 안 합니다. 오늘만 생각하고 죽도록 열심히 삽니다. 저는 한번 태어났으면, 남들 하는 건 다 해보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니, 어차피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인데,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죽어야 안 되겠습니까?”
저 시의원이 말한 삶이 바로 인생 안에 잠재된 모든 주름, 가능성들을 펼쳐 보이는 삶이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우린 언제나 선택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 번뿐이니 말이다. 맘에 드는 사람은 많지만 그중 하나를 선택 - 아, 물론 동시에 여럿을 사귈 수도 있지만, 그게 통상적이라고 볼 수 없지 않나? 에너지도 많이 들고 - 해서 사귀어야 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그중 하나를 골라서 선택해야 한다. 전공은 물론이고 전문 영역, 직장, 배우자, 하다못해 취미까지 선택에 선택을 거듭해야 한다.
선택은 하나의 가능성을 인생의 창고에 넣어 둔다.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선택을 하자마자 선택하지 못한 것에 미련을 둘 필요 없다. 일단은 선택한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삼 개월 해보고 “난 수영이 체질에 안 맞아.”하고 돌아서는 것도 당신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사 개월 차에 접어들자마자 수영을 잘하기 시작하는 당신을 못 보는 것도 그 선택으로 인해 감수해야 될 미래다.
우린 이 불확실성 때문에 더 자기 자신을 기다리는 것에 인색하다. 그리고 이 불확실성 때문에 세상과 다른 이들이 말하는 상식에 기댄다. 남들이 몇 개월 만에 수영을 잘하기 시작했다고 하면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도, 연애도, 전공도, 공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 상식보다 조금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있다. 빠르면 감사하고 느리면 기다려줘야 한다. 그 느림을 허락하는 건 당신밖에 없다.
느림이 나태함은 아니다.
그 느림을 나태함과 혼동해선 안 된다. 나태함은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타깃 없이 총을 쏘는 것이다. 대상 없는 짝사랑이다. 그냥 적당히 맨 뒤에 서서 수영을 하는 걸로는 아무리 오래 수영을 해도 1번처럼 수영을 할 수 없다. 내가 우리 반의 1번 주자에 견줄만한 2번이나 3번이 되는 걸 목표로 수영을 하는 건 수영장에서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내가 월요일마다 회개를 하는 건 수영장에서 의 한 시간을 그냥 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언젠간 1번과 어깨를 견줄만한 3,4번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수영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태한 자에겐 죄도, 회개도 없다. 그러니 구원도 없고 가야 할 천국도 없다. 당연히 천국에 있는 자신의 모습도 없다. 단테의 신곡에서, 그리고 그 신곡에 나온 죄를 인용한 영화 <세븐>에서 나태가 7대 죄악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나아가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의 꿈속에 나타난 신이 그가 무죄를 항변할 때, 그의 죄를 “인생을 낭비한 죄”라고 선포한 이유도 같은 이유다.
뭔가를 하지만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고, 그렇기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도 않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극한까지 쓰지 않는 삶. 그것이 나태다. 그런 자세로 수영을 하는 회원 대부분이 수영 실력도 늘지 않고 살도 빠지지 않는다. 내가 나보다 나이 많은 아줌마, 아저씨와 할머니들이 주요 멤버인 고급 B반을 나와 고급 A반으로 옮긴 이유도 나태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희망을 거는 마지막 사람은 나뿐이다.
나태한 자신에게는 가혹해야 하지만 전력을 다한 자신에게는 인색해선 안 된다. 너그러워야 한다. 아무도 당신의 성공과 성취를 기다려 주지 않을 때 마지막까지 당신에게서 기대를 접지 않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봄에 피는 꽃이 있다. 여름에 피는 꽃이 있다. 가을에 피는 꽃이 있다. 겨울에 피는 꽃이 있다. 산에 피는 꽃이 있고 들에 피는 꽃이 있다. 해안에 피는 꽃이 있고 습지에 피는 꽃, 강가에 피는 꽃이 있다. 매년 그때가 되면 그 장소의 그 나무에서 어김없이 피는 꽃이 있고 올해 단 한번, 이름 모를 풀에서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꽃도 있다. 모든 꽃이 피어야 할 때와 장소가 있다. 꽃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사람은 그걸 모른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내가 언제 필지 모르고 어디서, 어떤 형태로 필지 모르는 것이 사람이 처한 숙명이다. 꽃은 이런 걸 모르지도 않고, 그렇기에 때와 장소를 잘 못 짚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기가 봄날의 산에 있는 나무에 피는 꽃일 줄 알고 겨울 내내 힘들게 올라가서 나무를 붙잡고 씨름했는데 알고 보니 해안 습지에, 그것도 무더운 여름에 피는 꽃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 그런 실수를 하는 씨앗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 실수를 한다. 이런 실수를 줄여보겠다고 적성검사를 하고 직업 상담을 받고 심리 검사에 MBTI 검사, IQ 검사까지 받지만 여전히 당신의 미래는 미궁 속이다.
어쩌냐고? 별 수 없다. 그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삶이란 그런 것이다. 살아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다. 내 손과 발을 바쁘게 움직이고 숨을 마시고 뱉으며, 때론 참으며 물을 밀고 나가는 수영처럼, 그렇게 묵묵히 밀고 나가는 것이 삶이다.
기다려줘라. 자신을 너무 닦달하지 마라. 다시 수영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일 년을 갓 넘긴 내가 어떻게 그 악명 높은 열한 시 반의 1번 주자를 따라잡을 수 있겠나. 큰맘 먹고 봄부터 수영을 시작한 사람이 이제 막 여름을 넘어가는 이때, 고급반의 접영을 보며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있겠나?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마라. 앞선 글에서 썼듯이 괜찮은 롤 모델을 정해 놓고 그 사람을 목표로 열심히 수영해라. 그러면 언젠간 나비처럼 접영을 할 수 있다.
직업도, 연애도, 그리고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나를, 내가 가진 재주로는 만들 수 없을지 모른다. 그걸 확인할 때까진, 별 수 없다. 해 보고,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는 나를 끝내 못 만난다 하더라도 그 주름은 다음 주름으로 나아가는 도약대가 될 것이다. 그걸 확인하느라 조금 늦은 만큼 더 빨리, 높이 멀리 도약하도록 도와주는 스프링 달린 디딤판이 될 것이다. 그렇게 잠시 주춤했다가 펄쩍 뛰는 걸 반복하며 살다 보면 당신이 원하는 당신을 만날지 모른다. 무수히 많이 접힌 가능성의 주름 속에서 말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기다려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