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은 없다. 공식적이고 공인 됐으며 검증된 방법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 게 있다면 자살률이 이렇게 꾸준히 올라갈 리 없다. 그러니 무슨, 나를 위로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사이비 심리학이나 7,80년대 신파 영화 같은 제목을 달고 나오는 에세이 따위는 볼 필요 없다.
그렇다. 제목과는 다르게, 다시 말하지만, 이런 방법은 없다고 믿는다. 내가 나 자신을, 지금 당장, 완벽하게 위로하는 방법은 없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믿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와 다른 신념이나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것의 가능함을 믿고 고민할 것이다. 상관없다. 우린 다 다른 믿음과 생각을 갖고 있고, 그 덕분에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니.
믿음 얘기가 나온 김에 잠시 곁길로 빠져 종교 이야기를 하면, 종교의 목적은 위로가 아니다. 종교는 그 종교의 신이 가진 신격과 나의 인격이 닮는 것이 목적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닮아 구원에 이르고 불교는 부처를 닮아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예수나 부처는 자기 십자가와 번뇌를 갖고 오라고 하지, 그 고통의 삶을 위로하지는 않는다. 혹시라도 그런 걸 말하는 목사나 중을 만나면 일단 의심부터 해라.
자기 위로의 이미지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가 지 입으로 “자기 위로의 방법은 없다.”라고 말해놓고 그 방법에 대해 쓰려고 하는 것은, 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목의 글을 쓰는 이유는 위로의 다른 이미지를 찾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청승맞은 무릎 끌어안기 자세와 같은 자기 위로의 이미지가 아닌 다른 이미지를 찾고 싶어서다. 자기 위로, 그 불가능함을 응시한 채, 그 없음의 빈 터 위에 위로의 다른 의미를 찾아 세우고 싶어서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법을 함께 찾아보고 싶어서다.
이를 통해 내가 그리고 말하고 싶은 자기 위로와 그 힘의 이미지는 상처와 괴로움을 줬던 사람과 사건을 없던 것처럼 하고, 치료하고 봉합한 뒤 비교적 그런 것이 없었던 날들의 온전한 모양새로 희망찬 마음으로, 새 모습으로 내일을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고 믿는 자기 위로는, 받은 상처는 상처대로 인정하고 겪었던 고통은 고통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상처투성이인 채로, 다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고통의 환영은 유령처럼 어른거리는 환상통마저 이겨내며 사는 힘을 주는 것이다. 예고 없이 생각나는 과거의 고통을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잊으려 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이제 그 자기 위로의 가능성을 찾아보자.
나를 위한 위로는 여기에 없다.
사전적으로, 위로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을 의미하다. 그래서 위로를 말하는 자는 대격(對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철학자 서동욱이 <일상의 모험>에서 레비나스의 글을 중심으로 설명했듯이, 대격은 말하는 자의 노출을 동반한다. 내가 위로를 말한다면 그 말을 듣는 이에게 그 말함과 말함 속에 담긴 위로의 의미를 저울질받는다. 그것을 각오하며 위로를 말하고 위로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은 물론이고 위로 또한 그 평가는 타자에게 있다. 연극과 드라마의 독백이 일상에선 흔하지 않은 것처럼 내가 나에게 보내는 위로 또한 일상적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냉정하게 말하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나에게 위로를 해 줄 수 없다. 나를 위로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대체로 내가 겪은 사태를 이미 겪었거나 겪을 일이 없는 사람이다. 전자는 공감과 연민이 섞인 위로를 주고 후자는 동정 어린 위로를 보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 그 위로는 의미의 격차를 만든다. 겪은 사람은 회상으로 인해 사태를 미화시키거나 왜곡시키고, 겪을 일이 없는 사람은 그 사태와 그 사태를 겪은 사람의 심정을 상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날 위로하기 위해선 지금의 나와 다른 나가 존재해야 한다. 사태를 미화시키지도, 왜곡시키지도 않으며, 그 사태를 상상하지도 않는 나와 동일한 타자이자 나인 나. 결국 동시간대, 동일 공간에 살면서 하나의 사건을 겪고 있는 나는 나를 위로할 수 없다. 겪음을 밖에서 보고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의 타자, 대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어디 다른 곳에 있는 또 다른 나만이 나를 위로할 수 있다. 그런데 과거의 나는 나를 위로할 수 없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경험이 없기에 그 위로는 주제넘은 짓이다. 결국 내가 날 위로하는 현상의 발생이 가능하다면, 그건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내는 위로가 있을 뿐이다.
자기 위로의 단초들
수영을 하다 보면 열패감이 몰려올 때가 있다. 남들은 신나게 돌고 있는데 나만 숨을 고르며 레인에 기대어 쉴 때가 있다. 오늘따라 숨이 안 쉬어지고 접영의 팔이 안 나오고 평영은 그 자리에 멈춰 선 것 같을 때가 있다. 잡힐 것 같았던 3번과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뒤에 따라오는 5번에게 발이 잡힐 때가 있다. 총각들이 오는 날에는 3번과 4번의 자리를 내어주고 5번이나 6번으로 밀려날 때도 있다.
이런 날, 샤워를 하러 샤워장으로 걸어가면서부터 속상하다. 열받는다. ‘괜찮아. 이걸로 밥 먹고 살 것도 아닌데.’와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샤워하면서 회개하고 반성한다. 어제 마신 맥주와 처넣은 잡다한 것들을 생각한다. 집에 걸어가면서 오늘 수영을 복기한다. 뭐가 문제였는지 따져본다. 내일을 다짐한다. 수영장 밖에서의 자기 위로의 조건과 방법, 그것의 단초도 여기서 찾아야 한다.
우선 괜찮다는 말을 하지 마라. 하나도 괜찮지 않다. 얼마 전 딸과 함께 평소 좋아하는 프로그램인 <골 때리는 그녀>를 보고 있을 때였다. 상대적 약체 팀이 골을 먹었다. 골키퍼와 선수들은 바로 “괜찮아, 괜찮아.”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때 내가 딸에게 말했다. “괜찮아 보이냐? 괜찮긴 뭐가 괜찮냐? 이제부터 시작인데.”
그 게임에서 그 약팀은 네 골을 먹었다. 네 번째 골을 먹었을 때, 그 팀원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만 그런 건 아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골을 먹은 팀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괜찮아.”이다. 그중, 이 말을 가장 적게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모델 이현이다. “야, 집중.”, “정신 차려.”, 그녀의 단골 멘트다.
프로축구를 1부 리그(K1)와 2부 리그(K2)까지 챙겨 본다. 주로 하이라이트로 보지만 가끔은 중계 전체를 보기도 한다. 이런 경기에서 골이 들어가면 골을 먹은 팀은 화를 낸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한다. 괜찮지 않기 때문이다. 골을 넣은 팀이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 이들은 낭패의 어두운 구렁텅이에 빠졌다 나온다. 그 기분을 괜찮다는 말로 섣부르게 위로하는 것이 더 기분 나쁘지 않을까?
그들은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골키퍼는 골 망을 흔든 뒤 그 골의 진동을 여전히 머금고 있는 공을 재빨리 꺼내 앞으로 던진다. 다른 선수들은 서로에게 말한다. “다시 하자.", "정신 차리자.", "따라가면 된다.", "다음엔 사람 놓치면 안 된다.”와 같은 말을 한다. 무엇을 잘못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함께 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상기시킨다. 괜찮다는 말이 들어올 자리는 없다. 지금, 괜찮지 않다.
그러니 괜찮은 척하지 마라. 그런 말도 하지 마라. 쿨 한 척도 하지 마라.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라. 힘들면 힘들다고 인정해라. 실패에서 오는 고통, 상실에서 오는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애도의 시작이다. 자기 위로의 첫 단추다.
도망가지 마라. 회피하지 마라. 오늘 하루 수영을 망쳤다고 해서 수영장을 떠나서는 안 된다. 수영을 좋아한다면, 그래서 계속 수영을 하고 싶고, 해야만 한다면, 언젠간 수영장에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건 잊지 말아라. 오래 떠나 있으면 있을수록 체력과 실력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수영장은 오랜만에 돌아온 사람에게 떠나 있던 시간의 책임을 혹독하게 따져 묻는다.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템플 스테이를 한다고 해서, 산티아고의 길을 걷고 둘레길을 걷는다고 해서 위로가 완성되지 않는다. 베트남에서 쌀국수를 먹고, 오사카에서 우동을 먹는다고, 그런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고 말아먹은 프로젝트로 인해 받은 패배감과 대차게 차인 실연의 아픔이 없어지지 않는다.
잠시 위로를 받았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그동안 잠시 잊는 것이다. 현실로 돌아오면 우린 고통과 상처와 일상과 마주한다. 그러니 다른 환영으로 상처를 가리지 마라. 파티를 하고 과소비를 하고 과식을 하고 밤새 퍼마시고 낯선 이와 하룻밤을 보내고. 이러지 마라.
그건 <롱키스 굿나잇>에서 지나 데이비스가 사뮤엘 잭슨의 거즈를 갈아주기 위해, 그 붕대를 떼어내는 고통에서 잠시 한눈을 팔 수 있도록 자기 상의를 열어 가슴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잠시 한눈이 팔린 뒤, 그 거즈가 휙 때어졌을 때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마취제는 진통을 못 느끼게 하는 것이지 진통 자체를 없애 주는 것은 아니다. 진통제는 진통을 없애주지 병의 원인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찢어진 건 꿰매는 고통을 겪고, 실밥을 푸는 두려움을 통과한 뒤에 흉터가 될 수 있다.
다시 해라. 어제의 겪은 수모에도 불구하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실력이 나아질 수 있다. 위로는 그때 완성된다. 칼럼이 잘 써지지 않을 때 난 하소연 하지 않는다. 하소연할 데도 없다. 일단 최악의 글이라도 쓴다. 그걸 고치길 반복한다. 고치고 또 고친다. 그러면 완벽해지냐고? 당연히 아니다. 서너 개 중에서 한 개 정도 맘에 든다. 여기서 맘에 든다는 건 쪽팔리지 않을 정도라는 말이다.
완벽한 나는, 괜찮은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 그러니 위로 또한 지금 여기에 없다. 여기에 없는 내가 나를 위로할 수는 없지 않나? 청승맞게 무릎 끌어안고 있을 시간 있으면 차라리 혼자서 술이나 마셔라. 나가서 달리기라도 해라. 헤어진 사람을 못 잊어 그 사람의 SNS나 기웃거리고 술자리에서 그 사람 욕 따위도 하지 마라.
차라리 울어라. 앓아누워라. 잠시 떠나고 싶다면 최대한 빨리 돌아와라. 그런 다음 털고 일어나 다시 해라. 여행 짐도 풀어 넣으면 일상의 사물이 된다는 걸 잊지 마라. 그렇게 수습하고 다시 해라. 사랑도, 일도, 공부도, 그리고 수영도 다시 해라. 애쓰고, 고치고, 반복하고, 노력하고. 그렇게 다시, 다시, 다시 해라. 잊지 마라. 수영장의 자비엔 기한이 있다. 세상도 당신을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른 나를 만들어라. 스스로 위로하고 싶다면 타자로써의 다른 나를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동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나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도플갱어이거나 정신 분열이다. 또는 평행 우주이거나. 미래의 나를 상정해야 한다. 오늘의 상처를 위로받고 싶다면 그 상처를 회복한 미래의 나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러니, 애석하게도, 위로는 지금 이뤄질 수 없다. 미래의 어느 순간, 과거의 나에게 위로가 보내어진다. 그러니 지금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 벌어진 상처를 보며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언젠간 나로부터 올 위로를 기다리며 지금 참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
내가 나에게 주는 위로는 미래의 나로부터 온다. 새로운 내가 과거의 나를 위로할 수 있을 때까지, 세월을 버텨내며 새로운 나를 만들어야 한다. 미래의 나로부터 올 그 위로의 말이 어제의 나에게 갈 때까지 말이다.
고생했다. 수고했다. 상처투성이고 고생의 흔적이 역력하구나.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 애썼다. 여기까지 왔다. 참고, 견뎌줘서 고맙다.미래의 나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 위로는 완성된다.
“나는 스스로를 동정하는 야생동물을 본 적이 없다. 얼어 죽어 가지에서 떨어지는 작은 새조차 자기를 동정하지 않는다.”
D. H. 로렌스의 ‘자기 연민(Self-pity)’이라는 시다. 이 시는 영화 <지아이 제인>에 나왔다. 혹독한 훈련을 다 이겨낸 후 네이비씰이 된 여성 장교에게 교관이 보내는 조용한 찬사였다. 동시에 그녀의 앞날에 보내는 무서운 축복이자 경고였다. 자기 연민은 가장 어렵고 위험한 작전에 가장 먼저 투입될 그녀가, 절대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이다. 우리도 그래야 할까? 난, 이 나이를 먹고 나서야, 그러려고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