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항엔 북동풍이 불었다. 선장님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았다. 내 수준에 맞춰 지리적으로 설명하면 바람이 바다에서 정자항을 향해 비스듬히 들어왔다. 선장님이 운영하시는 수상 레저 시설에서 경주 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데 쉴 새 없이 바람을 맞았다. 바다엔 풍랑주의보가 내렸고 십 톤 가량 되는 어선들은 3일 동안 조업을 하지 못한 채 항구에 묶여 있었다.
촬영 스케줄을 논의하기 전 점심을 먹으러 간 작은 식당은 원래 어부들의 도시락을 만들어 배달해 주는 곳이다. 조업을 못하는 날만큼 도시락 통이 쌓여 있었다. 식당 사장님은 찾아온 손님이 반가우셨는지 생고등어 구이를 거의 퍼 주시다시피 했다. 감독에게 말했다. 올해 들어 내가 먹어 본 생선 중에서 최고의 맛이라고.
바다의 날씨는 네이버나 다음, 심지어 K웨더 같은 사이트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한다. 이곳에선 낚시꾼들도 챙겨 보는 윈디라는 앱으로 날씨를 확인한다. 그 앱을 통해 수시로 바뀌는 바람과 구름, 파도의 상황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내일의 날씨는 알 수 없다고 했다. 9월의 바다가 이렇게 심난해진 건 몇 년 전부터라고 한다. 아무리 거신 남동해 바다라고 해도 9월부터 11월까지는 대체로 잔잔하기에 선상 낚시의 성수기인데, 최근엔 도대체가 그 스케줄을 잡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바다를 끼고 살게 될 줄 몰랐다.
파도는 거신데, 감독은 그 파도를 좀 찍어 두겠다며 차를 몰았다. 어항을 빠져나오자 미술관인지, 예식장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큰 건물 몇 개가 보였다. 요즘 유행하는 대형 카페였다. 감독은 그 카페들을 뒤로하고 새로 산 카메라에 VR 렌즈를 장착한 뒤 조업용 장화로 갈아 신고 바다로 들어갔다. 위험해 보였다. 잠시 미끌리는 것 같았다.
감독이 파도에 휩쓸리면 뛰어들어가야지 마음을 먹고 휴대폰을 꺼내 손에 들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나, 잠시 생각하는 동안 감독의 촬영이 시작됐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감독의 촬영을 볼 때마다 늘 드는 생각을 또 하면서 그의 뒷모습을 봤다. 아마 카페 안의 사람들은 비싼 빵과 차를 마시며 저 멀리에 있는 등대를 한가롭게 보며 수다를 떨고 있었을 것이다.
짧은 촬영이 끝나고 감독의 차에 올라타 바람에 흩어진 파도의 포말이 엉겨 붙은 선글라스를 닦았다. 예전에 바닷가 근처의 산속에서 달리기를 하면서 해무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짠 기운 가득한 해무의 습기를 빨리 닦아 내지 않아 러닝 고글의 코팅이 벗겨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비를 하고 어항을 빠져나오는데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와, 웃는 교?”, 감독이 물었다. “아니, 뭐랄까, 기가 막혀서요. 그거 알아요. 제가 서른 전까지 바다를 본 건 두 번 정도예요. 그것도 아주 잠깐. 제가 살았던 데가, 위에서부터 얘기하면, 파주, 서울, 의정부, 평택이었고, 대학은 대전에서 다녔거든요. 진짜 서른 전까진 내가 부산에 살게 될 줄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감독님 하고 울산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게 될 줄도 몰랐고 이렇게 풍랑 있는 바다를 찍을 줄도 몰랐죠. 감독님이랑 거제도, 고성의 조선소를 돌아다닐지도 몰랐고요. 인생 참... 그래서 웃은 거예요.”
나도 날 몰랐다.
난 맥주병이었다. 삼십 대 후반, 수영을 배우기 전까지 수영 비슷한 것도 해 본 적이 없다. 워터파크? 가 본 적 없다. 계곡? 의정부 살 때, 초등학교 시절 두 번 정도 갔다. 그마저도 집이 그 근처여서 갔다. 해수욕? 아내를 만나기 전까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서른 이전엔 바다에서 놀아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바다를 본 적은 있었지만. 결혼하고 나서 호텔 수영장에 처음 가봤지만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몰랐다. 아내는 그때 이미 수영을 제법 할 때였기 때문에 신나게 놀았고 난 그저 목욕탕 속에 들어간 노인네처럼 몸만 담그고 있었다.
난 평생 땅을 딛고 하는 운동만 할 것 같았다. 축구, 농구, 야구, 배구, 마라톤... 그나마 좀 결이 다른 운동은 스포츠 클라이밍인데 그것도 엄밀히 따지면 땅 아닌가? 그렇게 마흔 언저리까지 살았다. 결혼하면서 위험하단 이유로 스포츠 클라이밍을 그만두고 마라톤까지 그만둔 이후, 아내가 수영을 권했다. 그때는 그렇게까지 수영을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정말 매일 갔다. 그때는 토요일에도 수영장을 운영했는데 자유 수영을 두 시간 가까이했다. 그때는 정말 미쳐 있었다.
쉰이 넘어, 십 년 만에 다시 하게 된 수영을 다시 만난 연인처럼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게 될 줄도 몰랐다. 그러나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하고는 좀 다른 기분이다. 너무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다. 느리게라도 더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마치 오래 연애를 한 연인, 또는 오래 같이 산 부부 같다고 해야 할까? 연애 초기나 신혼 때처럼 돌아서면 안고 싶고, 하고 싶은, 그럴 수 있는 나이는 지났지만 안을 때만큼은, 할 때만큼은 최선을 다해 만족을 주고 싶은 마음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수영을 두고 별소릴 다한다.
신념과 똥고집 사이
젊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또는 그들의 글을 보다 보면 “난 절대 00 하지 않을 겁니다.”, “난 절대 00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와 같은 말을 듣고 보게 된다. 아니, 내 주변의 내 또래 사람들 중에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인들도 있다. 흔한 말 있지 않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이런 생각은 좋게 말하면 신념이고 철학이다. 나쁘게 말하면 똥고집이고. 이런 절대적 배척과 제외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견고히 하는 것이 나쁜 건 아니다. 우린 다 그렇게 나름의 경계를 통해 주체를 성립하고 타자와 나를 구분하니까. 그러나 그 경계(境界)가 한계(限界)가 되는 건 경계(警戒) 해야 한다. 일전에도 얘기했듯이 우리의 삶엔 미처 펼쳐 보지 못한 삶의 잠재태가 주름지어 감춰져 있다. 그 주름은 사건과 상황을 만나 펼쳐질 기회를 갖는다. 펼치거나 도망가거나, 선택의 문제가 남아 있다.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스스로 가두지 않았으면 한다.
해보기 전엔 모른다.
하기 전엔 잘하는지 모른다. 애를 키워보니 알겠더라. 딸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농구를 가르쳤다. 아이는 한 번의 슛을 성공시키기 위해 무수하게 던졌다. 그렇게 감은 잡은 후 첫 골이 들어갔을 때, 내가 본 아이의 표정, 그 환희에 찬 표정은, 그런 터져 나오는 함성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다. 아이는 그 이후 연습하러 갈 때마다 슛을 아주 손쉽게 성공시켰다. 뒤에 배운 롱 보드도 그랬고 꾸준히 해온 음악 줄넘기도 그랬다. 재능은 시도 뒤에 확인되고, 연습으로 꽃 피운다.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자신을 한계 짓는 건 스스로 선언한 “절대”의 벽, 그 밖에도 존재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망설일 것이다. 난 운동을 못 해. 난 운동에 소질이 없어. 난 맥주병이야. 난 등산이 힘들어. 난 평발이야. 난 체력이 약해. 이번 달에 바쁘니까 다음 달부터. 여름엔 수영장에 사람이 많다니까 가을부터 해야지. 가을엔 학교(회사)가 바쁘니까 겨울부터 해야지. 추운 겨울에 무슨 운동이야. 올 해엔 좀 여유가 없으니까 내년부터 해야지....
그러다 세월 간다. 그러다 정말 체력도, 젊음도 사라지는 순간이 온다. 난 “긍정! 긍정! 긍정!”과 같은 구호를 외치는, 산악회의 아재 같은 사람은 아니다. 조용한 동해선 열차 안에서 나하고 마주 앉으면 그저 약간 지쳐 보이는 대학의 시간 강사나 IT 업계의 중간 간부정도로 보일 것이다. 평범한 키에 마른 50대 남자. 평소 말투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다. 남에게 뭔가를 강요하거나 무슨 긍정의 에너지를 넣어주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당신이 뭔가를 했으면 좋겠다고 부추기고 싶다.
당신은 맥주병이 아니다. 수영 강사는 당신 같은 사람에게도 수영을 가르칠 수 있어야 월급을 받는다. 당신은 체력이 약하지 않다. 체력을 키운 적이 없을 뿐이다. 당신에게만 유독 등산이 힘든 건 동네 뒷산조차 올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평발을 위한 운동화도 널려 있다. 학교와 회사는 원래 바쁘고, 올해만큼 내년도 바빠야 당신과 당신의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의미이니 한가하길 바라서도 안 된다. 게다가 우리나라엔 원래 4계절이 뚜렷하다.
그러니 절대 뭔가를 할 수 없다는 선언으로 자신을 한계 짓지 않았으면 한다. 뭔가 하기 좋을 때를 기다리며 오늘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한다. 수영장에서 당신을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