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

수영장에서 건진 철학 27

by 최영훈

인생의 챕터

수영장엔 인생의 모든 챕터가 있다.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거의 다 있다는 말이다. 다시 수영을 시작한 후, 지난 1년 동안 난 내가 이미 읽은 챕터와 읽어야 할 챕터를 동시에 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문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 어느 챕터에 들어가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소설이라면, 예를 들어 추리소설이라면, 포와로가 나오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이나 셜록 홈즈가 나오는 코난 도일의 소설이라면 내 인생은 어디쯤 전개됐을까? 일상의 지루함에 못 이겨 수염을 다듬거나 하나의 큰 사건을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가며 이런저런 불평을 토로하는 포와로, 또는 바이올린을 켜며 왓슨에게 흥미로운 사건이 없다고 투덜대는 홈즈가 등장하는 도입부는 이미 지났을 것이다.


어쩌면 그 지루한 일상을 깨는 특이한 사건을 의뢰받는 부분도 지났을 것이다. 사건이 벌어졌거나 사건 현장에서 단서를 추적하는 부분도 지났을 것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이라면 모든 용의자와의 면담이 진행되는 부분도 끝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 내 인생의 챕터는 얼추 용의자를 추려내고 사람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 멋들어지게 추리를 설명하고 범인을 지목하는, 그 부분쯤 되려나? 그렇다면, 흠, 결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인생이 소설이라면

학교에서 배웠다시피 소설은 대충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이뤄진다. 특히 추리 소설은 이 과정을 충실히 따른다. 이런 단계의 변화를 프루스트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서 찾는 건 쉽지 않다. 사건이 있는지 없는지, 있어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 사건이 도대체 사건이라고 부를 수나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만 한 전개가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소설을 끝까지 읽기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면 추리 소설과 같은 상업 소설은 그렇지 않다. 맥주 캔을 따면 소리가 나듯이, 뚜껑을 따면 거품이 올라오는 막걸리처럼, 책 장을 넘기면 배경이 설명되고 사람이 등장하고 사건이 터진다. 체호프의 말처럼 총이 등장하면 발사가 되고 자동차 키가 나오면 추격전이 나온다. 우리의 인생은 어느 쪽인가? 당신의 인생은? 그리고 나는?


솔직히 말하면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원은 없다. 능력 있는 여자를 만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애를 돌보며 한량처럼 살고 있다. 두 명, 세 명과 동시에 해 본 적은 없지만 한 명의 여자와는 에너지가 마르도록 놀아본 적도 있다. 하고 싶은 운동도 다 해 봤다. 공부도 할 만큼 했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뭐라 하는 사람은 없다.

수영장에서 만난 젊음과 늙음

분명 절정은 지났다고 생각했고, 그런 것 같다. 아니 그렇다. 수영을 다시 시작한 이후, 노련미로는 극복할 수 없는 젊음을 만났다. 몇 주 만에 수영장을 나와도 청춘은 지치지 않았다. 기술이 떨어지면 힘으로 극복했고 체력이 부족하면 빠른 회복력으로 극복했다. 느리다 싶으면 킥을 부지런히 차서 만회했다.


나와 같은 또래의 여자 회원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같은 수영복을 입어도 젊은 사람이 더 멋있고 예쁜 건 부인할 수 없다. 젊은 건 젊고, 예쁜 건 예쁘며, 활력이 있는 건 활력이 있다. 젊은 사람들은 그 자체로 눈부시다. 범접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


난 다음 바퀴와 다음 세트를 걱정한다. 체력을 안배하고 숨을 고르고 페이스를 조절한다. 젊은 친구들에겐 그런 것이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풀 악셀이다. 엔진도 좋고 차체도 튼튼하니 속도도, 거리도 버텨준다. 난 이미 엔진도 낡았고 차체도 낡았다. 겉보기엔 그럴싸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럴싸할 뿐, 보기와 같지는 않다.

이 한계를 절감하며 궁리를 한다. 부족한 체력과 낡은 몸뚱이로 어떻게 계속 수영을 할 수 있을지, 그것도 아주 잘하려고 궁리한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수영 실력이 나아지면, 혹시 절정의 챕터를 좀 길게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다. 그러나 잠시 후, 아쿠아로빅을 하기 위해 할머니들이 들어오면 내 절정의 챕터는 거의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위기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번 달, 아쿠아로빅을 하는 할머니들 사이에 젊은 아가씨 한 명이 눈에 띄었다. 할아버지도, 아저씨도, 심지어 아줌마도 안 보이는 아쿠아로빅 교실에 젊은 아가씨라니. 겉으로 봐선 멀쩡해 보였다. 건강해 보였다. 물론 그 나름의 속사정이 있을지도. 그러나 별다른 사정이 없고 신체도 건강하다면, 그렇다면 그런 그녀의 청춘을 더 불태워줄, 뭔가 더 뜨겁고 벅찬 운동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아직은 그런 운동을 할 때가 아냐.'


이번 주, 수영장 안에 어우러진 청춘, 남녀노소를 보면서, 우리의 끝과 그 시작이 맞물리는 아쿠아로빅 할머니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을 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 강백호가 코치에게 했던 질문을 내게도 던졌다. “당신의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절정의 챕터가 긴 것이 좋은지, 오르가슴처럼 번개처럼 왔다가 붙잡을 수 없는 강렬한 여운을 남긴 채 사라지는 것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 이 나이 들어서도 “나 아직 안 죽었어.”하며 절정이라 우기는 것이 좋은 지, 감독과 종종 “우리 어렸을 때 기준으로 보면, 지금 우리 나이 또래는 할배였지. 할배.”라고 인정하며 조용히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것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 살아온 것도 나고 살고 있는 것도 나고 살아갈 것도 나인데 지금의 이 살아내는 순간이 인생의 어느 지점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은 봐줄만하다는, 아직은 쓸만하다는 아내의 말에 용기를 얻으며 “나 아직 안 죽었어.”라고 외치며 수영장에 가볼까? 순간적인 대시 파워만큼은 젊은 애들한테 뒤지지 않는 걸 위안 삼아 어깨를 피고 수영을 해도 될까? 잘 모르겠다. 뭐, 별 수 없다. 답이 없는 질문은 잠시 뒤로 하고 하는 만큼 답을 주는 수영장에 가는 수밖에.


사족-

써 놓고 나니, 이 매거진의 맨 마지막 글에 어울린다. 그러나 그 마지막이 언제 올지 모르니. 일단은 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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