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꽃을 보네 32
부산시립박물관은 서쪽을 향해 있다. 때문에 해운대와 광안리를 등지고 있다. 시청이나 구청 같은 주요 공공건물이 대체로 동남쪽을 향해 있는 것을 감안하면 특이한 배치다. 등을 맞대고 있는 유엔기념공원이 동남향을 바라보고 있어 거의 하루 내내 볕이 들고, 한 치 건너 있는 부산문화회관이 동북쪽을 바라보고 있어 가깝게는 황령산, 멀리로는 광안대교가 보인다는 걸 감안하면 더 그리 느껴진다.
박물관의 주차장 입구는 물론이고 본관 앞의 뜰과 본관 현관도 당연히 서북쪽을 향하고 있다. 하여 박물관 정문으로부터 일직선을 그으면 문현동과 부산항 제7부두와 5 부두, 그리고 부산진역이 그 선상에 놓인다. 부산시립박물관이 1978년에 개관했음을 감안하면 이 방향 설정은 합리적이다.
대연동의 도로 인프라가 조성된 건 훨씬 뒤의 일이었을 테고 뒤편에 위치한, 바다를 매립하여 형성된 용호동 메트로 시티는 물론이고 광안대교가 중심이 되는 부산의 해안을 감고 돌아가는 외곽 도로 또한 훨씬 뒤에 생겼으니, 부산역을 통해 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원도심을 향해 주차장과 입구를 내는 것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박물관의 이런 배치 덕분에 딸은 등교 내내 꽃을 보고 갔다. 초등학교 때는 박물관의 동편, 즉 오른쪽으로 난 길을 걸었다. 메타세쿼이아 그늘 밑을 걸어 조각공원으로 올라섰고 그 길에서 목련과 동백, 라일락, 마로니에, 금목서와 은목서, 명자나무, 그리고 벚꽃, 장미를 보며 학교를 다녔다. 지금, 중학교 때는 박물관의 서편, 즉 왼쪽으로 다니는데, 그쪽으로는 박물관 주차장에는 철쭉과 영산홍, 그리고 이팝나무가 반기고 담장을 따라서는 대나무가 줄지어 있다. 그런데 요새 보니 그 대나무 사이로 무궁화가 몇 그루 보였다.
『조하르』에는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꽃들이 나타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 생각에는 오히려 꽃들이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던 것 같다. 인간의 출현으로 경악한 꽃들은 아직도 그 경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에밀 시오랑, 태어났음의 불편함, P.69. (조하르 -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의 중요한 경전 중 하나)
한 사람의 탄생과 함께 꽃이 피어나는지, 그 이전에 꽃이 있었는지 모른다. 사람이 그 존재의 이유와 당위성을 얻기 위해 별과 돌과 꽃에까지 태어난 날과 달의 의미를 부여하는 탓에, 탄생의 순서, 그 앞뒤를 명확히 알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자식 이전에 내가 있었는지, 내 인생과 동시에 자식이 준비되어 있었는지, 나라는 존재가 예수의 탄생을 준비하기 위해 세상에 먼저 왔던 요한처럼 자식의 도래를 위해 준비하는 사람으로 예비되어 있던 것인지, 난 알 수 없다. 내 운명에 자식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아닌가?
무궁화는 나라꽃이다. 설에 의하면 병충해에 강하고 일기 변화에도 잘 버티는 성질이 우리 민족의 본성과 닮아서 정했다고 한다. 물론 그전부터 무궁화를 사랑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그 기록을 더듬어 오르면 고조선에 이른다고. 물론 그날의 꽃과 오늘의 꽃이 같은 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같은 이름이 기록에 있는 것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만약 내가 본 꽃과 그날의 조상들이 본 꽃이 같다면, 그저 근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무궁화는 충분히 예쁘다. 잘 만든 칼이 살기를 품고 적의 명치를 향하기 전까지 그저 아름다운 쇠붙이이듯, 무궁화 또한 우리가 그 생태를 지켜본 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전부터, 그것과 상관없이 예쁘다. 의미는 사람의 것이지 꽃의 것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꽃은 인내한다. 무궁화만 그런 게 아니다. 어떤 꽃은 병충해에 약하고 어떤 꽃은 추위와 더위에 약하고 어떤 꽃은 바람과 비에 약하며, 어떤 꽃은 성질이 급하여 피나 싶으면 져버려 키우는 이나 보는 이를 속상하게 하지만 모든 꽃은 나름 피어난 곳에서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또, 어쩌면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꽃의 약함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목적에 따라 인위적인 교배 끝에 만들어진 수많은 견종들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질병처럼, 많은 꽃들의 약함 또한 그 원인이 사람의 욕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하나, 어쩌면 꽃들은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 자연이 허락한 본연의 생명만큼 살아내는지도 모른다. 그 수명만큼 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그 터를 옮겨 심고 키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꽃이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머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많은 꽃을 더 오래 볼지도 모른다. 만약 이 추측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꽃을 심을 게 아니라 꽃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맞으리라.
우리는 내게 맞지 않는 공간과 시간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있어 마땅한 우주에 다다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패와 좌절과 우울과 심지어 질병까지 내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나에 꽃과 함께 나만의 우주와 나만의 사람이 동시에 태어난다면 그것(들)을 찾아야 될 의무는 우리에게 있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긴 방황이자 순례일지도 모른다. 오디세이의 은유.
불행히도 우리는 그 여정의 바른 길을 모르기에 길 위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 돌아가든 쉬어가든 결국엔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지만 그 사이, 우리는 그 선택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쉰이 넘은 나와 감독도, 그리고 나에 딸과 아내도 피할 수 없다. 딸은 먼저 산 우리의 실수를 보면서 자신의 실수를 줄일 수 있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너무 많은 외도를 했다. 어느 시처럼 가 보지 않은 길을 간 뒤 다시 돌아 나오기도 했다.
밀린 급여의 지급도 늦어지고 실업급여 관련해서도 미리 알려줘야 할 것 같아 감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감독은 바로 전화를 했다. 감독이 내 4대 보험료를 내주면서 내 신분을 계속 직원으로 유지하고 싶은 이유는 간단하다. 최소한의 직원이 있어야만 입찰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또, “나”와 함께 들어와 달라는 요구가 있곤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와의 관계가 오래된 고객일수록, 몇몇 시청 및 산하 부서와 관공서의 관련 담당자들은 이런 요구를 꼭 하곤 한다. 내가 출근하지 않는 날에 보자고 하면 내가 그 스케줄에 맞췄다. 그런 요구가 많은 주에는 두세 번 움직이기도 했다. 그때를 대비해 감독은 나를 명목상이라도 직원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이다.
통화 내용은 뻔했다. 감독이 나를 해고하기 전, 몇 번의 미팅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카톡으로 돌려보냈다. 뾰족한 수가 없다고 말이다. 봄부터, 나와 마주 앉을 때마다 감독은 내게 이 불황을 헤쳐 갈 뾰족한 수가 있냐고 물었다. 울산 토박이이자 명색이 사장인 그에게 없는 수가 내게 있을 리 없다. 그는 그저 날 내보낼 명분을 쌓고 있는 중이었다. 그도 알았고 나도 알았다. 그는 통화에서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해 보자고 했다. 내가 집의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있진 않아도 나름 일정 부분 감당했던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이 해결이 안 된다면 발전적인 방향이든 관계든, 의미 없다. 감독에겐 다음 주에 다시 통화하자고 했다.
열대와 아열대 지방의 휴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히비스커스는 무궁화와 가족이다. 아욱과의 무궁화 속에 속하는 꽃이다. 당연히 닮았다. 물론 가는 길은 다르다. 무궁화는 나라의 꽃이 됐고 히비스커스 꽃은 차로 마실 수 있는, 하와이를 상징하는 낭만의 꽃이 됐다. 닮은 두 꽃은 마치 다른 대륙의 가정으로 각기 입양되어,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일란성쌍둥이 같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비슷할지 모른다. 만약 평행 우주가 있다면 그때 그 순간 다른 선택을 한 내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궁화와 히비스커스처럼.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은 하나뿐이다. 이어지는 선택 끝에 맞이한 오늘뿐이다. 모진 삶이어도 여름의 땡볕을 이겨내는 무궁화처럼 묵묵히 살아내야만 한다.
히비스커스의 운명은 내 것이 아니니, 부러워할 필요 없다. 그쪽도 나름의 고충이 있지 않겠나. 말려져 뜨거운 물에 들어가고, 실로 꿰어져 관광객 목에나 걸리고. 그러니 알지 못하고 살지 못하는 운명에 대해 우리는 잠시 침묵하자. 나에게 맞지 않는 우주를 살아내는 타자를 위로하자. 그 마음가짐이 어쩌면 우리가 남은 생을 살아낼 힘이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