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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Jul 19. 2024

어렵고 복잡하게 평범한 엄마 되기

2024년 3월 7일 단 하나의 명장면

다섯 살이 된 첫 딸 은유의 손을 잡고 두리번거리며 강당 의자에 앉을 때만 해도 '어휴, 머리 감길 잘했다.'라는 바보 같은 생각뿐이었다. 씻지도 않고 대충 옷을 입고 나서려다 시간이 좀 남아서 씻고, 씻은 김에 깔끔히 입었는데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식순에 따라 진행되는 전형적인 유치원 입학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입학식이 진행될수록 오묘한 감흥이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단어조차 떠올린 적 없는 국민의례를 하며 마음이 울렁인 것이 시작이었다.
거기에 더해 애국가. 마지막으로 소리 내서 애국가를 불러 본 게 언제던가. 어른들은 민망하면서도 왠지 감동받은 얼굴로 애국가를 불렀고 아이들은 코를 후비며 제 부모를 이상하게 올려다봤다.
국민의례, 애국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들을 아이 때문에 해본다. 내가 지나온 인생을 천천히 되짚어 다시 살아보는 것만 같다.

입학식이 끝나고 집이 아닌 각자의 반으로 흩어졌다. 입학식날부터 정규 수업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엄마들의 얼굴에는 해방감과 불안감이 뒤섞인 오묘한 빛이 돌았다. 다행히 몇몇 얼굴 아는 친구들이 있어서인지 은유는 울거나 겁먹지 않았다. '엄마 이제 진짜 간다.' 하니 돌아보지도 않고 '네. 안녕히 가세요.' 씩씩하게 대답한다.


입학식 전 방학기간인 12일의 가정보육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시원하고 개운했다. 남편과 손을 잡고 돌아다니며 점심을 먹고 커피도 마셨다. 이런 대낮 데이트가 대체 얼마만인가, 밝은 대낮에 카페에 앉아서 마주한 남편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애하던 때처럼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낄낄댔지만 무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사람과 함께 고군분투하다 드디어 첫아이를 유치원이라는 작은 사회에 꺼내놓았다는 사실이 서서히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이제야 내가 부모가 됐다는 느낌이 들어. 결국 은유를 사회에 한 인간으로 내놓기 위해서 우리가 그동안 고생을 해온 거잖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걔를 쓸모 있고 좋은 인간으로 만들려고 말이야."
우리는 '너 그간 진짜 잘했다. 아니다, 네가 더 잘했다.' 공치사를 해대며 은유의 입학을 축하했다.

꿀 같은 낮잠을 조금 자고 아이들을 하원시키러 갔다. 유치원 문 앞에서 은유를 기다리는 시간이 설렜다. 많은 아이들 속에 내 아기의 머리꼭지만 보이는데도 바로 알아차렸다. 손을 마구 흔들자 은유가 "내 엄마예요!!" 소리치며 달려와 안겼다.
은유에게 오늘 하루 소감을 묻자 "선생님은 멋있었고 친구들은 기뻤어요!"라고 서툴지만 엄마는 알아들을 수 있는 한줄평을 해주었다.
그새 감기라도 옮았는지 콧물 줄줄 흘리며 어린이집에서 나오는 둘째 은호까지 품에 안자 더할 나위 없이 내 마음이 풍족했다.

오늘의 메뉴는 은유가 좋아하는 소고기 미역국, 어묵볶음, 계란말이.
정신없이 요리를 하다 말고 서랍을 뒤져 앞치마를 찾아 입었다. 나는 원래 앞치마를 입지 않는다. 매번 입을 생각을 못해서 늘 기름이 튀고 양념이 묻어 옷을 버린다.
그런데 기특하게도 드디어! 결혼 6년 만에 앞치마를 찾아 꺼내 입을 생각을 한 것이다.
복장이 에티튜드를 만드는 것일까, 앞치마를 한 나는 제법 전문적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전문적인 '주부'말이다.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여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도 내가 주부라는 것, 아기 엄마라는 것에 묘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고 행복이지만 나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기분.
최선을 다해야만 괜찮은 엄마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고 겨우겨우 애를 써야 식사와 청소를 해낼 수 있는 정도였다. 재능도 없고 열정도 없었다.

아이엄마인 '나'와 본연의 '나'를 구분 짓고 살았다. 그래서 아이들과 있을 때는 나다울 수 없다며 불만을 자주 터뜨렸다. 아이들이 정말 예쁘고 귀엽고 내 목숨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육아와 집안일은 재미없고 반복적이고 나를 한없이 지루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앞치마를 입고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따끈한 어묵볶음을 지금 먹어야 딱 맛있다며 애들 입에 넣어주고 그러다 미역국 간을 보고 그러다 계란을 풀어 휘휘 저으면서 약간의 자부심 같은 것, 프로의식 같은 것이 스멀스멀 피어난 것이다.
'아, 나 좀 프로 같은데. 이제 좀 잘 해내는 것 같은데?'

내가 엄마인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첫 번째 날이었다.
은유는 꾸준히 성장해 평범한 유치원생이 되고 나도 꾸준히 이 재미없는 육아와 집안일을 견뎌내고 드디어 평범한 주부가 된 것이다.
본연의 나와 엄마인 나를 구분할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의 내가 그냥 나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나를 그대로 좋아할 수 있게 됐으니 나는 오늘이 정말 특별하고 기쁘다.

오늘은 즐거운 파티를 벌어야지. 힘을 내서 내일도 평범한 엄마로 살아가야지.
평범해진다는 것, 익숙해진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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