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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Aug 09. 2024

마늘 까다가 맞이한 엄마의 첫 번째 기일

2024년 8월 3일 단 하나의 명장면

마늘을 까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밤 12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그러니까 엄마의 첫 기일 마늘을 까 맞이한 것이다. 마늘은 내리 몇 시간을 까도 까도 줄어들지 않는 마법을 부리고 있었고 손가락에는 마늘의 알싸함이 들러붙어 조금씩 아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겸사겸사 마늘 까기를 멈추고 어떤 애도 의식이라도 해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종교도 없는 내가 할만한 행동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늘 까기를 멈출 수 없었다.

 

피아노를 치다 보면 건반 하나 틀리지 않고 무아지경으로 연주를 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내가 피아노를 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주체적으로 움직이며 음악을 만들어가는 순간.

비슷한 예로 탭댄스를 추다 발을 멈출 수 없는 순간. 무한대로 벽에 공을 쳐대 스쿼시를 끝내지 못하는 순간.


뭐, 물론 전부 다 내 추측이다. 나는 피아노도 탭댄스도 스쿼시도 못하니까. 

실한 건 내가 무아지경으로 마늘 까기에 빠들었다는 것이다.


손이 저절로 마늘의 껍질을 벗겨냈다. 마늘을 결대로 쪼갠다. 과도를 사용해 위에서 아래로 한 겹 벗기고 아래에서 위로 다시 한 겹. 그리고 남은 껍질을 정리한다. 다음 마늘을 쪼갠다. 간단하고 반복적이다.


한 다리는 양반다리를 하고 한 다리는 접어 올린 전형적인 아줌마의 자세 하고 TV와 마늘을 빠르게 번갈아 보며 마늘 까는 행위에 몰두했다.

평생 봐온 우리 엄마의  모습 그대로.


몇 년 전 시할머님이 직접 농사지으신 마늘을 선물로 주셨을 때 꽃다발 같은 마늘다발을 앞에 놓고 막연해졌었다. 그제야 나는 어나 한 번도 마늘을 까본 적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받은 마늘을 대로 엄마에게 가져다주엄마는 진짜 꽃다발이라도 받은 듯 기뻐했다.

"어머 이 귀한 마늘을. 마늘 좋은 것 좀 봐. 얼른 까서 줄게." "응. 그럼 엄마도 반 줄게!"

엄마가 까 걸 가져다 먹 주제에 은근한 생색을 냈다.


살며 엄마가 마늘을 까는 모습을 본 것은 수 백번쯤. 어째서 한 번도 돕지 않았을까? 자연스럽게 내 일이 아닌 것으로 분류도 했던 걸까?


마늘 까기, 나물 다듬기,  이불 털기, 장 정리.

너희는 저쪽이야. 우리 엄마한테 가면 돼.

술 마시기, 잠 자기, 때 되면 옷 사, 안 입고 갖다 버려 혼나기. 너네는 내쪽이란다.


시간 동안 마늘을 까자 허리가 아프고 손가락도 쓰라렸다. 엄마에게 무진장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사실은 마을까 게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단순반복적인 행위는 나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내 안의 여러 생각과 번민은 사라지고 이 세상에 마늘과 나만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마늘을 쪼갠다, 벗겨낸다, 남은 껍질을 정리한다, 다시 쪼갠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탕국을 끓이며 엄마 제사 준비를 시작했다. 아빠와 이모들이 음식을 모두 준비해 왔기 때문에 상을 차려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와 언니의 아기들 복작복작해 마음이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아기들만 부릴 수 있는 마법이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명절 같은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고요가 찾아오자 나는 또 중독자처럼 마늘을 찾아 꺼내 까기 시작했다.

개고 벗겨내고 다듬고 다시 쪼개고.


마늘을 까며 그리움도 잊고 허무함도 잊고 고통스러워하던 엄마의 마지막 얼굴도 잊는다. 늦은 밤 이 세상에는 나와 마늘, 그리고 누군지도 모르는 TV 속 사람들의 웃음소리만 존재한다. 간혹 나도 의미 없이 따라 웃는다.


엄마는 무엇을 잊으려 마늘 까기에 몰두했을까? 리드미컬하게 TV와 마늘을 번갈아보며 숙련된 장인처럼 물 흐르듯 과도를 다루던 모습이 생생하다. 약간 둥글게 말고 있는 엄마의 등 뒤로하고 '나 나갔다 올게.' 무심히 말했었는데.


그 등을 한 번쯤 안아줘 볼걸. 무슨 고민을 잊으려 마늘을 그렇게나 열심히 까냐고 물어볼걸. 옆에 앉아 같이 마늘을 까며 산더미 같은 마늘도 걱정 좀 나눠갖자고 말을 네볼걸.

이미 너무 늦었고 내게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엄마 있는 36년과 엄마 없는 1년을 보냈다.

이변이 없다면 엄마 없이 산 기간이 엄마있이 산 기간보다 길어져야 엄마를 만나겠지.

길다. 엄마를 만날 날이 너어무 멀다.


그래도 잘 살아낼 작정이다. 걱정이 산더미 같을 땐 없는 마늘이라도 만들어서 까며 잊어버릴 것이다.

먼 훗날 엄마를 만나면 고생했다, 수고했다, 엄마가 전부 지켜봤다, 정말 잘 해냈다. 반드시 칭찬을 듣고 말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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