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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Aug 23. 2024

계란 한 판이 전부 쌍란일 확률은?

2024년 8월 1일 단 하나의 명장면

아이 있는 집은 공감하겠지만 달걀이 정말 헤프다. 분명 얼마 전에 산 것 같은데 늘 달랑 몇 개만 남아있다. 만한 게 달걀이라 그렇다. 찜으로, 프라이로, 탕으로 쉽게 요리할 수 있는 데다가 영양분이 풍부해서 애들이 달걀만 먹어도 제대로 먹인 것 같은 만족감까지 덤으로 얻는다.


얼마 전 평소처럼 어플로 장을 보며 달걀도 함께 주문했다.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밤 11시에 결제한 장바구니는 프레시백에 담겨 내가 눈을 뜨기도 전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침에 습관처럼 달걀 네 개를 꺼내 삶았다. 찬물에 담가 열기를 빼고 까려는데 느낌이 좀 달랐다. 달걀이 땅땅하게 꽉 찬 느낌. 껍질 벗기기도 조금 어려웠다.


반질반질한 달걀을 아이들이 먹기 좋게 손으로 조금씩 떼주었다. 흰자를 다 벗겨내자 딱 붙어있는 두 개의 노른자가 보였다. 내 인생 처음 보는 쌍란이었다.


"와! 신기해라. 쌍란이네. 오늘 좋은 일이 있으려나~?"

"엄마. 쌍란이가 뭐야?"

"땅라니??"


아이들의 질문대충 답을 던져주고 다음 달걀을 까니 또 쌍란, 그다음도 그다음 것도 또 쌍란이었다.


우와! 신기하다!!


..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주문을 잘못했나? 쌍란만 있는 달걀을 샀나? 근데 애초에 그런 게 있긴 한가?

내 주문내역을 봐도 평범한 달걀이고 리뷰를 아무리 뒤져봐도 쌍란이 잔뜩 나온다는 후기는 없는데..

혹시 유전자가 조작된 건가? 방사능이라도 맞은 닭인가?


검색해 보니 아주 드물게 30개 전부가 쌍란인 경우가 있었고 품질에는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노른자가 두 개니 영양가는 더 높다고 했다.

신기하다. 너무너무 신기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매일 반복되고 있었기에 겨우 이 정도 일로도 나는 충분히 들떴다. 궁금하지도 않을 사람들을 붙잡고 여기저기 소문을 냈다.


"아니, 내가 그냥 달걀을 샀는데 전부 쌍란이더라니까? 이게 이럴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이런 경우 본 적 있어? 뭐? 로또를 사라고? 하하하 야 뭘 또 그렇게까지 해.(샀다. 꽝이었다.)"


약 2주 동안 28개의 쌍란을 거의 매일 마주쳤다. 신기함과 반가움은 당연하게도 꾸준히 감소했다.


"우와! 또 쌍란!"

"오늘도 쌍란이네."

"쌍란이구먼."

"..."


또 쌍란이구먼..

오늘 마지막 남은 달걀 두 알을 삶아 아이들 아침으로 주었다. 역시나 쌍란이었다. 아무 감흥이 없었다.

사실 요 며칠은 피곤하고 지겹다는 생각뿐이었다.


둘째의 방학이 일주일 넘게 지속되고 있었고 첫째까지 덩달아 늦게 가거나 아예 안 가거나 하는 날이 많았다. 아이들을 정말 온 맘 다해 사랑하고 있지만 24시간 매일매일 붙어있자니 때때로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아이들 대신 죽어줄 수도 있 내 심장마저 내어줄 수 있지만 당장 우리 사이에는 약간의 거리가 절실했다.

석방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제대를 코 앞에 둔 군인처럼 달력과 시계를 집착적으로 자주 보며 개학날만 기다렸다.


삶은 달걀 껍질을 까서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나도 모르게 자꾸 한숨을 푹푹 쉰 것도 같다. 혼자 있고 싶단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해야지.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커피를 한 잔 타서 홀짝홀짝 마시다가 거실에 벌러덩 누워 낮잠을 자야지.

내 눈은 이미 눈앞의 아이들이 아닌 며칠 뒤의 내 모습을 바라보느라 초점을 잃었다.


"으노(은호)는 엄마 조아!"

"은유도 엄마가 제일 좋아!"


난데없는 아이들의 사랑고백에 누가 내던진 듯 현실 빠르게 복귀했다.

"응? 엄마도 은유, 은호가 제일 좋아. 사랑해. 하트하트"

재빠르게 손하트까지 날리며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아이들도 꺄르르 웃으며 내게 어설픈 손하트를 날렸다.


"달걀 맛있어요. 엄마."

"맛이써."

"이것 봐. 신기하지? 노른자가 두 개야. 그래서 두 배로 맛있어. 우리 아기들이 행운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이라 이렇게 특별한 달걀이 엄마한테 왔어. 고마워."


방금 전까지 쌍란을 특별한 취급 하지도 않았으면서 갑자기 의미를 잔뜩 부여하고 아름답게 포장했다. 근데 말하고 나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우리는 서로 낯 뜨거운 애정표현을 퍼부으며 한껏 껴안고 입을 맞추고 얼굴을 부볐다.


겨우 보름 전 달걀을 깼다가 인생 첫 쌍란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다음 달걀 역시 쌍란이었을 때 나는 얼마나 신이 났던가. 행운의 징조인가, 나는 선택받은 사람인가, 필요 이상으로 들떴었다.


그러나 익숙해짐 앞에서 일상의 행복이란 이리 쉽게 빛을 잃고 만다. 나는 이제 쌍란에게 아무런 기쁨도 신기함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내 눈앞에 있는 이 아이들이 내 인생의 쌍란 한 판은 아닐까?

벼락 맞을 확률로 한 판 전부가 쌍란인 달걀이 나에게 찾아온 것처럼 이 아이들 나를 겨우겨우 찾아와 준 것이고, 오늘도 내일도 늘 볼 수 있으니 심드렁해졌지만 사실은 보기 드문 행운이나 믿을 수 없는 우연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마지막 쌍란을 함께 먹어치우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일부터 나는 다시 평범한 달걀을 먹게 될 테지만, 그러다 세월이 흐르고 언젠가 또 쌍란을 발견하면 신기함의 환호를 하겠지만, 특별함과 기적은 이미 진작에 나를 찾아왔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이미 내가 받은 큰 선물을 앞에 두고도 더 좋은 것, 더 편한 것, 더 큰 행복만을 바라보느라 내가 뭘 가졌는지도 모르는 바보는 되기 싫다. (하지만 단 며칠 내에 바보가 될 것도 안다.)


매번 일상에 행복해하고 감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간간히, 특히 아주 많이 지쳤을 때, 의식적으로 큰 숨을 한 번 내쉬고 나에게 말해주려 한다.


"정신 차려. 기적은 네게 이미 일어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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