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날숨

by 혜성

무엇을 써야지, 하고 쓰기 시작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오솔길로 접어들어 바다에 이른다.

무얼 쓸까, 아무 생각 없이 한 자를 적었는데 어느새 한 페이지를 넘어간다.

쓰려고 앉으면 그야말로 시작이 반이 된다.

쓰려고 앉는 것까지가 어렵지 한번 쓰면 그 글은 나의 현재를 헤집고 과거를 들쑤시며 미래를 흔들어 놓는다.


글을 쓸 때 생각이 많아지면 써지지가 않는데, 뒤죽박죽인 생각들을 벽돌 쌓듯 쌓아 나가니 멋진 저택은 안 되어도 비 올 때 몸을 숨길 만한 움막 정도가 지어진다.

가끔 진짜 비가 올 때 그 움막 속에 숨기도 한다.

화창하게 갤 때는 움막을 한 바퀴 돌면서 구멍 난 곳을 돌멩이로 메꾸기도 하고, 지푸라기를 모아 움막 위에 허름한 지붕도 만들고, 저기 떨어진 곳에서 돌멩이를 주워 와 휑한 공터를 마당처럼 꾸며도 본다.

커다란 돌멩이를 끙끙 밀고 와 의자 삼아 앉아도 본다.


앉아 바라보니 터가 좋다.

하늘도, 구름도, 숲도 흐릿하게 아지랑이 뒤편으로 펼쳐 있다.

바람의 속도에 맞춰 숨을 한번 크게 내쉰다. 작은 숨들로 이어 본다.

여기는 어제일까, 오늘일까, 내일일까.

바람은 과거에서 와 현재로 불어오는 것일까, 미래에서 과거로 여행하는 나그네일까.

나는 이곳의 주인공일까, 눈치 없이 이곳에 들어온 이방인일까.


띵동.

둘째가 학원에서 안전하게 끝났다는 알람.

현실의 문이 닫히기 전에 몽롱한 글의 세계에서 급하게 뛰어 나온다.

자동차 키를 챙기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호출한다.

아이쿠야, 슬리퍼네.

지난번 슬리퍼를 신고 운전했더니 미끄러져 브레이크가 잘 안 밟히던데.

운동화를 구겨 신고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 속으로 뛰어든다.

5학년이나 된 녀석 30초 기다리면 어떻다고 이리 서두르나.

아니, 걸어가도 되는 길을 뭘 굳이 태워 주기까지.

맨날 하는 생각인데, 늘 생각으로만 하는 푸념.

몸은 벌써 핸들 앞에 앉아 시동을 켜고 있다.

글쓰기의 환상 속에 있지 않았더라면 주차장까지 가는 몸이 이렇게 잽싸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이 넉넉하니 남(자식도 남이니까)에게 인심이 후해진다.


글쓰기.

내 마음의 곳간 열쇠.

쓰지 않으면 곳간이 열리지 않는다.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니 성질이 난다.

사는 게 재미없어진다.

술을 찾는다.

마시니 열이 나고, 열이 나니 서럽다.

눈물이 쏟아진다.

무의식은 침대로 인도한다.

잠의 세계로…,

쉬가 마려워 깬다.

그 새벽은 우울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술잔에 청승 떨며 신세 한탄하는 자신이 싫어진다.

겨우 이것밖에 안 돼?


좋은 글을 읽고 내 마음을 비우는 글을 쓰면 술잔을 든 나도 멋져 보이고 술잔도 있어 보인다.

글자는 나의 숨. 독서는 들숨, 글쓰기는 날숨.

그렇게 나는 숨을 쉰다.

그리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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