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살아온 시간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낸 완전 경상도 남자입니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죠. 게다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일찍 철이 들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보다 포기를 먼저 배웠야 했습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하여 혼자 살았습니다. 스스로 벌어먹고 살며 야간대학교를 다녔습니다. 밤 열한 시 숙소에 돌아와 다 식어빠진 밥을 역시 다 식어버린 국에 말아 삼켰죠.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했습니다. 그런 환경들이 저의 마음을 차갑게 식게 했나 봅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가족들에게 살갑게 대하지를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아빠로서 따뜻한 사랑을 듬뿍 주지 못한 게 가장 후회됩니다.
제가 적어나가는 이 연재 브런치북은 단지 딸과 아빠가 가게를 함께 준비하는 창업 스토리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늦게나마 아빠가 딸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려는 가족 관계개선 스토리입니다. 딸이 북카페 오픈을 준비하며 '독립서적 출간하기' 과정을 배웠습니다. 거기서 작은 책 한 권을 만들었네요. 제목이 '경단녀의 인생재건 프로젝트'입니다. 현재의 자기 이야기죠. 딸과 함께 가게 인테리어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나서 들린 카페에서 그 책을 건네받았습니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단순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딸의 마음과 고민을 좀 더 알게 되었습니다.
딸의 고민은 비단 딸만의 고민이 아닐 겁니다. 출산율 0.7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가 겪는 똑같은 고민일 것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그리고 출산 육아 경력단절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여성들이 똑 같이 겪을 고민. 딸의 그 고민을 보고 들은 아빠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딸이 만든 책, '경단녀의 인생재건 프로젝트'를 보면서 고민을 더 해봐야겠습니다.
내가 살던 세상이 폐허가 되어버렸다. 단지 아들 하나 낳았을 뿐인데.
햇수로 6년째 다니던 회사는 업무도 적성에 잘 맞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너무 좋아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평생 여기서 월급 받아먹으며 지내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은 그 모든 날이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없다. 식사 때면 내가 먹고 싶은 음식보다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나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그림은 아이와 함께하는 스케치북 낙서가 다이고, 읽고 싶은 책은 뒤로한 채 육아 관련 서적을 읽고, 아이돌이 아닌 아이를 쫓아다니고 있다. 내가 알던, 내가 살던, 나의 세상은 다 사라졌다. 회사 출퇴근, 사내 메신저로 회사 욕하던 동료들, 꿀맛 같던 반차 연차, 퇴근 후 자유로운 취미생활, 내가 원하는 것들로만 채워진 하루,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세상이다.문득 내 삶이 폐허가 되었다고 느껴졌다.
무엇으로 채워가야 할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세상으로 만들지 내가 처음부터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 무엇도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뭐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취향의 그물'을 세상에 던져 뭐가 걸려 올라오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게 새로운 직업일 수도, 새로운 인간관계일 수도, 새로운 취미일 수도.
'책!'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문득 떠오른 건 책이었다.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는 만삭 때였는데, 움직이는 게힘들어 할 수 있는 거라곤 앉아서 책 보는 것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가장 마음 편했고 행복했던 때였다. 산후 우울증도 책으로 버텼다. 현실이 힘들고 우울한 생각이 밀려오면 책 속으로 도망치곤 하였다. 종종 남편이나 아기 때문에스트레스를 받으면 장바구니에 쌓인 책들을 한꺼번에 결재했다. 새 책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설렘으로 또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다른 취미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있어도, 책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게 되던, 책과 관련된 걸 하고 싶다고, 꼭 그렇게 될 거라고.
그세상에서도 행복할 수 있겠지?
몇 달간 상가를 보러 다녔다. 뭘 하겠다고 결정한 건 아니었지만, 시세도 알아보고 요즘 핫한 상권이어딘지 조사도 할 겸,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다녔다. 그러다 한 상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광안리 해변 근처에 있는 구옥 2층이었는데 아담하고 포근한 곳이었다. 처음 그곳에 발을 디뎠을 때, 평소 하고 싶던 서점 겸 카페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고, 그날 저녁 덜컥 그 상가를 계약했다. 평소 북카페를 한다면 '온실'이라는 공간으로 꾸미고 싶었다. 그래서 가게 이름을 '책방온실'로 정했다.
'나를 절벽으로 민 사람 덕분에 내게 날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지.'
퇴사 후 힘든 날을 보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만난 문장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그까짓 거 한번 뛰어보자. 여기가 절벽 끝인지 탄탄한 활주로인지.일 년 뒤, 오 년 뒤, 십 년 뒤 나는 또 어떤 좌절을 겪고, 어떻게 극복해서,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이 출발점이 새로운 시작일 수도, 새로운 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행복과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뭐든 해봐야 하지 않을까?